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를 간단하게 마치고 나자 졸음이 몰려나 나는 다시 눈을 붙였다. 눈을 뜨자 오후 5시가 막 지나고 있었는데, 몸이 여전히 무거웠다.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기고 밖을 나서자 사위가 약간 어둑해져가고 있었다. 바람은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가벼운 것들이 끊임없이 부유하는 날씨가 며칠 째 이어지고 있었다. 눈이 꽁꽁 얼어붙은 빙판을 주의하며 지하철까지 걸어가는 동안 나는 날아가지 않도록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거리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예상대로 지하철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항상 그렇듯 환승한 2호선은 더욱 많아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나는 어깨를 바싹 쪼그리고 가까스로 자리를 잡아 거치적거리는 긴 우산을 머리 위 선반에 올려놓았다. 칡덩굴처럼 엉킨 사람들 틈에서 나는 검게 그을린 군인 한 명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작대기가 세 개로 상병인 건 확실했으나 휴가인지 복귀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투기 시작한 두 여중생을 향한 그의 시선이 병역면제로 굴러가려던 나의 상념을 밀어내었다. 의자 끄트머리에 앉은 한 아주머니도 여자애들을 바라보았다. 여중생들은 ‘척’과 ‘딱’의 앞 뒤 순서를 두고 누가 옳은지를 과장하여 다투는 중이었다.

나 또한 곰곰이 생각해봐도 무엇이 먼저인지 헷갈릴 따름이었다. 어쩌면 철성모와 청설모처럼 둘 다 옳은지도 몰랐다. 어린 시절 누군가와 다툰 기억이 설핏 떠올랐던 것이다. 상대방이 누구인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뻥 뚫려버린 가운데로 치받는 황소바람이 나와 주위 사람들을 화들짝 덮쳤다. 벌써 5코스나 지난 터였다. 열렸던 문이 닫히자 전철은 뒤뚱거리며 다음 역으로 가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뒷주머니에서 드르르 울린 휴대전화의 진동에 진저리치며 나는 눈을 떴다. 졸음이 쏟아져서인지 몸이 으스스했다.

두 달 전 즈음에 통화한 점장이었다. 무언가를 우물우물 먹는 소리로 이번에는 아르바이트생 한 명이 무단결근을 했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 생긴 거 아니냐는 나의 물음에 혀를 끌끌 차면서 점장이 쏘아붙였다.

“뭐시기? 일은 무슨. 이 새끼, 핸드폰 꺼져있거덩. 어제부터 연락을 했는데 하루 종일 꺼 놨어. 어제 월급날이었거덩. 월급일 다음 날 안 나오는 새끼들은 모두 짼 거거덩. 십대여서 처음부터 찝찝하긴 했는데. 또 당했네 또 당했어. 하여튼 불신시대가 아니라 불신씹대야 불신씹대. 진영아. 어떻게 땜빵 안 되남? 이번만 야간에 좀 해줘이. 진짜 너 밖에 없어. 내 마음 알지?”

“좀 생각해 볼게요······.” 나는 오른손으로 휴대전화를 바꿔 쥐었다. 이상하게도 점장의 부탁은 거절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었다.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쉽사리 거절하지 못하는 성향때문이기도 했다.

“됩니꺼, 안 됩니꺼?”

“아마도······.” 아마도, 안 될 거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흐지부지 말끝이 흐려졌다.

“아마는 무슨. 아마추어냐? 그렇게 계속 아마추어의 길을 갈 거냐?”

“······.”

“저녁 7시전까지 꼭 전화 줘이. 알았습니꺼? 근데, 요즘 뭐해?”

“그냥, 피씨 방에서 일하고 있어요.”

확실히 점장의 명랑한 말투는 거절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이미 전화는 끊어진 뒤였다. 야간 근무를 기정사실화한 점장의 말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우물쭈물해서만은 아니었다. 나는 왜 그냥, 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말았는가. 왜 나는 당당히 성인 PC방이라고 말하지 못했는가. 검은 차창으로 짧게 치켜 올라간 머리카락 덕분에 강인해 보이면서도 어쩐지 화가 난 듯도 한 사내가 비쳤다. 등 뒤로 머리칼을 기묘하게 기른 고등학생 세 명의 떠들썩한 모습이 나의 신경을 복권의 은박인 양 긁어대고 있었다. ‘다음기회에’ 혹은 ‘꽝’일 것이다. 날 선 가위로 그들의 갈색 머리카락을 모조리 스포츠형으로 단정히 다듬어준 다음 거꾸로 매달아 채찍을 가하고 싶은 충동이 일순간 내 가슴을 툭툭 치고 사과 없이 지나갔다. 갑작스레 빠져나간 인파들로 텅 비어버린 주위를 둘러보다 나는 ‘장애인, 노약자, 임산부 보호석’이라 적힌 좌석으로 다가가 앉았다. 백발의 노인이 쭈글쭈글 다가와 젊은 놈이 왜 거기에 앉아 있느냐고 다그칠 경우 멱살을 잡아 건방지고 퉁명스레 대꾸할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급격히 팽창해온 방광 때문에 나는 아랫배를 움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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