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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 셀레스테 - 니콜라우스 하이델바흐와 올레 쾨네케의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이야기 ㅣ 떡잎그림책 21
니콜라우스 하이델바흐.올레 쾨네케 지음, 김영진 옮김 / 시금치 / 2025년 9월
평점 :

《잘자, 셀레스테》는 하루 저녁에 벌어지는 남매의 공포 이야기 배틀전이다. 부모가 이웃집 생일파티에 초대되어 외출한 사이, 오빠 보리스는 동생 셀레스테의 저녁과 잠자리를 책임진다. ‘무서운 이야기’를 해달라는 동생의 요구에 충실히 응하지만, 예상치 못한 반응에 번번이 당황하며 계속해서 이야기를 바꿔 가는 이야기꾼 보리스의 고군분투와, 이를 유쾌하게 받아치는 셀레스테의 태도는 이 책이 2025년 볼로냐 라가치상(BolognaRagazzi Award) 「코믹스–얼리 리더」 부문 대상작이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부모는 오빠 보리스에게 동생 셀레스테의 저녁 식사, 잠자리 수발, 보호까지 맡기고 외출한다. 보리스는 부모의 역할을 임시로 위임받았지만, 아직 어른의 권위는 갖지 못한 사춘기에 접어든 청소년의 나이로 보인다. 그는 부모가 준비한 건강한 저녁 식사 메뉴를 슬쩍 무시하고, 금지된 영화도 즐기며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만끽한다. 그리고 동생이 요구한 ‘무서운 이야기’에 응답하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최대한 무서운 이야기들을 동원한다. 전통적인 유령, 신화 속 괴물, 옛이야기 속 무시무시한 존재들까지. 이는 동생을 빨리 재우려는 목적이자, 동시에 아는 것을 과시하며 장난을 치고 싶은 전형적인 사춘기 오빠의 모습이다.

부모의 부재 속에서 벌어지는 남매간의 공포 이야기 대결이라는 단순한 줄거리 속에서, 《잘자, 셀레스테》는 매우 독특한 형식을 취한다. 펼침 페이지마다 구조는 철저히 반복된다. 한쪽 페이지에는 니콜라우스 하이델바흐가 그려낸 초현실적 기법의 공포 이야기 장면이 펼쳐지고, 맞은편에는 올레 쾨네케가 만화적 표현으로 그린 현실의 남매 장면이 배치된다. 두 작가는 같은 순간을 각자의 방식으로 그려내지만, 두 세계는 결코 섞이지 않는다. 공포의 세계와 일상의 세계는 나란히 놓인 채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 병치 구조는 개성 강한 두 작가의 협업 방식이자, 동시에 이야기의 핵심 장치다. 하이델바흐는 신화와 옛이야기에서 길어 올린 오래되고 근원적인 공포의 이미지를 정면으로 그려낸다. 머리가 여러 개인 개, 잘린 머리를 들고 등장하는 머리 없는 존재, 인간을 위협하는 기괴한 괴물들. 이 이미지들은 특정한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서구 신화와 전설 속에 반복되어온 공포의 원형을 느슨하게 호출한다. 지하 세계의 문을 지키는 머리 셋 달린 괴물 개 케르베로스, 세례요한의 잘린 머리와 살로메의 이야기, 머리 잘린 기사 설화처럼 오랫동안 이어져온 순교와 처형의 이미지들이다. 하이델바흐는 이러한 전통적 공포 모티브를 약화시키거나 아이용으로 순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실하고 진지하게 그림으로 재현해낸다.

하지만 이러한 공포는 셀레스테에게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셀레스테는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핵심은 그녀가 아직 신화 속 공포나 옛이야기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상징적 이미지로 그려낼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는 점이다.

잘린 머리를 들고 다니는 머리 없는 여성은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잠옷 속으로 고개를 숨기며 흉내 낼 수 있는 놀이가 되고, 거대한 두꺼비 괴물은 지하실에서 만난 길 잃은 아기 두꺼비, 오히려 도와주어야 할 귀여운 존재로 전환된다. 셀레스테가 반응하는 것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이해하고 몸으로 재현할 수 있는 것들이다. 보리스가 이야기해주는 공포는 이해되지 않기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기에 셀레스테에게는 놀이로 바뀐다.

그래서 보리스의 ‘무서운 이야기’ 공격은 번번이 실패한다. 공포가 무너지고 이야기가 장난으로 바뀌는 순간을 올레 쾨네케는 만화적 그림과 끊임없이 오가는 남매의 말풍선 속에 담아낸다. 그러다 마침내 두 아이의 관계는 결정적인 전환을 맞는다.
“그럼 네가 해. 어디 한번 들어 보자.”
이 말과 함께 이야기의 주도권은 셀레스테에게 넘어간다. 공포의 정의도, 이야기의 권력도, 어른의 부재가 만들어낸 특별한 밤의 통제권도 모두 이동한다. 셀레스테가 들려주는 ‘무서운 이야기’는 신화도, 옛이야기도 아니다. 셀레스테 자신이 등장하고, 유니콘을 타고 날아다니는 ‘내가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오빠 보리스를 단번에 잠재운다. 보리스는 이야기를 듣다 잠이 들고, 밤은 그렇게 끝난다. 부모가 돌아와 발견한 것은 평화롭게 잠든 남매의 모습뿐이다.
이 지점에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이 책의 구조는 단순한 ‘이야기 속 이야기’가 아니라, 두 나이대의 아이가 공포를 받아들이는 방식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차이는 두 작가의 그림 방식과 정확히 겹쳐진다. 두 작가의 작품 세계를 몰라도 읽을 수 있지만, 그 차이를 알수록 더 흥미로워지는 그림책이다. 전혀 다른 기법과 시선을 가진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이 협업은, 그 자체로 이 이야기의 시스템이 된다.

이 두 세계를 동시에 바라보는 위치에서 가장 즐거운 독서를 하는 존재는 독자다. 하이델바흐가 그려낸 진지하고 초현실적인 공포와, 쾨네케가 포착한 어린아이의 반응을 오가며 읽는 독자는 이 ‘무서운 이야기 겨루기’의 최종 승리자가 된다. 그래서 《잘자, 셀레스테》는 독자층을 ‘얼리 리더’(6~9세)로 한정하지 않는다. 처음 읽을 때는 셀레스테의 장난기와 당돌함이 먼저 보이고, 조금 더 자라서는 보리스가 끌어오는 옛이야기의 공포가 흥미로워진다. 시간이 더 흐르면, 부모가 부재한 저녁을 아이들끼리 무사히 넘기는 이야기와 그 모든 일을 모른 채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까지 함께 읽히게 된다. 하이델바흐의 수채화와 올레 쾨네케의 코믹스, 말풍선 속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이 그림책은 제2의 독자, 즉 읽어주는 양육자와 성인 독자에게도 전혀 다른 재미와 웃음의 지점을 제공한다. 그림책의 책장은 닫히지만, 이야기는 처음 읽었던 독자가 자라면서 계속해서 새롭게 작동한다.
*네이버카페 제이그림책포럼 서평이벤트에 참여하여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도서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