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뛰어난 작품은 <예쁜이 수술>.
그러나 밑줄 그은 곳은 전체적(구조적)으로는 뛰어나다고 여기지 않은 <입주 작가>의 마지막 부분.

나에게는 불행히도 다음의 것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소설이란 어떠해야 하고, 좋은 소설이란 어떠한 요소를 가져야 하며, 소설을 소설다운 좋은 소설로 만들기 위해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하는지.

그리고 나는 운 좋게도 그 후에 커먼 마리아 마차도를 읽었다.

이제 때가 된 것이다. 배운 것을 깡그리 잊어야 하는 때가.




독자들이여, 나는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 여자가 우리의 입주 공간에 들어와 신경질을 부리면서 지금까지 이 글을 이렇게 말아먹은 거야? 정말이지 이 여자는 다른 예술가들 사이에서 먹고 자고 일하기엔 너무 예민하고 너무 허약하고 완전 미쳤어. 아니면, 여러분이 좀더 옹졸하다면 나를 클리셰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고딕소설에서 뛰쳐나온 듯한, 어이없는 사춘기 트라우마를 지니고 벌벌 떠는 박약한 것.
그러나 독자들이여, 한번 물어보자. 지금껏 여러분이 배심원 심의를 해오면서, 자기 자신을 진실로 마주한 사람을 한 번이라도 마주친 적이 있는가? 몇 명쯤은 있겠지만, 장담하는데, 많지는 않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을 알고 지냈지만, 전보다 더 건강히 다시 자라도록 스스로 나뭇가지를 일찌감치 솎아낸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숲속에서의 밤은 선물이었다고, 나는 한 점 거짓 없이 말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단 한 번도 어둠 속에서 제 자신을 마주하는 일 없이 살다가 죽는다. 언젠가 어느 날, 여러분이 호숫가를 빙 돌다가, 물위로 허리를 굽히고는, 스스로를 운좋은 사람으로 여길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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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친밀한 이방인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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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 나온 책인데, 이제야 알게 되었다. <안나>의 원작이라는 홍보 때문이었다. 소설을 읽고 어떤 부분이 드라마화하기 좋은 부분인지는 금세 감이 왔다. 그러나 아마 내가 느낀 많은 부분들이 드라마화 하기 까다로운 부분일 것이다. (아직 드라마는 못 봤다.)

우연찮게도 마농 가르시아의 <여성은 순종적으로 태어나지 않았다>와 비슷한 시기에 주문해서 <친밀한 이방인>을 읽고 바로 <여성은 순종적으로...>를 연이어 읽게 되었다.
페미니즘 관련서를 읽으며 항상 혼란에 빠지는 부분은 여성에 삶에 내재해 있는 이론적 모순들이다. 여성으로 태어나서 여성으로 살아보지 않으면 그 모순을 알 수가 없다. 형제나 남편, 스승과의 대화에서 항상 막히는 부분은 그런 부분들이다. 남성으로 태어나 남성으로 살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딜레마들. 모순들.

<여성은 순종적으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매우 좋은 이론서이다. 출발부터 모순의 현존을 인정하고 시작한다. 게일 루빈의 <여성 거래>(<일탈> 수록)를 읽고 처음 받았던 충격이 혼재한 모순들의 부딪힘이었다. 어느 한 구절도 나를 선명한 색채로 프로파간다하지 않았다. 그 비슷한 여러 저작들이 떠오른다. 이론서들의 목록 속에서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소설들이다.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과 <모순>.
그리고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

그 후로 정한아의 <친밀한 이방인>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여성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몇몇 지점이 진보하였고, 몇몇 지점은 지겨울 정도로 그대로이다. 그러나 대체로 여전히 '모순' 속에 있다.

그 모순의 한가운데에 탈출구처럼 뚫린 송곳 구멍이 있다. '레즈비언' 코드는 탈출구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탈출의 희망만 불러일으키는 바람 구멍일 뿐일까?

마농 가르시아의 분석처럼 여성은 순종적으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때때로 순종성은 적극적인 생존전략이 된다. 그 모순의 굴레를 탈출하려면, 고정된 성 역할의 사회적 압력에서 벗어나려면, 레즈비언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혹은 레즈비언인 척하는 제스추어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소설의 스포일러가 될까봐 리뷰에서 어떤 말도 선명하게 할 수가 없는데, 이 기분은 이 소설을 읽고 난 기분과 거의 일치한다.

선명하지 않은 문장을 하나만 덧붙이고 감상을 끝내련다.

<친밀한 이방인>은 정상성의 사회에서 '마땅히 있어야 할', 혹은 '있으면 더 없이 좋을' 사회적 요소들을 연기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는 '이방인'이지만, '친밀'했던 것이다.
그것은 친구일 수도, 애인일 수도, 배우자일 수도... 먼 곳에서 바라본 나의 역할 모델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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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이 말했다 - 2021 볼로냐 라가치상 코믹스 영어덜트 부문 대상 수상작 스토리잉크 1
제레미 모로 지음, 이나무 옮김 / 웅진주니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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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니버스식 구조로 만들어진 우화이다. 그리고 진지한 어른들을 위한 잘 만들어진 만화이다. 요즘에는 이런 작품을 그래픽노블이라고도 하더라.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이어지며 '죽음'에 성찰로 포커스가 모아지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이 이야기를 '고장 난' 사람들에 대한 우화로 읽었다.

동물들의 모습을 빌려 등장하는 사람들, 그리고 정상성에서 벗어난 사람들.
정상성에서 벗어나게 되는 계기(혹은 근원적 이유)가 코모도 도마뱀과 원숭이로 드러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소중한 사람을 죽음으로 잃어본 사람들은 절대로 정상성 속에서 안주할 수가 없지.
어떤 깨달음이 거대한 덤프트럭 바퀴처럼 내 머리를 치고 지나갈 테니까.
(내 아버지가 덤프트럭 바퀴에 치여 돌아가셔서 이런 비유를 쓴 것은 절대 아니다. 이런 비유는 매우 고전적이고 상투적이지 않나?)

아무튼,
초등4학년 아들에게 보여주려고 산 책치고는 너무 무겁고,
중년의 어른 인간이 여름 해변에서 읽기에는 지나치게 쓸쓸하지만,
그래서 손에 꼭 쥐게 되는 책이다.

내 삶에서 나를 떠나갔던 사람들을 (코모도 도마뱀처럼) 누구도 먹을 수 없게 땅에 묻거나, (원숭이처럼) 하늘로 높이 들어올리는 내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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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설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퍼 담기에 급급한 졸작이었다. 하지만 그 미숙한 감상의 이면에는 그것을 글로 쓸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헛되지 않다는 믿음이 있었다. 나는 검은 표지에 새겨진 새하얀 나선의 빛을 손으로 더듬어보았다. 그것은 바다 밑에 잠긴 배 위에 매달린 돛의 음영, 혹은 버려진 책을 집어든 단 한 사람의 공감, 끝없이 실패하면서 다시 시작하는 제로의 출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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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친밀한 이방인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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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언제라도 로맨스에 감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가장 쉽고 빠른 마취제다. 그들은 그렇게 사기극을 완성했다. 하지만 어떤 사기극이든 진실을 담보하기 마련이다. 그러지 않고는 사람들을 속여넘길 수 없다. 엠의 일기가 그랬다. 엠이 기록한 하루하루, 그 속에 이유미의 그림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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