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11월 2주
스필버그의 최신 영화가 12월에 개봉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목이 ‘틴틴...’으로 시작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수십년 동안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새삼 느끼는 점이 있다.
‘죠스’ 신드롬으로 떠들썩했던 일이 불과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을까 싶었다.
상어가 출몰했을 때 그 긴장감 넘치는 음악과 함께 상어의 공격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사투가 그려지는 모습에 제대로 공포감을 느꼈던 그 영화 ‘죠스’.
TV에서 처음으로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이불 속에서 그 영화를 보던 어린 나는 이제 어느새 30대 후반이 되었고, 당시 패기 넘치는 청년이었던 스필버그 감독은 이제 70을 바라보는 할아버지가,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배우 로버트 쇼와 로이 샤이더는 이미 세상을 떠난지 오래 되어버린.. 세월이 유수같음을 알게 해주는 추억 속의 명작이 되었다.
몇 달 전 아주 우연찮게 그가 연출한 영화 중에서 ‘죠스’ 보다도 한참이나 더 오래된 ‘심야의 미술관’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 명화극장에서 한번 봤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영화였다.
60년대 작품인데 지금 보면 다소 촌스럽기도 하고, 때론 엉성한 부분도 있지만, 시대를 떠나서 제법 흥미로운 영화였다. 미술작품과 관련하여 3편의 옴니버스 구성으로 이어진 어두운 분위기의 공포영화로 여기서 2번째 작품의 연출자가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그밖에 주변의 입소문을 통해 알게 된 자동차 추격씬이 일품인 ‘대결’과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슈가랜드 특급’ 역시 스필버그가 ‘죠스’로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기 이전에 나온 진흙 속의 진주같은 작품임을 알았다.
이 3편의 영화들을 본 후 난 이미 천재 감독의 역량이 벌써부터 범상치 않았다는 사실도 느끼게 되었다. 모두 당시 시대의 영화 분위기와는 차별화되는 색다른 흥미로움과 긴장감, 바로 그런 느낌을 계속해서 스크린에서 보여주는 것이 스필버그의 특징이었다. 이제 헐리우드를 대표하는 스타 감독이 된 그가 오늘날 이 자리에 오기 전까지, 그의 천재성이 아직 세상에 드러나기 전의 시절에 연출한 3편의 숨겨진 수작들을 내 나름대로의 감상으로 조명해보고 싶다.
1. 심야의 화랑(Night Gallery/1969)
3편의 그림에 담긴 각각의 사연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한 영화인데 모든 에피소드의 스토리가 재미있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1편. 저택을 노리고 숙부를 살해한 조카가 이후 계단 벽에 걸린 그림이 조금씩 바뀌어가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그림은 저택과 저택 주변의 풍경을 그린 것인데 처음엔 그림 속의 묘지가 파헤쳐지더니, 이후 관이 열리고, 관에서 죽은 숙부의 시신이 나오고, 그 시신이 일어나서 점차 저택으로 걸어오고, 결국 문 앞까지 와서 문을 두드리는 모습으로 그림이 계속 변화하는 것이다. 헌데 마지막 그림의 장면을 본 후 실제로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죄의식과 공포에 질린 조카 역시 결국 계단에서 굴러 사망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기이한 현상은 바로 또다른 저택의 식구인 집사가 화가를 고용해 꾸민 음모였던 것, 결국 원래의 집 주인들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저택을 물려받은 집사는 그러나 그 자신 또한 생각지도 못한 끔찍한 일을 겪게 된다는 내용...
그 다음 2번째 스토리. 부유하면서도 탐욕이 강한, 그리고 선천적으로 눈이 보이지 않는 어느 중년부인이 잠시만이라도 직접 세상을 보기 위해 음모를 꾸며 어느 남자에게서 눈을 이식받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안대를 풀고 세상과 마주 보게 되는 바로 그 순간 대규모 정전으로 주변은 한순간에 암흑천지가 되고 만다. 수술을 하고도 다시 어두운 세상과 마주하게 된 중년부인은 결국 절규를 하다 사고를 당하게 된다는 내용...
3편은 나치전범의 과거를 지닌 한 남자가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이들에게 쫓기자 평소 좋아하던 미술관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기를 소원했지만, 자신이 바라던 평화로운 낚시꾼의 그림이 아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고통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다.
당시만 해도 인과응보에 대한 인식이 강했던 것 같다. 3편의 에피소드 모두 죄를 지은 주인공들이 결국 자신의 과욕으로 인해 벌을 받게 된다는 엔딩으로 마무리되는 특색이 있다.
이 가운데 2번째 스토리의 연출자가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였다. 짧은 에피소드였지만 충분히 인상적인 내용이었다. 아마도 이 당시 그의 나이가 20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런 연출력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30분여 정도의 짧은 내용이지만 어느 에피소드 못지않게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주인공 여성은 많은 사람들이 가진 세상을 보는 눈을 선천적으로 가지지 못했지만,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부유함과 그로 인해 더욱 탐욕스러운 마음을 지닌 존재로 외로운 사람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눈을 뜨는 것이 외로움을 극복하려는 방법이기 보다는 더 많은 탐욕을 위한 단계로 비춰진다. 그런 그녀가 마침내 눈을 뜨는 바로 그 순간 대규모 정전으로 모든 것이 다시 눈을 뜨기 전과 같은 모습이 되면서 그녀의 탐욕으로는 결코 세상과 가까워질 수 없음을 암시하는데, 60년대답게 전형적인 인과응보 형식의 교훈을 남기는 스토리이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의 대사를 보면 각막 이식이 당시만해도 흔하지 않거나 아예 불가능으로 치부했던 시절이었음도 알 수 있게 된다.
80년대까지 인기를 끌었던 환상특급 시리즈와 유사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영화인데 이런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옴니버스 시리즈물을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한다.
2. 대결(Duel/1971)
요즘은 이 영화에 대해서 모르는 이들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인터넷을 통해서도 이미 스필버그의 숨겨진 걸작으로 널리 알려졌다. 영화가 나온지 40년이라는 엄청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 감상해도 그 긴장감은 여전하다.
영화 시작부터 기괴한 음향이 흐른다. 처음엔 쇠파이프 내부가 울리는 그런 소리인가 했지만 영화를 감상하고 나서 그것은 죽음의 추격을 벌인 정체불명의 트레일러가 울부짖는 외침처럼 들려왔다. 영화는 시작되었지만 뭔가 특별한 것은 없다. 그저 어느 가정집 차고에서 나온 차량 한대가 시내를 지나 시외도로를 달리는 모습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잡다한 뉴스 등 그저 평범해보이는 장면뿐이다.
하지만 평온했던 도로의 모습은 서서히 두 자동차 간의 광란에 가까운 추격전으로 펼쳐지기 시작한다. 끼어들기, 추월하기 등으로 인해 도로 위에서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이런 사건을 영화화했다는 점도 흥미롭지만 그 긴장감이나 액션을 연출한 스필버그의 재능 역시 감탄스럽다. 특히 트럭 하단의 바퀴 부분이나 도로바닥 가까이를 근접해서 보여주면서 트럭의 위압감이나 속도감을 더 배가시켜 영화의 긴장감과 액션을 더해준다.
그리고, 이 영화의 대결은 단지 승용차와 트럭의 대결만이 아니다. 승용차 운전자는 분류하자면 화이트칼라 중산층, 그리고 트럭 운전사는 그 실체를 끝내 드러내진 않지만 짐작으로 청바지에 가죽부츠를 신는 노동자 계층으로 추정된다. 당시 시대상이 깔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중산층과 노동자층을 대표하는 이들이 서로 투쟁을 벌이는 구도이기도 하다. 거기엔 중산층을 대표하는 주인공 데니스 웨버의 모습이 자신을 쫓아온 트럭 운전수를 오인해 식당에서 시비가 붙어 싸움이 나지만 이내 일방적으로 맞고 쓰러지거나, 트럭에게 쫓기는 내내 불안해하하는 등 다소 무력하고 약하며 그 실체나 존재감이 미미한 그런 모습으로 보여짐으로서 중산층의 각성을 일깨우는 역할을 해준다.
계급과 계급의 대결이라고도 볼 수 있는 마지막 대결에서 결국 데니스 웨버가 트럭 운전사에게 승리를 거두긴 하지만 그 승리 뒤엔 허무함만이 남았을 뿐이다. 어딘지도 모를 계곡에서 자신의 차마저 잃어버린 채 그 자리에 주저앉은 그의 모습은 이제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막막해 보이기만 하다. 미국 중산층의 위기에 대한 일종의 경고 메시지를 액션극으로 승화시킨 스필버그의 영화재능은 이 TV용 장편영화 하나로 확실히 보여준 것 같다.
3. 슈가랜드 특급(The Sugarland Express/1974)
1969년 텍사스에서 발생한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이고 유명배우인 골디 혼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있다.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남자가 아내의 면회를 통해 전과자라는 이유로 인해 자신의 아이를 정부에서 입양시키려 한다는 움직임을 알게 되고 아내의 도움을 받아 탈옥에 성공, 아이를 찾아 나서게 된다. 경찰을 인질로 한 채 여행을 떠나면서 각종 언론을 통해 큰 이슈의 중심에 서게 된 그들은 그러나 결국 경찰과의 대치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는 내용...
이 영화를 보면 생각나는 영화들이 제법 많다. 자동차 추격씬은 역시 스필버그 자신의 작품이었던 '대결'을 떠올리게 하고, 아이 때문에 탈옥을 감행하지만 이래저래 어리숙한 모습을 많이 보이는 주인공 부부를 볼 때면 코엔형제의 ‘애리조나 유괴사건’의 어리숙한 유괴범 니콜라스 케이지와 홀리 헌터 부부 같은 설정과 그런 느낌의 코미디같은 성격이, 어딘지 모를 인생의 끝을 향해 떠나지만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삶의 여정이 되는 비극적인 로드무비라는 점과 그들을 동정하는 경찰들의 모습에서는 리들리 스코트의 ‘델마와 루이스’와 유사하다. 대결을 제외하고는 이 영화가 훨씬 먼저 만들어졌으니 어쩌면 후임 감독들이 스필버그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여기서도 스필버그 감독의 초기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사회 비판적인 시각이 빠지지 않고 나타난다. 탈옥의 계기가 되는 전과자 부모의 아이 양육문제, 언론플레이에 놀아나는 일반 시민들의 잘못된 영웅주의에 대한 환상, 총기 소지의 위험성, 경찰의 허술한 인질대응책 등 사회 전반의 대표적인 문제점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데, 80년대 이후 스필버그의 흥행작들에 익숙했던 나로서는 다소 낯선 느낌이 들었다. 스필버그가 이따금씩 ‘칼라 퍼플’이나 ‘태양의 제국’, ‘쉰들러 리스트’같은 자신의 전공과는 다른 진지한 영화들을 선보이는 것도 아마 이런 초창기 작품을 만들 당시의 열정 때문인 것 같다. 자신도 스스로 예술작가로서의 명성을 희망해왔다고 하니 단지 흥행만이 중요한 목표는 아닌 듯 싶다. 그리고 때로는 그가 바라던대로 흥행성보다는 예술적 재능을 살린 영화들이 기대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