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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거리에서 1
오쿠다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은 세상 어디에나 있는 '중학생의 왕따' 문제를 다양한 시점에서 풀어낸 이야기입니다. 모든 일에는 흑백을 가릴 수 없는 측면이 있기 마련이라,100퍼센트의 악도, 100퍼센트의 정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그러한 점을 공감해 주신다면 작가로서 더없이 행복할 겁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할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기 성찰과 상상력임에 분명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 p 7 작가의 말 中
작가의 말이 대개는 뒷편에 실리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특이하게 전면에 작가가 드러나 넌지시 독자에게 어떤 '관점'을 부여해준다. 마치 수학여행 갈 때 선생님이 학생들을 인도하며 "얘들아 여기로 와" 라고 말하는 듯 하다. 이렇게 주어진 특정한 관점을, 일종의 색안경을 끼고 책을 읽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책을 읽어야 겠다 생각했다. 비록 색안경이 보통의 의미와는 다르게 중립적인 입장을 띄는 색안경이란게 차이긴 하지만.
대개 사람들은 학교 폭력 문제를 바라보고 다룰 때, 피해자의 입장에서 감정을 이입해 사건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마치 자신이 정의의 심판관이 된 것 마냥 사건이 터지기만 하면 피해자를 옹호하고 가해자를 무분별하게 비판한다. 사건의 전말, 진행과정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하면서, 단지 결과론적으로 피해자와 가해자란 딱지만 보고 비판의 잣대가 정해지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경고라도 하기 위해 절대 어느 한 관점에 편향되어 사건을 바라보지 말라는 의미에서 책 머리말에 작가가 등장한 듯 하다.
하지만 1권을 읽을 때 작가의 완곡한 부탁을 쉽게 들어줄 수 없었다. 나도 어느새 사건의 전말도 알지 못하지만 여느 사람들처럼 나구라 유이치의 편에 서게 되었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네 명의 아이들이 미웠고 그 아이들을 죄인으로 몰아부쳤다. 작가가 경고한 흑백논리에 빠진 것이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선과 악으로 분리시켜 본 것이다. 마치 동전이 앞면과 뒷면을 갖고 있는 것처럼 정의와 악이 존재한다는 믿음에 내 뉴런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이 소설을 다양한 관점을 통해 하나하나 그 정의의 기준을 모호하게 하고, 풍화되게 한다. 과연 절대 선과 절대 악이란 것이 존재할까? 답은 아마 '아니다'일 것이다. 소설의 후반부로 갈 수록 나구라의 죽음의 전말이 드러나는데, 그럴 때 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관점의 한계와 좁은 시야를 느꼈다. 나의 시각은 결국 닫힌 사각이었다. 비단 나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런 닫힌 시야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누군가의 잘잘못을 함부로 판단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우스운가.
'법' 자체에도 굉장히 치명적인 한계점이 있다. 정의가 과연 무엇인지 인간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은 존재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한강과 같은 핵심 사상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읋 바라본다.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한다. 더더욱 공정한 시각을 유지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법은 그러한 진리를 부정하고 있다. 잘잘못을 마치 칼로 무를 자르듯 자를 수 있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한계점은 13세와 14세라는 법적처분의 기준 차이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허난다. 겨우 몇 개월 일찍, 그리고 늦게 태어났다는 차이만으로 잘못의 유무가 결정된다. 절대 선과 절대 악이 없다고 경고하는 게 이 책의 펏번 째 핵심이 아닐까 싶다.
한편으론 이 소설은 이 사회의, 인류의 한 모습을 롤케익을 자르듯 그 한 단편을 보여준다. 인간의 이기심이 그 조각이다. 가해자로 몰리는 네 아이의 부모님들의 이기심이 그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유이치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고 슬퍼하기 보다는 자신의 아들의 미래를 걱정한다. 어쩌면 아주 당연한 이야기다. 그래서일까 읽는 내 마음은 더욱 아팠다. 나도 결국에 저런 입장에 처하게 된다면 그들의 부모와 같은 입장을 같고, 비슷한 처신을 할 것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을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네 가정이 일종의 연합체가 되기도 한다. 공동의 목적 아래 적의 적은 동료가 된다. 사회에서도 굉장히 흔하게 일어나는 일을 아주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그 목적도 결국 너무 이기적이다. 자신의 아이들을 보호하는 게 결국 그들의 목적이다. 나구라의 부모의 입장을 가끔 생각하긴 하지만 결국 다시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본다.
하지만 그 연합도 완전하게 지속되지 못한다. 그 속에서 또 자신의 아이는 잘못이 없다고 책임을 전가한다. 달라질 것 없는 상황에서도 서로 책임을 넘기려 하고 자신의 짐을 덜려고만 한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책임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유이치의 부모에게 사죄했으면 어땠을까?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에 부끄러움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소설에 후반부에 가며 사건의 전말을 드러나며 가해자와 피해자의 개념이 모호해졌다. 결국 나구라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건 네 아이만의 행동이 아니었다. 나구라 본인에게도 그 책임이 있었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완전히 이야기하진 않겠지만. 나같았어도 나구라를 왕따시키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은 대체로 비슷하니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말에서 작가가 말했듯이 넓은 관점,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관점을 갖는 것의 중요성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책을 읽는 행위가 참 좋다는 논외의 생각이 든다. 책은 다양한 사람이 되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니까. 이 책이 그래서 조금은 복잡할 수 도 있고, 한편으로는 모험적인 시도일 수 있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관점을 제시한 이유일 것이다.
이기적인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관점의 확장이다. 그리고 이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작가는 보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 그런 희망이 새벽에 해가 떠오르듯 보인다. 친구들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침묵하는 그런 모습에서 찐한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인간의 이기심은 우정과 사랑으로 치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이기심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관심이고, 그들과의 감정의 교류이다.
침욱의 거리에서라는 제목이 책을 읽는 중간까지만 해도 좋지 않은 의미로 느껴졌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 조금 생각이 다르다. 침묵은 나쁜 침묵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에겐 좋은 침묵이 가끔은 약이 되고 치유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