빵을 정리중인 주인은 50대 중반의 머리가 희끗한 사내였다. 그를 따라 나도 고개 숙여 인사했다. 실내의 라디오 소리처럼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가죽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넣고 빵의 진열대를 훑어보는 사이 주인의 뒷모습을 몇번이나 흘끔거렸으나 그때의 주인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클라인구티라는 독특한 이름만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곧 이어 부인으로 보이는 뚱뚱한 중년여성이 아기를 업은 채 들어섰다. 피자조각처럼 판매되는 고구마쇼트케이크를 하나 집어 계산대에 올려놓은 후 빵이 봉지에 담겨지는 걸 바라보면서 나는 입을 열었다.
“여기, 주인 안 바뀌신 거죠?”
“예. 예. 그대롭니다. 여기 500원 있습니다.”
나에게 거스름돈으로 건네주며 두 손을 맞잡은 주인이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3년 전에 이 근처에 살았었거든요. 이사한지가 벌써 3년이 되었네. 근처에 볼일이 있어 잠깐 들렀는데 아직 있네요.”
“아, 그러셨군요. 하하. 3년 전이라······.”
나도 모르게 불쑥 3년 전이란 거짓말이 나왔다. 10년 전이라고 했다가 ‘오픈’한지가 5년 전인데 무슨 말이냐고 묻는다면. 등 뒤에서 서성이던 부인이 그때 끼어들었다.
“우리는 여기, 20년이 훨씬 넘었어요······.”
잠시 추억에 빠져든 중년 부부를 뒤로 하고 밖을 나오자 나에게로 어떤 확신이 찾아들었다. 기둥처럼 이곳을 지키는 빵 가게 주인처럼 그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는. 찢어질듯 펄럭이는 광고현수막처럼 나의 머릿속은 온갖 상념으로 뒤척이기 시작했다. 주방에서 치킨을 튀기면서 주문 전화를 받는 아주머니를 가운데 두고 좌우로 우리들은 항상 바빴다. 감색 추리닝에 항상 검은 고무장화를 신고 배달을 다녔고, 오토바이로 내리막길을 달리다 넘어졌으나 기적적으로 부상을 당하지 않은 일과 배달주소를 확인하고 골목을 빠져나왔을 때 배달상자 안의 치킨이 감쪽같이 사라진 황당한 사건을, 조금 늦었을 뿐인데도 불같이 화를 내던 괴상한 아주머니의 불퉁한 얼굴과 망치바람을 맞으며 나와 혼연일체가 되었던 오토바이의 떨림이 두서없이 떠올라 엇갈렸다. 그물망처럼 얽힌 기억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이십이요. ‘이십’ 번지라는 뜻인지 ‘이십이’라는 뜻인지 몰라 두 군대 다 다녀와야 했던 경험, 주인아주머니가 매일 입던 비닐바지, 치킨을 배달하다 말고 붕어빵을 사 먹으러 멀리까지 원정을 갔던 일, 그리고 치킨을 배달한 수백 개의 가정들. 살갗을 도려내는 한 겨울의 추위 속에서 집집마다 배달을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현관문을 열어젖힐 때 콧속으로 훅 끼쳐 들어오는 집안의 냄새를. 달짝지근한, 새콤한, 비릿한, 눅눅한, 뾰족한, 차가운, 서늘한, 매캐함과 함께 나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명멸하던 주인아저씨가 구체적인 형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상한 들뜸 때문이었을까. 나의 기분이 조금 전의 들뜬 상태와는 달리 저하되어 있었다. 10대였던 그 당시 나는 어떠했던가. 개업 4개월째인 어수선한 분위기와 주인아저씨의 착한 심성을 이용해 저지른 고약한 짓들 중 전단지를 도맡았던 1주일의 기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전단지 대부분을 하수구에 처박고서 남아도는 시간의 반은 책방의 무협지에 반납하고, 나머지 시간엔 여기저기 관광 삼아 돌아다닌 뒤 아저씨에게서 하루 일당으로 7만원을 꼬박꼬박 받아갔고, 그럴 때마다 죄책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지만 곧 잊어버렸다. 우연히 설날이 포함된 지극히 짧았던 2개월의 근무 기간 동안에 주인아저씨는 나의 표면적인 성실함을 믿었다. 시장 야채 배달, 편의점, 자장면과 신문 배달, 노래방, 당구장의 비누, 칫솔, 치약, 샴푸 와 린스로 구성된 선물 세트처럼 수많은 일을 거치면서 명절에 종이가방에 선물세트를 넣어 준 사장으로써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럼에도 나는 핸드폰을 꺼버리는 것으로 보답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만둔다는 자각도 없이 나는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5년 전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는 생각도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아니면, 지금 그곳으로 일하러 가는 중인가. 파카 안에다 야광조끼를 껴입은 건 지하철 화장실에 들렀을 때였다. 가방에서 꺼내 입은 95사이즈의 조끼는 정확히 내 몸의 크기에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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