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 당대총서 20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이광근 옮김 / 당대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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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체제론에 대한 논평




1. 『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을 통해서 본 세계체제론의 내용




『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에서 월러스틴은 노학자의 폭넓고 높은 시야를 통해 세계체제론이 하나의 학문으로 형성되기까지의 서양의 지적발전사를 다루고 그런 이후에 본격적으로 세계체제론의 구체적 내용과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세계체제론은 세계체제라는 분석단위를 가지고, 장기지속이라는 시간단위를 가지며, 학제간 장벽을 허물면서 자신의 작업을 해나가는 것이 근본적 특징이다.

‘세계체제’는 세계경제체제이며 자본주의세계경제체제이다. 자본주의체제는 끊임없는 축적을 목적으로 하며 이는 세계경제의 분업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와 세계경제는 서로를 보완하며,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규정된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기축적 분업을 통해 생산을 핵심부적 제품생산과 주변부적 제품생산으로 양분한다. 이윤획득은 독점화의 정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핵심부적 생산과정들은 바로 준독점에 의해 통제되는 생산과정들을 뜻하는 것이다. 이 결과 잉여가치는 주변부적 제품의 생산자로부터 핵심부적 제품의 생산자에게로 끊임없이 흘러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평등교환의 배경이 된다.

그리고 세계경제는 끊임없는 이윤축적을 위해서 그것에 용이한 정치적 체제로서 (세계제국을 지양하는 한에서) 국가간 체제를 가진다. 자본가들은 팽창적 시장 확대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국가권력의 힘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국가권력이 자본주의적 축적원리에 반할 만큼의 강제력을 가지게 되는 것, 즉 세계제국화되는 것은 자본주의 원리상 자본가들에 의해 반대된다. 그리고 세계경제는 국가간 체제와 더불어 세계체제를 지지하는 중심적 이데올로기로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진다. 이러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속에는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인종주의, 성차별주의)가 내포되어 있으며, 이러한 것들이 과거의 인종혐오주의와 가부장제와는 달리 자본주의적 축적을 뒷받침하는 요소를 구성한다. 세계체제 속에서 시장은 독점시장을 의미하는데, 이 때 독점의 창출과정에서 국가는 주요한 행위자로서 작동한다. 그리고 가장 주요한 경제적 힘을 가진 국가가 헤게모니를 가진다. 지금까지의 헤게모니의 순환은 대략 세 가지였고, 현재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고 월러스틴은 진단하는데 17C 네덜란드, 19C 영국, 20C 미국, 현재의 다중심체제가 그것이다.  

월러스틴에게 세계체제는 역사적 체제이다. 이는 그것이 생성 발전 소멸의 과정을 겪는다는 의미인데, 현재의 시기는 월러스틴에게 현 체제의 소멸기이며 새로운 이행의 시기이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위기 내지는 이행이 나타나는 원인일 텐데, 외견상 그러한 원인은 68혁명의 저항적 힘이 위기를 표면화시켰지만, 내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장기적 추세에 의해 위기는 심화되어 온 것이다. 즉 비용위기로 인한 평균이윤율의 압박이 그러한 위기를 추동하는 실질적 힘이며, 이것이 정치적 위기와 결합함으로써 현재의 이행의 시기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에 대응하는 지배자들의 대응은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로 나뉘지만, 이들 각각의 실효적인 대응력은 미미한 상황이다. 또한 중요한 점은 새로운 운동형태의 등장이다. 기존의 국가장악을 목표로 하는 운동에 대한 환멸로 인한 새로운 운동형태, 즉 운동들의 운동을 향한 경향은 앞으로의 우리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이 현재 이행의 시대를 규정하며,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로 놓여있게 된다.

월러스틴이 기술한 바에 의하면 세계체제에 대한 비판은 실증주의자들(이론적 검증의 문제), 정통 맑스주의(유통주의적이고, 생산주의적인 기반을 무시한다는 비판), 국가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이들(경제주의), 문화적 특수주의자들(경제주의)등으로부터 나타났다. 월러스틴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여러 비판들의 요점은 바로 주체성의 부재라는 점이라고 판단하며, 그에 대해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주체라는 문제는 언제나 구조 속의 주체성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점을 떠나서는 현재의 상황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며 중요한 것은 그러한 구조의 움직임을 아는 것이라고 월러스틴은 주장한다.  




2. 세계체제론에 대한 논평




앞서 세계체제론 비판에 대한 월러스틴의 답변에서 명확하게 나타나듯이, 세계체제론의 전체적 구성은 주체성의 측면을 사상한다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주체성의 측면보다는 체제의 구조적 운동에 방점을 찍겠다는 것이 월러스틴 자신의 전략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세계체제론이 앞으로의 변혁에 대한 전망을 내세우고자 한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주체성의 사상은 심각한 문제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이는 현재를 이행의 시대로 규정할 때 주체성의 힘을 외적인 요소 또는 우연적인 요소로 바라보는 관점을 세계체제론이 유지할 수 있는 배경인데, 이는 자본을 하나의 사물로서 또는 그것만을 진정한 주체로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수많은 맑스주의 경제학들이 가지는 한계를 되풀이하는 것이며, 이것은 자본을 사회적 관계로 바라보는 관점들 즉 노동자계급과 자본의 계급투쟁의 결과로서 현재의 사회적 위기를 바라보는 관점에 의해 비판되고 있는 관점이다. 역사적으로 혁명적 주체성을 제기하는 전통적 관점은 레닌의 제국주의론에서 비롯된다. 그는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에 맞서 혁명적 주체성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당대의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시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이룩하자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레닌의 논의는 민족국가 중심적 시야와 필연적 프롤레타리아 승리 결정론에 갇혀있었다는 한계를 가진다. 이러한 레닌의 한계에 대한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적 정정은 민족국가적 시야를 넘어서며 필연성에 대한 완화를 통해 일견 긍정성을 지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레닌이 취했던 혁명적 주체성의 입장이 월러스틴에게서는 체제 외부적 요소로 머물고 있다. 즉 위기는 실제로는 체제의 자기결정성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월러스틴에게 투쟁의 관건은 이러한 구조적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 즉 앎의 문제이다. 물론 자본주의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문제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파악에서 실제적 투쟁이 차지하는 위치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이다. 따라서 결국 문제는 자본의 자기운동으로 파악할 것인가, 노동과 자본의 계급투쟁의 과정으로 파악할 것인가일 것이다.  

그리고 월러스틴의 자본개념은 임노동과 자본의 적대에서 비롯된다기 보다는 분업과 독점을 전제로 한 끊임없는 축적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맑스가 『자본』에서 갈파한 일상적 시장 속에서 잠재된 임노동과 자본 사이의 근본적 적대를 사상시키는 관점이다. 맑스는 시장을 자유시장과 동일시한 적이 없으며, 그에게 시장은 언제나 불평등한 교환이 발생하는 또는 착취가 발생하는 장소였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상품이 교환되는 모든 시장은 언제나 착취를 전제하며, 그것의 내부에는 노동과 자본의 적대관계가 놓여있다는 것이 맑스의 주장이다. 그러나 월러스틴의 자본개념 속에서 이러한 맑스의 생각은 희미하고 애매하게 놓여있어 착취를 둘러싼 주요한 적대를 자본과 노동 간이라기보다는 국가간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을 형성하게 만든다.

이러한 착취에 대한 관점이 확장된 것이 종속이론적 관점이다. 이들은 세계체제를 중심과 주변으로 바라보면서 중심부 국가들에 의한 주변부국가들의 수탈 문제를 처음으로 체계화하였다. 실제적으로도 중심부국가들의 착취는 엄연한 현실이며, 종속이론가들은 적절한 문제제기를 하였지만, 이들은 그 문제의 근본적 문제를 국가간의 문제로 간주함으로써 착취문제를 진정으로 자본과 노동 간의 문제로 제기할 수 없었다. 이들은 자본주의적 발전이 아닌 다른 종류의 발전이라는 다시금 ‘발전’이라는 문제에 갇히게 되는 길을 밟아나가게 되는데, 그것은 이들의 이론에 내재한 국가주의적 사고에 비추어서 보면 필연적 수순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은 주요한 변혁의 동력으로 제3세계 민중만을 사고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제3세계적 전망이라는 협소한 관점에 머물고 있는 종속이론적 관점을 월러스틴은 반주변을 도입함으로써 좀 더 설명력을 갖추는 것으로 보완하려고 하지만, 월러스틴 역시도 이러한 제3세계적 전망과 국가주의적 접근법의 틀을 극복하기 보다는 유지하고 있는 한계를 지닌다. 중심-주변-반주변이라는 지리적 구분은 세계를 다시금 국가적 경계선들을 중심으로 나누며 그러한 경계를 중심으로 착취가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요한 변혁의 동력은 다시금 주변부로 향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아리기처럼 제3세계 엘리트들과 제1세계 노동자들 간의 동맹이라는 전략으로까지 나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또한 중심과 주변이라는 지리적 관계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최근의 자본주의 발전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지구적인 자본주의화는 더 이상 외부를 발견할 수 없으며, 이 상황은 현재의 자본주의가 맑스가 말한 실질적 포섭의 상황에 놓이게 되며 ‘주변’이라는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세계체제론도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을 위기의 한 요인으로 받아들이지만, 이러한 변화된 상황이 나타내는 결과를 인식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반주변인 한국의 서울에서도 제1세계와 제3세계는 동시에 존재하며, 주변부인 남미와 아프리카에서도 제1세계와 제3세계는 혼재하며, 중심부인 미국에서도 그것은 혼재하고 있다. 즉 더 이상 지리적 관계로 중심과 주변을 나눌 수 없으며 전지구적으로 그것은 혼재한다. 따라서 중심과 주변의 지리적 잔존을 자신의 이론 속에 내재화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제1세계 자본가와 제3세계 민중간의 대결이라는 전망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세계체제론에서 주요한 행위자는 자본가와 국가이다. 그리고 독점의 창출배경은 항상적으로 국가이다. 이러한 국가의 힘을 배경으로 해서만 자본은 이윤창출의 근거가 되는 독점을 창출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의 자본주의발전단계는 이러한 국가중심적인 시각을 상당부분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세계체제론은 국가자율성론을 부정하려고 노력하며 심지어는 경제결정론으로까지 불리지만, 체제 내부에서 행위의 주체가 실제로는 국가에 다름 아니라는 것은 아이러니로 보인다. 초국적 자본과 초국적 기업과 초국적 국제기구들의 활동은 전세계를 다시금 새로운 수준으로 절합하면서 이러한 국가의 중심적 활동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민족국가 중심적 시야를 벗어나 세계적 시야를 가지려고 하지만, 그 내부에서 나타나는 행위의 양상은 과거의 제국주의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세계체제론의 한계로 지적될 수 있겠다.













참고문헌

이매뉴얼 월러스틴, 『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 당대, 2005

이수훈, 『세계체제론』, 나남, 1999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제국』, 이학사, 2001

조정환, 『지구제국』, 갈무리, 2002

정성진, 「세계체제론: 맑스주의적 비판」, 『진보평론』2호, 1999

비버리 J. 실버.지오반니 아리기, ‘남과 북의 노동자’,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7장,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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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독재 - 강제와 동의의 사이에서
책세상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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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독재』 서평


박정희 기념관의 건립에 진보적인 역사학자들이 반대했을 때, 시민사회의 반응은 차가웠다. 많은 사람들이 기념관 건립에 찬성했으며, 심지어 박정희 신드롬마저 부는 한국의 시민사회를 보며 현실의 기억은 역사학자들의 그것과는 다른 것임이 드러났다. 이것이 『대중독재』의 엮은이의 말에서 임지현 교수가 이 책을 내게 된 계기이다. 박정희 독재를 설명하기 위해 근대 독재들, 가령 나치즘, 파시즘, 스탈린주의등을 연구하다보니 독재라는 것이 단순히 폭력적 지배로만 설명될 수 없는 것이고, 그 표면 아래에는 대중들의 자발적 동의라는 메커니즘이 잠재하고 있었다고 그는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상적 파시즘론을 제기했었고, 그 논의를 좀더 진행시킨 것이 바로 이 책 『대중독재』이다. 우선 이 책에서 설명되는 대중독재란 무엇인가를 알아보자.


1. 대중독재란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독재에 대한 연구는 일면적이었다. 지배와 저항의 이분법속에서 대중은 파시즘에 의한 일방적 희생자이거나 잠재적 저항의 담지자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 속에서 파시즘의 헤게모니 메커니즘은 파악되기 어렵다. 즉 대중들의 자발적인 동원이라는 역사적 현실과의 대면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하에서 대중독재 프로젝트는 시작된다. 그리고 이런 대중독재 프로젝트의 이론적 자원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과 알튀세의 호명테제이다. 


아래로부터의 독재를 연구함에 있어 결정적인 조건은 ‘대중사회’의 출현이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되어 제1차 세계대전의 총력전 체제를 거치면서 정비된 20세기 근대 국가의 시스템 속에서 대중이 역사 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이에 따라 대중들의 목소리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되었고, 자발적 동원체제의 작동수준이 곧 그 국가체제의 효율성과 총체적 국력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때부터 “위로부터의 독재”가 ‘아래로부터의 독재’로 전환하게 된다. 이런 전환 속에서 대중은 헤게모니에 수동적으로 포섭만 되는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 수용자가 된다. 대중은 자발적으로 지배헤게모니에, 파시즘에 동의하는 존재이다.


그러한 아래로부터의 독재의 모습은 합의독재와 주권독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대중독재가 전제정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노동을 탄압하는 강압적 자본주의로부터 노동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소비 자본주의로의 구조 변화는 동의에 의한 지배를 더 절실하게 요구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중독재의 정치종교적 측면이 부각되는데, 대중독재가 합의독재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들에게 체계가 요구하는 가치와 관행들이 내면화되어 내재적 강제의 기반이 형성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즉 정교한 지배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

그리고 근대화와 민주화를 매개로한 주권독재는 인민주권을 국민주권으로 전환하면서 자신의 독재를 공고화한다. 구성하는 권력으로서의 일반의지에 기초한 주권독재는 무제한의 권력을 누릴 수 있다. 주권독재는 스스로가 권력을 구성하기 때문에 자가 발전이 가능하며, 따라서 영속적이다. 이러한 주권 독재를 강화하는데 민족주의가 커다란 역할을 행한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독재에 대한 고찰은 어느 누구도 순전히 희생자는 아니며, 모두가 어느 정도는 책임을 공유하고, 공유해야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러한 대중독재 프로젝트의 목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대중독재 체제를 살아내야만 했던 동시대인들을 ‘집합적 유죄’라는 틀로 재단하지 않으면서, 그 과거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사회적 기억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대중독재’ 프로젝트의 지향점이다”


2. 비판적 고찰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독재에 참여하고 동의하며, 공모한다는 것을 『대중독재』는 이야기한다. 수많은 역사적 사례들, 가령 독일의 나치정권,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 프랑스의 비시정권, 스페인의 프랑코정권, 한국의 박정희 정권 등의 독재시절에 대중들이 어떻게 그들에게 동화되어가고 동의해 갔는지를 이 책은 이야기한다.


임지현교수의 이러한 논의는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켜왔다. 그 논란의 폭만큼 이 논의가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과거의 파시즘에, 또는 현재의 파시즘의 권력을 구성하는데 대중들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런 동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 우리는 현재상태를 지양해나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임지현 교수를 비롯한 대중독재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생각일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질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런 선의 속에서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대중독재의 관점 속에서 현실의 역동적인 지배현실, 즉 대중의 동의라는 지배현실을 바라보는 것은 그것이 선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오류점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1)대중에 대한 관점

전통사회주의에서 대중은 손쉽게 즉자적 계급으로 치부되었다. 그들이 하는 투쟁은 경제주의적인 것이었고, 그들은 당과 전위들의 도움없이는 새로운 사회구성을 할 수 있는 대자적 계급이 될 수 없었다. 민중들의 능동성에 대한 강조를 하지만, 언제나 그 곁에는 전위나 당이 함께여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그러면 임지현교수가 대중을 바라보는 관점은 어떠한가? 일단 대중들을 능동적인 주체로서 세워놓는다. 즉 앞서도 이야기하였듯이, 대중은 능동적으로 파시즘에 동의하는 존재이다. 그 이전의 이론들에서처럼, 대중들은 수동적인 피해자이거나 신화화된 잠재적 저항자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파시즘에 동의하는 존재들이다. 대중들을 능동적으로 설정하는 측면으로 본다면 임지현교수는 전통사회주의적 관점과는 구별된다. 하지만 그 능동성의 내용을 살펴보자. 그들이 능동적인 것은 지배에 동의하는 순간일 뿐이다. 그들이 저항하는 순간에 그들에겐 능동성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저항은 언제나 지배헤게모니와의 관계 속에서만 고찰가능한 것이지 그들 내부의 욕망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전통적인 사회주의에서 당을 중심으로 해서 대중들의 주체적인 욕망을 통제해왔듯이, 임지현교수도 대중의 능동성을 지배헤게모니와의 관계로서만 파악함으로써 같은 오류를 범한다. 대중독재시대의 대중의 저항은 임지현교수와 같은 대중독재론자들의 지도 이후에나 실질적으로 가능한 것일 것이다. 그것을 능동적 동의라는 미명으로 포장하지만, 실제로 대상화라는 측면으로 보면 전통사회주의의 대중관과 임지현교수의 대중관은 상통한다.


2)대중의 자발적 동의와 헤게모니적 장치들

대중의 자발성을 핵심으로 할 때 우리는 문제가 개인적인 틀로 협소화되어 버리는 것을 알아야한다. 개인적인 해결, 즉 각 개인들이 지배체제에 동의해온 역사를 반성하는 것, 즉 그 사회적 기억을 저장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을 가져올 수 있는가? 대중독재는 헤게모니적 장치들에 의한 지배방식이 아닌 대중들의 동의에 기반한 지배방식으로 현 사회의 권력의 특성을 설명, 비판하고 있다. 그는 권력이 동의메커니즘으로 자신을 구성해 나가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있지만, 그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문제는 그 메커니즘이 아니라 그 구성을 이루고 있는 대중(의 자발성)에 맞추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임지현 교수에게 권력은 대중이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대중이 발휘하고 있는 것인가? 이는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문제제기 없이 대중의 반성에 기대어 문제를 다시 개인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실은 사람들 사이의 위계인 것 같지만 실제로 그 위계를 취하는 것은 바로 권력인 것이다. 메커니즘의 하위범주인 대중의 동의를 문제삼을 때, 메커니즘 전체에 대한 비판은 사라진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의식은 남을 수 있다. 그런 장치들을 자본이나 권력이 만듦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자발적 동의가 그런 메커니즘들을 강화하는 것, 그 자체는 비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반론말이다. 만약 대중독재가 그런 것들에 대한 지적으로서 사용될 수 있다면 그것의 유용성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말이다.


그러나 동의와 메커니즘은 분리가능한 것이 아니다. 동의하는 대중 따로 비판하고 메커니즘 따로 비판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오류이다. 그리고 더욱더 큰 오류지점은 그런 헤게모니틀마저도 벗어나는 대중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3)헤게모니와 그 너머

헤게모니에 포섭되는 것에서 수동적인 것과 능동적인 것의 구분은 의미가 있는가?

실제로 헤게모니란 개념자체가 대중의 수동성을 전제하고 있는 개념은 아닌가?

알튀세르가 말하는 호명이란 테제도 그러한 것은 아닌가?


네그리는 『제국』에서 헤게모니 개념에 대해 짤막한 비판을 시도한다. 그람시를 맑스적 정치에 전혀 여지를 남겨주지 않는 헤게모니라는 이상한 개념의 창시자로 규정하면서 말이다.(1)1) 맑스에게서 정치는 대중의 운동이며, 그 목표는 주체의 자기생산이다. 그리고 그 주체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점증하는 조직화가 공산주의라는 것을 창조하는 것으로 나아간다.(2)2) 그러나 헤게모니 개념속에 그러한 주체성이 들어갈 자리가 존재하는가? 이는 앞선 임지현교수의 대중관과 연관성이 깊다.


대중독재라는 틀 속에서 우리는 역사를 변화시켜온 추동력을 발견할 수 있는가? 독재에 찬성해온 대중들 또는 지배를 강화시켜주는 저항들에서 우리는 지금까지의 역사적 변화를 추동해온 주체성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 속에서는 지금까지의 역사는 단지 지배 세력 내에서의 변화 속에서만 그리고 그에 종속되어 움직이는 대중의 움직으로만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대중사회의 출현 배경을 언급하는 곳을 보자.

“1차 세계 대전 이후, 비조직화된 노동자, 엄격한 경영 서열, 긴 노동시간, 제한된 소비를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특히 강력한 노동운동에 직면한 이 시기의 서구 자본주의는 이전의 강제적 자본주의에서 동의/합의에 의한 지배로 변신해야 했다”


대중사회는 노동자계급의 능동적인 계급투쟁들에 대한 자본의 대응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 이전에 존재한 강제적 자본주의에서 합의/동의에 의한 자본주의로의 전환은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의한 것이다. 즉 그런 노동자계급의 힘들을 묶어두기 위한 몸부림이 이런 전환을 가져온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염두에 둬야 할 것은 『대중독재』안에서도 몇 군데에서 언급이 되지만, 자본과 권력, 파시즘권력에게 대중의 동의를 획득해나가는 과정은 부드러운 과정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전술의 필사적인 탐색에 가깝다는 것이다. 권력과 자본은 대중의 힘에 기대지 않고는 자신들의 힘을 유지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가장 큰 취약점이다. 헤게모니적 권력의 강함 이면에는 그들의 기생성과 의존성이 놓여있다.

그러한 기생성과 의존성은 권력에게 항상적인 위기의 요소이다. 강력해보이던 헤게모니적 장치들은 항상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공립학교의 위기가 그것이다. 도대체 학교제도의 변화들의 원인을 무엇으로 이야기할 것인가? 훈육하려 하지만 훈육당하지 않는 주체들의 움직임들이 그런 변화들을 추동한다.


4)기억의 정치학


임지현 교수를 비롯한 『대중독재』의 필자들은 역사속의 파시즘체제, 대중독재체제라는 것을 특권화시킨다. 즉 반도덕적이었던 그 시대의 모습들이 지금 현재 우리 내부의 기억에 잠재화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우리의 현재까지도 질식시킨다고 보는 것 같다. 기억에 대한 정치학을 강조하는 맥락도 이런 점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계속 이야기되지만 이것이 파시즘만의 메커니즘은 아니라, 자본주의적 권력이 자신을 강화하는 메커니즘들 속에서 항상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은 대중의 힘, 활력이 필요하다. 자본에게는 가변자본으로서의 노동력이 필요하고, 권력에게는 자신들을 지탱해줄 사람들의 힘이 필요하다. 네그리는 지금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형태의 직접민주주의는 통합주의(coporatism)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두 가지 형태로 뉴딜/케인즈인 것과 파시즘적인 것을 든다.(3)3) 나는 대중독재 개념이 근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저러한 두 가지의 민주주의에 대한 상들이라고 생각한다. 즉 외관상 민주주의적인 것, 즉 대중들의 힘을 요청하지만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은 그러한 힘들을 자신들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체제들 말이다. 그 과정에서 살아있는 활력으로서의 다중들은 대중, 인민, 국민, 노동자, 시민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구성방식을 지적하는 것이 대중독재이다. 그러나 대중독재는 저러한 현실을 대중들이 만들어왔다고 고소(告訴)하는 방식의 개념이다. 그 과정에서 다중들의 능동적 힘은 벙어리가 된다.


사람들이 파시즘적 심성을 가지고 계속 살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권력이 끊임없이 그런 작용들을 해오고 있다.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려고 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욕망을 가로막는 자본주의적 권력과 투쟁해나가려 한다. 그러나 대중독재론자들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만 대중의 모습을 기억해내려고 하며 그것을 단죄하려 한다. 그들의 기억은 살아있지도 움직이지도 않으며 멈추어서 화석화되어 있다.


새로운 삶의 전략은 관념적 비판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중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서 발전한다. 이 점을 인식하지 못하면 할 수없이 노동계급의 무력함(자본의 헤게모니)과 해방된 사회에 대한 갈망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대중에 대한 반성촉구일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꿈을 꾸며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움직여 나가는데, 그에 반해 대중독재개념은 파시즘체제라는 기억속에 매몰되어 살아꿈틀거리는 대중들의 모습을 포착하지 못한다. 화석화된 기억의 정치학은 이제 살아 움직이는 꿈의 정치학에 자리를 내줘야 한다.


미주

(1)마이클하트& 안토니오네그리, 『제국』, 이학사, 2002, 313p

(2)같은 책, 103p

(3)안토니오 네그리, 『혁명의 시간』, 갈무리, 2004, 19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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