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
오강남.성소은 지음, 최진영 그림 / 판미동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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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제목이 심상치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 뭔가 묘하게 무슨 책인지 종류를 쉽게 가늠할 수 없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 제목만으로 책을 고르는 편이다.

나는 매 순간 완성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띠지에 적힌 저 글귀가 마음에 꽂혀서 꼭 읽고 싶었다고나 할까..!? 이 책을 읽고나면, 나를 완성하기 위한 방법론을 배울 수 있는 것인가?

(게다가 책을 읽겠다고 마음 먹을 당시 이 즈음의 일정은 매우 한가했고, 마감일이 하필 또 생일이어서 운명같은 느낌이었다! 이번 주가 이토록 끊임없이 바쁠 줄은 꿈에도 몰랐다 ;ㅁ;)

책을 읽는데... 초등시절 읽어보던 구약성서처럼 어려웠다. 요즘 성서는 읽기 편하게 되어있는데... 개정을 몇 번 거치기 전의 성서는 꼭 무슨 갓 번역한 외국서적처럼(그것도 시집!)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한국어인데 한국어가 아닌 느낌. (그 당시의 내가 어려서 더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겠다고 괜히 손을 들었나... 후회도 살짝 밀려왔다.

어느 책이든 우직하게 읽어나가는 나로서는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좀처럼 책장이 쉬이 넘어가질 않았다.

이런... 낭패가 있나!

검은건 글이고, 하얀건 종이인 건 알겠고. 저 글씨가 어떤 발음이고 어떻게 이어지는 문장인줄은 알겠는데... 눈과 머리는 알겠으나 가슴으로 꽂히지를 않았다.

그래서 잠시 책을 내려두었는데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다시 주말일정이 시작되기 전 마음을 가라앉히고 책을 잡았다.

그런데, 책을 처음 읽을때 보지 못했던 한장의 글 귀가 보였다.

나답게 살고자. 애쓴다. 라.... 나에게 '너는 소신있는 사람이야.'라고 말해주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지금에서야 이 책은 아마도 출판사 편집자가 독자를 유혹하기 위해 넣어둔 한 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저 마음씨 고와보이는 문장은 이 책의 정체성을 참 잘 드러낸다.

이 책이 어떤책인지 궁금하다면.. 지은이들이 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소개하는 글에서 살짝 맛을 볼 수 있다. 잠깐 읽어보면 알겠지만. 동서양을 막론한 '나'를 향한 탐구서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이 왜...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졌는지 다른 사람들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존재론, 서양철학사(소크라테스, 플라톤, 칸트까지...!), 동양철학(아마 윤리시간에나 마지막으로 들었었을 법한!), 동학사상, 씨알사상(어디선가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기억이 잘;;;)을 망라하려는 작가들의 큰 계획이 엿보인다.

'문학, 예술, 심리, 과학.....을 아우르리라!'는 포부가 드러나있다.


사실, 개인적으로 '십우도'가 뭔지 몰랐다. 책을 읽다가.. 이 책이 왜 이렇게 눈에 안 들어오나 싶었더니 이 책의 전체적인 컨셉인 십우도에 대한 감이 없었던 게 가장 큰 것 같다.

절반쯤 읽다가 안되겠어서 십우도에 대해 찾아봤다. 그러니까 조금은... 이해가 갈랑 말랑했다.

(이 책은 그냥 편하게 읽는 책으로 쉽게 접근하면 안된다는 경고를.... 하고 싶다.) 나름 철학에도 관심이 있었고, 상담공부도 깊게는 아니지만 대학에서 개론을 살짝 넘어서는 만큼은 해봤고, 오랜시간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교특유의 추상적인 표현에 대해서도 익숙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건 뭐.... 이해하고 넘어갈 것 같으면 이건 뭔가 싶은 말이 연속으로 폭탄처럼 계속 터져나왔다.

이 책은 '나'를 향한 시선을 가능한한 많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게 소개한 편집숍같은 책이다.

십우도에 대한 이해도 없어서 그랬겠지만, 알았다 하더라도 열가지 단계(또는 그림?)에 대한 비유나 설명을 위해 소개하는 책자들의 종류나 장르가 워낙 폭 넓어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어느새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종이구나.'의 상태가 되어버리고 마는 책이었다.

가끔씩 번개처럼 마음에 꽂히는 부분을 찾아내는 묘미가 있는 책이었다. 이번 리뷰는 그런 부분들을 집어서 소개해 볼까 한다.


산티아고의 보물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와 동떨어진 저기 어딘가에 있는 특별한 무엇일까? 그럴 수 없다. 산티아고가 일궈낸 보물은 자연과 세계를 하나로 보게 된 '자아의 신화'이자 그것을 알아차리기까지 두려움없이 나선 매순간이었다.

성찰 시작 | 혼란, 헤매다 <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 중에서 p.43


이 부분까지는 그럭저럭 잘 읽혀져나갔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1단계 심우 | 소를 찾아나섬에 대한 설명에 대한 예시로 들며 소개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잘 이해가 갔던건 <연금술사>를 읽었봤기 때문이리라. 내가 전쳋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책을 통해 소개하는 개념은 작가와 내가 보는 개념에 대한 시각이 같을 수 있어서 쉬웠겠지.


이 부분이 마음에 든 건, 이 문장때문이다. 산티아고의 보물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기까지 두려움없이 나선 매순간'이라는 것 말이다. 목적이 있건 없건 간에 또한 그에 대한 보상이 있건 없건 간에 알 수 없는 곳으로 발을 내딛는다는 건 많은 두려움이 있기 마련인데, 그 길을 걸어내는 한 걸음 한걸음 그 자체가 보물이 된다는 말이 얼마나 귀한 말인가 싶었다. 아이를 키우며 맞는 매일이. 익숙한 듯 싶다가도 도통 모르겠는 육아라는 길이. 내가 어떤 이유에도 불구하고 발을 내딛어야 하는 시간들이라는 점에서 결국에는 내게 보물이 되기를 잠시 바래봤다.

(육아 이외에도 내가 도전하고 있는 작고 하찮아 보이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말이다.)


극심한 고통이 느껴진다면 달리기를 멈추고, 숨을 골라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정직한 물음을 묻자.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며,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 내게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인가?

견적 | 자취를 봄 <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 중에서 p.67

이 내용은 특별히 저자의 코멘트가 없이 유상강설이 잘려진채 적힌 것인지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책의 내용을 넣어둔 것인지 모르겠다. 유상강설 편집부에서 낸 <수행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라는 책의 내용인 듯 보인다.


사실 이 쯤부터 이 책의 구성이 복잡하다고 느껴서 책을 든 손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대체 뭐가 저자의 생각이고 무엇이 인용구이고 이 책을 이 카테고리에 왜 적어둔 것인지 충분한 설명이 없어보였다.

그저 의식이 흘러가는 대로 우선은 책에서 보이는 내 의식의 성장에 필요한 원석들을 주워담는 수 밖에 없었다.

길을 나섰으니, 무엇을 찾으려고 나섰는지 깨우치라는 시퀀스인건가 싶었다. 어쨌든 누구에게나 잠시 멈추어서 나를 돌아보게 되는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순간이 아직은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살다보면 덜컥. 하는 순간이 있다. 특별히 내게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내게는 그런 순간이 조금 이르게 자주 찾아왔었다. 어린 시절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한 마음에 대한 벌인지. 그에 대한 답인지는 몰라도 쓴맛을 너무 빨리 봐버린 나는 이미 20대에 나에 대해,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 내가 가고 싶은 길에 대해, 그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었다. (오히려 하루하루가 바쁜 지금은 그런 생각을 접어둔 걸 보면, 어쩌면 그땐 몸이 참 편했나보다 싶기도 하다 ㅎㅎ)


그리고 이 부분을 보니, 그 시절의 나는 아마도 나도 모르게 수행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더 나은 삶을 원하고, 더 나은 내가 되고자 마음을 내었다면 이미 수행을 시작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견적, 얼핏 '진짜 나'의 흔적을 본 사람은 이미 수행자다.

견적 | 자취를 봄 <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 중에서 p.71


나는 그 수행의 시간을 통해 지금은 마음의 행복을 얻었을까? 아직은 때때로 마음이 괴로운 나날이 있는 것을 보면, 아직은 가야할 길이 멀었는지 모르겠다.


무지가 일어나면, 반응이 일어난다.

반응이 일어나면, 의식이 일어난다.

의식이 일어나면, 마음과 물질이 일어난다.

마음과 물질이 일어나면, 여섯가지 감각기관이 일어난다.

여섯가지 감각기관이 일어나면, 접촉이 일어난다. 접촉이 일어나면 감각이 일어난다.

감각이 일어나면, 되어감의 과정이 일어난다.

되어감의 과정이 시작되면, 태어남이 일어난다.

태어남이 일어나면, 늙음과 죽음이 일어난다.

슬픔, 애통함, 육체적.정신적 고통 그리고 고난과 함께.

이런 식으로 이 모든 과정이 일어난다.

견우 | 소를 봄 <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 중에서, p.88


십우도의 세번째 단계인 '견우| 소를 봄'에 대한 설명을 윌리엄 하트의 위빳사나 명상이라는 책으로 하고 있다. 책 속에서 견우는 수행자가 멀리 있는 소를 발견하는 장면이 뜬 구름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감을 통해 직접 체험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3단계가 처음들어보는 책이고 개념이었어도 친숙하게 느껴졌는데 그건 내가 요즘 매일 요가를 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인 것 같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사무실 근처의 요가원에서 처음 접했다.

그 때의 나는 무슨 생각으로 요가를 시작했을까? 짚어보니 요가복을 입은 채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요가선생님의 유연한 기교과 몸매를 닮고 싶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한동안 시간을 쪼개 다니던 요가원은 주근무하는 사무실이 옮겨지는 바람에 그만뒀다. 그 당시의 요가수업은 몸의 수련은 했으나 마음의 수련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는 아이들을 키우고 동네 문화센터에서 접한 수업이었는데, 오피스 근처의 요가원과는 다르게 문화센터의 요가선생님은 뭔가 수업도 철학적이고 마음을 짚어주는 부분이 있었다. 몸으로 알고 있던 것들이 명상으로 한걸음 나아갔다. 둘째 출산으로 그마저도 접고 운동이라고는 산책과 숨쉬기가 전부였다가 요즘 다시 혼자서 하루에 한번씩 짧은 시간이나마 요가를 하고 있다.

그때마다 어떤 생각들이 비워지다가 채워지다가 하는 나를 마주하고 있는데, 저 문장을 보자 그런 내가 떠올랐다.

내 안에서는 어떤 것들이 얼마만큼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런 질문들이 이 책속의 글을 보자 정리가 되었다.


특별한 바람이나 기대 없이, 초조함 없이, 심지어 '수행을 한다.'거나 '명상을 한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하는 것. 옷이 안개에 젖는 것처럼 알 듯 모를 듯 오직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확실한 변화다. 선은 그렇듯 '함 없는 함'이다. ... 제약들 아래서 자기의 길을 내려는 의지. 그 자체가 이미 수행이자, 선심이다. 매일 하는 일이지만 늘 처음 하듯이, 매일 앉지만 마치 오늘 처음 앉듯이 마음을 앉히는 자세가 초심이다.

스즈키 순류의 선심초심 <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 중에서 p.101


내가 틈날때마다 하고 있는 요가가 이 책에서 말하는 명상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을지라도 책에서 말한대로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도 '작은 나'를 넘어서는 역동적 활동이 되기를 바란다. 매일 하는 일이지만 늘 처음 하듯이. (매일 안하는데 그래서인지 정말로 늘 처음 같은 나의 요가동작들처럼 말이다)


우리는 하나의 장면을 보고도 각각 다른 생각을 한다. 그것은 여러가지 요인에 의해 달리 결정되겠지만 개개인의 의식수준이 그 생각이나 관점을 결정하는 척도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의식에 단계가 있다는 생각은. 독특한 발상이다. 물론 당연히 그런 레벨이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짐작은 해봤지만 그걸 정말 학문적으로 나누어보고 심지어 점수를 매겨놓은 사람도 있구나!


처음엔 이 아이디어 자체가 조금은 껄끄러웠지만, 이런 생각에는 동의가 가는 바가 있었다.


사람은 의식이다. 그리고 의식은 빛이다. 한 사람이 달성한 의식의 고양은 자신뿐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는 힘(power)으로 세상을 감싸 안는다. 나는 누구이고자 하는가? 세상에 빚지는 자, 세상에 부정성을 더하는 자로 살다 갈 것인가, 아니면 긍정의 빛으로 살다가 세상에 사랑의 흔적을 남기고 갈 것인가.

오늘, 지금, 이 순간 나의 자각과 의식적인 선택에 달렸다.

"보다 의식적으로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혁명', <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 중에서,p.101


높은 의식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질 수록 우리가 함께 몸 담고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이 아름다워질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를 위해 각자가 의식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책임있는 자유가 아닌 방임으로, 방만으로 사는 삶은 낮은 의식 속에 머물게 한다. 내가 아이들에게 바라는 점 하나가 바로 하나의 인격체로서 책임감을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점이었다.

그래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쏙 들었다.

"어차피 내려올 건데 왜 오르지?"

힘들게 산에 오르는 사람을 타박하는 이들의 변이다.

'왜 오르는가?'는 '왜 사는가?'와 맞닿아 있는 물음이다. 얼핏 무상해 보이는 오름은 산 그자체를 만나기 위함이요. 산이 주는 예측할 수 없는 선물을 받기 위함이다. 오르면서는 산에 기대어 살아가는 무수한 생명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오를 때마다 달라지는 풍광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낯선 시선을 배우며, 내려올 때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오를 때 보지 못했던 그 꽃을 보기 위함이다. ... 결국 모두 제자리로 돌아오지만, 산을 만나거나 여행을 하고 온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이다.

머리 스타인의 '융의 영혼의 지도' <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 중에서 p.153

십우도의 6단계는 기우귀가로 소를 찾기 위해 떠난 내가 소를 타고 돌아오는 장면이라고 한다.

소를 찾아 돌아올 건데 왜 떠나는가? 하는 질문이 저 글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산을 오르는 것은 산에 오르며 만난 경험들로 새로운 나를 찾아온다는 것이 아닐까? 산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주로 그런 이야기는 어르신들이 많이 해주시곤 했는데..) '등산이 인생과 많이 닮았다.'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나는 어린시절에 부모님과 산을 자주 다닌 편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산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 나이에 즐겁지 않은 산행을 무리하게 한 기억들이 있어서인것 같다. 내려올 건데 뭐하러 올라가라는 말은 내가 산에 가자는 지인들에게 종종하는 말이었다. 요즘은 그 말의 의미를 조금씩 알 것도 같다. 그 길 위에서 무념인채로 걷다가 만나는 나를. 걷고 난 후의 나를 만나기 위해 산에 가곤 한다.

그랬구나. 산에 다녀온 나는 이미 다른 내가 되어 있었던 거였구나.

다른 나는 조금은 의식적인 내가 된 거였겠지.

그랬기를 바란다.

요즘 내가 읽은 책들과는 다르게 읽기에 쉽지는 않은 책이었다.

친절하고자 했으나 친절하지만은 않았다.

술술 읽히는 박장대소하는 책도 아니고, 가볍게 후루룩 읽히는 책도 아니었지만.

꼭꼭 씹어먹고 싶은 까끌한 잡곡밥처럼 영양가 있는 책이었다.

아마도 나는 이 책을 조만간 다시 읽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리뷰를 다시 고쳐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십우도에 맞춰 소개한 책들은 어디선가 지나치면 스윽 손을 뻗어 집어들게 될 것 같다.

그 역시 쉽게 읽히지는 않겠으나 기대감을 갖고 보게 되지 않을까?

내가 나를 만나러 가는데에 이런 방법들이 있다는 것을 최대한 여러 경로로 알려준 작가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느끼며 무거운 책장을 덮었다.




이 글은 판미동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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