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막대 파란 상자 Dear 그림책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글.그림, 이지원 옮김 / 사계절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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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작가의 19년만에 개정판으로 다시 나온 그림책입니다.

개정되면서 책의 크기도, 겉표지도 바뀌었습니다. (크기가 줄어들면서 책장에 쏙 꽂히는 크기가 되었습니다.)


어느쪽으로 보아도 상관없이 이야기가 이어지는, 그리고 한 가운데서 만나게 되는 양방향 그림책이에요.

어느 쪽을 택하느냐는 독자의 선택인거지요.

저는 보티첼리 '봄'그림 중 미의 3여신 그림이 있는 <파란 막대>쪽으로 선택.

페이지를 넘겨봅니다.



아홉 살 생일을 맞이한 클라라는 집안 모든 여자 아이들에게 대대로 물려내려오는 파란색 막대를 선물받습니다.

대대로 물려내려오는 것?

유산?

보통 귀한 보물, 아름다운 보석이나 땅, 성? 이런 것을 물려받지 않나요?


황당하고 이상하고 당황스럽고...

어쩌면 클라라의 첫 마음도 이러했을거 같아요.

어머니의 막대 예전 주인 이야기는 주자언니, 그 이전엔 엄마, 엄마의 엄마(아델라 할머니), 주욱 죽 고조할머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벽에 걸린 사진과 초상화 속 인물들이 갑자기 클라라를 쳐다보는 이 느낌.

그 다음은 너야, 너.

이렇게 듣고 보니, 이 막대가 무언가 특별하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클라라 자신도 특별하게 느껴지지요.

거기에 어머니는 한 권의 공책을 내밉니다.

이 노트엔 9살 상속자들이 파란 막대를 가지고 했던 일들이 기록되어 있지요.

그렇게...클라라는 자신 윗대의 9살 상속자들의 비밀 유산상속기를 읽어내려가게 됩니다.

그리고...자신의 새로운 파란 막대 유산 상속기를 꿈꾸게 되지요.

책을 반대로 돌려서 또다른 9살 상속자를 만나러 가볼까요?


역시나 어리둥절한 9살 상속자 에릭입니다.

에릭 역시 9살 생일날 아버지로부터 집안 대대로 9살 남자 아이들에게 상속되는 파란 상자를 받습니다.


아버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 상자의 대물림을 이야기하시고 공책 한 권을 주시지요.

최초의 유산 상속기 기록자 레오나르도 할아버지.

세상을 향해 열린 문 사이로 파랑새가 레오나르도의 비밀과 바람을 함께 품고 날아가고 있습니다.


"나도 한번 그렇게 해 보고 싶은데......"


그다음 9살 후계자들의 공책을 읽어가며 에릭 역시 그 놀이에 흥분하고 공감하고 따라 해보리라...마음 먹습니다.

그리고 결심하지요.


"다른 사람한테 물려주기 전에, 나도 이 공책에 멋진 이야기를 적어 놓을 테야."


이렇게 이상하고도 멋진 유산 상속기라니요.

사실 이 유산은 별다른 게 없습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파란 상자와 막대 1개.

하지만 거기엔 멋진 마법이 숨겨져 있지요.

어느 누구인지 모르지만 9살 생일날이라는 유산 상속 시한을 정해놓은 순간, 그 날의 의미는 더욱 특별해집니다.

9살 생일날.

그 날, 한 집안의 남자 아이로서, 여자 아이로서 무언가를 상속받는다는 것.

그건 나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 일이거든요.

고조, 증조, 얼굴 뵙기 어려운, 기록에서 이름으로나, 초상화나 빛바랜 사진 속에서나 보던 분들이 사용했던 그 물건이 그대로 나에게 전달되는 건 그 존재가 실체를 갖고 살아나는 느낌이 듭니다.

사실 이런 의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 이야기를 전하는 이에게도, 듣는 이에게도, 바라보는 이에게도 아주 특별하게 바뀌지요. 정말 이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이라는 것, 우리에겐 이런 특별함이 있어 하는 공동체 의식이랄까요.

거기에 실체를 가진 물건과 실사용기, 감상기라니요.

파란 상자, 파란 막대.

사실은 모르고 보면 이게 뭐야 싶게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입니다.

거기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상자와 막대, 이 물건들을 가지고 놀았던 이야기는 아주 특별하거나 마법같은 이야기는 아니에요.

우리 아이들이 날마다 벌이는 소소한 일상에서 가끔씩 어른들을 놀라게 하는 특별한 일들이 더 많잖아요.

그런데 단편적이고 소소한 일상들이 기록 공책에 담기는 순간, 그 물건들과 공책은 하나의 이야기로 특별한 힘을 가지게 됩니다.

기록과 이야기의 놀라운 마법이지요.

아이는 기록을 읽으며 그림과 사진 속에서만 존재하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자신과 똑같은 아이로 놀이를 통해 느낀 감정과 열망을 그대로 공유하게 되지요. 시간의 간격을 건너뛰며 동질감을 느끼게 되고 살아있는 유산을 물려받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 공책에 무언가를 적어 남기겠다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겠다 결심하게 되지요.


그렇게 각자 새로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아이들은 작가가 만들어놓은 또다른 장치에 의해 만나게 됩니다.

트레이싱지로 구현되는 양방향 그림책의 새로운 묘미에요.

이러한 방식이 19년 전에 이미 그림책 독자를 만났었다는 재미.

(어린 시절 저희 집 아이들은 이런 트레이싱지 물성을 굉장히 재미나게 즐겼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이야기의 힘을 새롭게 느껴봅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귀한 유산은 뭐가 있을까요?

유형의 화려하고 빛나는 것이 아니더라도,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속에 함께 하고 전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새로운 유산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특별하고도 이상한 유산의 상속자가 된다면

그 공책에는 어떤 이야기가 기록되어질까요.

기대됩니다.

공책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으니까요.


*이 책은 서평이벤트로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주관적인 감상을 적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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