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네 개의 돌 - 사진이 있는 수필
이대성 지음 / 바른북스 / 2020년 10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을과 겨울 사이.

집 안으로 안으로 들이고 들이는 계절.

밖을 향해 열렸던 눈과 마음을 조금씩 닫아가는 시간이 왔다.

늘 바라보던 창가에는 잎사귀를 떨구고 서 있는 나무들과 어느새 슬금슬금 하늘을 채운 미세먼지가 가득해서

이르게 지는 햇살처럼 빠르게 거실 블라인드를 내리고 책을 집어 들게 된다.

책을 읽기에 좋은 계절. 겨울이 오고 있다.

이런 계절에는 수필이 읽기에 딱 좋다. (개인적인 취향이다)

이대성 작가님의 인생을 담은 수필집이 나왔다기에 손을 들었다.


어떤 사진과 어떤 글이 들었을지 궁금!

출판사 이름이 '바른북스'여서인지 몰라도 어딘가 모르게 책이 반듯해 보인다. ㅎㅎㅎ

그리고 이 책 안에 들어 있는 마흔 네 개의 돌이라고 표현된 글들이 단단하고 바른 마음을 담고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목차가 담백하다.

책을 여는 마음이 가벼웠던 어느 늦은 가을의 주말이었다.

연날리기

첫 글이 '연날리기'여서인지... 아빠 생각이 났다.

첫째의 겨울방학에 아이들과 함께 놀러간 아빠의 은퇴후 장만한 시골집에서 손주들을 위해 연을 만드시던 아빠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의 내게 그랬던 것처럼 아빠는 정말이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연을 만들어 주셨었다.

어릴때 공원 관사에서 잠시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추운 겨울이면 아빠와 공원을 뛰어다니며 연을 날리곤 했다. 이 글을 보니 그 시절과 지난 겨울의 추억이 영화처럼 머릿 속을 맴돌았다.

게다가 이 부분은 아빠가 어린 시절의 나와 동생을 보며 하시던 이야기와 똑같아서 웃음이 났다.


겨울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연날리기, 팽이치기, 썰매 타기, 자치기 등 다양한 놀이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 누가 멀리 띄우는지를 시합하며 정원 초하루부터 대보름 사이에 주로 즐겼었다.


첫 글부터 어딘지 친근한 느낌이 퐁퐁 솟아올랐다. ㅎㅎㅎ

그리고 몇장 더 책장을 넘기는데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 떡 하니 실려 있어서 깜짝 놀랐다.

응? 여긴 월류봉?

영동군 황간면 원촌리에서 시작되는 월류봉 둘레길은 완만한 석천 계곡의 물길을 따라 산허리로 이어진다. 굽이진 길은 논두렁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고 산허리를 돌아간다.

둘레길을 걸으며 <마흔 네 개의 돌> 중에서 p.25


부모님이 지내시는 곳 지명이 나와서 반갑기도 했지만, 두분이 산책하러 자주 다니시는 월류봉 근처의 산책길을 작가가 걸었다고 생각하니 친근한 느낌은 더더욱 진해졌다.

어린 시절 우리집 거실에 왁자지껄 모여 주말이나 저녁시간을 즐기시던 아빠와 친구분들이 떠올랐다.

그 분들 중의 한 사람인 듯이 어느 새 작가는 책 속에서 걸어나와 책을 읽는 나의 옆 자리 소파에 앉아 내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건네 주는 이웃집 삼촌 또는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등단한 작가분이라 그런지 글이 잔잔한 듯 하면서도 깔끔하다.


젓가락 데이

아이디어가 신박해서 좋았다. 빼빼로를 좋아해서 빼빼로 데이에 바깥편이 사주는 빼빼로 먹는 걸 즐기는 편이었지만, 그 의미에 대해 늘 생각은 하는 편이어서 가래떡 데이로 바꾸자는 이야기에 가래떡을 먹어볼까 생각도 해봤다.

(알고보니 귀가 얇은 편인가? ㅋㅋㅋㅋ)

그런데 11월 11일이라는 날을 젓가락 데이로 삼자니... 이렇게 신박할 수가!

이런 생각은 해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데 정말 좋은 생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젓가락 쓰는 3국 중에 우리나라가 제일 똑똑한 것만 같은 느낌을 살려 이런 날을 지정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후원하는 업계가 없으려나? 제철업계에서 좀 밀어보면 되려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여행을 못다니고 있는 시절에 이런 글을 보니 괜히 반갑고 마음이 들뜨고 그랬다.

동해고속도로를 여행하다 보면 시원하게 탁 트인 바다가 있고,

영동고속도로나 당진~영덕선 고속도로를 달리면 수려한 산세가 아름다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요즘은 고속도로가 사방으로 뚫려 지역간 이동 거리가 짧아져 전국 어디를 가든지 한나절이면 다 갈 수 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마흔 네 개의 돌> 중에서 p.145

어딘가 산이든 바다든 옆에 끼고 달리는 도로가 눈 앞에 펼쳐지는 기분이 잠시 들었다.

한나절이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상상을 해보니 눈을 감은 검은 색 도화지 위에 강릉의 어느 해변이, 경주의 야경이 멋진 첨성대 앞 공원이, 지리산의 어느 사찰 가는 길이, 부산의 인적 드문 해변이, 남해의 구불거리는 해안도로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상상여행이지만 잠시 행복했다!)

물론 글의 내용 그 자체는 고속도로 휴게소 내부의 비위생적 상태에 대한 글이었지만....

이 한 두 줄에 잠시 힐링 한 것으로 만족. 생각의 흐름이야 작가의 것인만큼 독자가 어찌할 수는 없는 거니까.

자판 두드리는 소리

이 글은 참. 사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팔순의 어머니가 글을 쓰는 열정을 바라보는 환갑의 아들의 시선이지만 내가 그 어머니라면 어떨까.... 싶었다.

팔순의 나이여도 쓰고 싶은 글이 떠오르고 컴퓨터를 다룰 줄 알아서 힘들더라도 뭔가 노력해 볼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즐거울까? 회갑에 찾은 즐거움을 25년이나 이어갈 수 있다는 게 그 분에겐 정말이지 다행이었겠다. 누군가의 인생을 그것도 나의 곱절이나 되는 시간을 살아온 분의 인생을 짐작할 수는 없겠지만 어쩐지 하루의 잠깐씩은 진심으로 진지하고도 즐거운 시간으로 보내고 계실 것만 같다.

이 문장에 어머니를 보며 느낀 인생의 진리를 작가는 문장으로 거두어 적어두었다.

그 문장이 무겁고도 뜨거워서 참 좋았다.

어떤 새도 날개를 펴지 않고는 날 수 없듯이 사람도 자기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으며 행복해질 수 없다고 한다. 내가 나를 묶어 놓고 있으면 영영 행복해질 수 없고, 날개가 있어도 창공으로 훨훨 오를 수 없다.

자판 두드리는 소리 <마흔 네 개의 돌> 중에서 p. 155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사는 아이들의 모습이... 비단 그 아이들의 모습 그 자체로만 멈추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속이 상했다. 그래서 이 독립영화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쓰레기-환경오염'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어린 시절부터 무시무시한 경고를 들어왔으니....

몇 십 년은 족히 넘은 이슈인데도 아직 뾰족한 해답은 누구도 내놓지 않았다.

누구 하나가 내놓을 답도 아닐 것이고, 분리수거를 열심히 하거나 플라스틱용기가 아닌 다른 방법의 소비를 할 수 있는 길을 찾는 내가 하는 작은 노력들이 어마어마한 쓰레기 생산의 속도에 과연 비할바가 있을까 싶다.

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급적 쓰고 있는 물건들을 오래쓰고자 노력하고, 이미 생산된 쓰레기를 소비해야만 하는 우리로서는 사라지지 않는 쓰레기로 포장을 만들어내는 기업에게 조금 다른 방법을 찾아달라고 한 번 더 호소할 수 있는 용기와 애씀은 우리가 갖춰볼 수 있지 않을까?

작가가 곱게 하나하나 고르고 고른 글 들 중에 이런 글이 있어서 고마웠다.

굳이 좋은 이야기만 하지도, 어려운 이야기만 늘어놓지도 않았지만 지금 우리가 발 붙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그런 글들이었다.

하나씩 고르고 골랐을 글들이었겠구나 싶었다.

자신과 자신의 삶을 드러낼 조약돌들을 하나씩 찬찬히 내려놓았을 것이다.

연날리기, 위대한 손길, 둘레길을 걸으며, 나의 보약(커피 ㅋㅋ), 혼자라는 것, 슬프고도 아픈 과거, 새벽을 깨우는 아침 풍경, 담배, 아멜리아 카렌, 사랑하는 만큼, 테러, 풍금이 있던 자리, 결혼 청첩장, 제주에 가던 날, 나의 인사, 젓가락 데이, 입대하던 날, 연습, T여인, 폐지줍는 할머니, 내 인생의 블랙박스, 토끼와 물고기, 냄새 그리고 향기, 요리하는 남자, 탈북 청소년, 1,000 감사 노트,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자판 두드리는 소리, 선거, 가련한 말티즈, 신체발부 수지부모, 코로나19를 겪으며, 누가 뽀롱이를 죽였나, 두 이야기, 케이팝, 삶의 날씨, 어느 고양이의 죽음, 헬조선, 마지막 여행, 아빠 용돈, 방천에서, 플라스틱 차이나, 염원, 어느 가을날의 일기

목차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니 어떤 남자가 떠오른다. 훈훈하고 마음 따뜻한 남자가.

삶의 철학을 닮는 게 수필이라던 인트로의 그 한문장처럼 아마도 작가는 이 글들에 자신의 파편들을 담아뒀을 거니까. 어느 친한 먼 친척 아저씨 같은 반가움이 생겨서.. 알고 지내는 사람이 하나 더 생긴 거 같아 좋다.

덤덤하니 따뜻한 글을 이 겨울의 초입에 선물 받았다.


※ 이 글은 바른북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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