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한강 지음 / 창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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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도청에 남은 어린 친구들도 아마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겁니다. 그 양심의 보석을 죽음과 맞바꿔도 좋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총을 메고 창 아래 웅크려앉아 배가 고프다고 말하던 아이들, 소회의실에 남은 카스텔라와 환타를 얼른 가져와 먹어도 되느냐고 묻던 아이들이, 죽음에 대해서 뭘 알고 그런 선택을 했겠습니까?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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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한강 지음 / 창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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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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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한강 지음 / 창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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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집으로 보낸다는 지도부의 지침을 거부한 건 바로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그들의 의지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만 17세까지만이라도 억지로 돌려보내는 일에 긴 언쟁과 설득이 필요했습니다.
상황실장으로부터 내가 지시 받은 작전은 실상 작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계엄군이 도청에 다다를 것으로 예상된 시각은 새벽 두시였고, 우리는 한시 삼십분부터 이층 복도로 나가 있었습니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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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한강 지음 / 창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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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실에서 방으로 돌아온다고 해서 쉴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정좌를 하고 정면의 철창을 똑바로 바라봐야 했습니다.
눈동자만 움직여도 담뱃불로 지져버리겠다고 한 하사가 말했고,
본보기 삼아 실제로 한 중년 남자의 눈꺼풀을 담뱃불로 문질렀습니다. 무심코 손을 움직여 얼굴을 만진 고등학생을, 의식을 잃고 축늘어질 때까지 때리고 밟았습니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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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한강 지음 / 창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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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볼펜이었습니다, 모나미 검정 볼펜. 그걸 손가락 사이에교차시켜 끼우게 했습니다.
그야 왼손이죠. 오른손으론 조서를 써야 하니까.
예, 그렇게 비틀었습니다. 이 방향으로도 이렇게.
처음엔 견딜 만했습니다. 하지만 날마다 같은 곳에 그렇게 하니까 상처가 깊어졌어요. 피와 진물이 섞여 흘렀습니다. 나중엔 이자리에 하얀 뼈가 들여다보였습니다. 뼈가 드러나니까 알코올에 적신약솜을 끼워주더군요.
제가 수감된 방에는 남자들만 약 아흔명이 있었는데, 절반 이상이 같은 자리에 약솜을 끼우고 있었습니다. 대화는 금지돼 있었어요.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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