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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10대였던 나에게도 예외일 순 없었다. 어딘가로 훌쩍 떠나는 것으로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리란 확신 저편에는 언제나 시장 한 귀퉁이에서 야채를 파는 할머니처럼 재래가옥 특유의 눅눅한 벽지로 둘러싸인 집이 놓여 있었다. 누나완 달리 나는 가출한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버지와의 이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고 누나가 나직이 설명해 주었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늦게 귀가하거나 아예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아지기 시작한 누나처럼 나에게도 선생의 말은 언제나 반질반질한 수면제였다. 맨 뒤에 앉아 선생 몰래 책상서랍 가득 찬 무협지와 만화책을 환각제처럼 흡입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니 어느 학기말의 공업시험에서 획득한 점수는 전혀 놀랄만한 게 아니었다. 기가 막히게도 답을 모조리 피해 기입했다는 걸 제외하고. 점수는 5점이었다. 별명이 ‘생쥐’인 공업선생이 도대체 넌 뭐냐고 몰아붙였을 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나 대신 누군가가 킥킥거리며 나지막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신입니다. 답을 모조라 알아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라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협지와 만화가 도움이 되었던 것일까. 고등학교 2학년 때 출전한 논술대회에서 나는 뜻하지 않게 학급에서 1등을 거머쥐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담임선생이 보여준 뚱한 표정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할머니를 설득해 자퇴도장을 찍은 지 채 한 달이 되기도 전에 나는 서울 행 새벽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역에 도착했을 때에는 푸르스름한 어둠이 물러가는 이른 오전이었다. 대합실의 벤치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거나 계단구석에 삼삼오오 모여 웅크린 부랑자들도 서울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주머니 속을 더듬어 누나의 주소가 적힌 종이를 바스락 움켜쥐었다. 종이배처럼 흔들거리는 전철 속에서 나는 낯선 곳에서의 두려움과 설렘과 흥분, 그리고 희망이 뒤척이는 묘한 기분으로 통과중인 한강의 검푸름을 바라보았다. 긴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의 얼굴이 햇빛을 받아 누렇게 떠올랐다. 지평선 너머로 아련하게 솟은 커터 칼의 날처럼 뾰족뾰족 빛나는 빌딩들이 펼쳐졌고, 건물의 표면에서 반사된 빛이 망막에 부딪혀와 나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윙크를 하듯. 아니, 중구의 한 언덕배기를 구불구불 올라간 곳에서 만난 누나의 모습을 예상했다는 듯이.
누나는 외출복을 입고 있었으나 출근하는 게 아니었다. 조금 전에 퇴근한 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는 누나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그 말에 누나는 픽 웃었다. 야간근무라고 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누나가 일할 동안 나는 새벽 기차 칸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센 것이었다. 서울에는 레스토랑도 24시간을 돌린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2년 만난 누나에 대한 첫 인상은 두터운 화장과 볼록렌즈처럼 튀어나와 커다래진 눈이었다. 오후10시와 오전10시 사이를 제외하고 누나는 거의 집밖에 나가지 않았다. 외출이라 해봐야 근처의 장충할인마트에서 식료품을 사오거나 목욕탕에 다녀오는 게 고작이었고, 햇살 가득한 대낮에, 하루 종일 침대에 웅크려 자는 모습이 가뭇없이 지나간 한 달 동안 내가 관찰한 누나의 일상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뒤 나는 당구장으로 첫 일자리를 구했다. 퇴근 후 깊은 밤이 내려앉으면 침대의 넓은 공간은 내 차지였다.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나는 홀로 새벽 거리를 거닐며 서울의 휘황한 불빛을 관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