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들이 속아온 거짓말
수지 K 퀸 지음, 홍선영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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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표지를 보고는 솔직히.. '엣지가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사람들 눈이 얼마나 높은데.. 표지디자인에 너무 힘을 빼버린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처음 들어보는 영국인 작가의 이야기를 어깨에 힘을 빼고 편안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영국 특유의 블랙코미디가 담긴 진정한 부모 교과서다! ㅋㅋㅋㅋ

자유로운 영혼의 프리랜서 작가가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이 육아에세이를 읽으며 처음에는

영국이라는 나라에서도 육아는 우리와 별다를바 없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전세계 어딜가든 아마도 우리 세대 (80년대생)가 엄마가 되는 모습이 이와 비슷한 모습으로 관통하지 않을까 싶었다. 전세대에 비해 고등교육을 많이 받았고 자신의 꿈과 커리어를 이루고 싶은 마음이 남성들과 다를바 없이 자랐지만, 부모가 되는 과정에서 여성들의 많은 것들이 (때로는 그간 이룬 모든 것을 포기한 채로)

변해버리는 삶의 모습 말이다.

책의 내용은 한결같이 재밌다.

그녀의 필력이 정말 좋다는 증거인 것 같다.

처음에 목차를 읽으면서 "우리가 흔히 듣는 엄마들의 이야기잖아!" 싶었는데, 그 앞의 (거짓말)이라는 단어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거짓말과 함께 읽는 목차는 나를 빵터지게 만들었다.

예를들어 거짓말5 호흡만 잘하면 된다!라거나 거짓말 10 무엇이 필요한지 아이가 알려줄 것이다.와 같은 목차들말이다. ㅎㅎㅎㅎ

나또한 사내커플로 결혼에 골인하고 바로 허니문 베이비로 1호를 임신하게 되어서 직장에 다니면서 임신기간을 보냈는데, 그야말로 육아무식자로 엄마로서의 삶에 진입했다.

일은 그럭저럭 해냈지만 출산은... ㅎㅎㅎ 호흡법 따위로 될 일이 아니었다.

남편과 함께 산부인과에서 운영하는 강좌에서 라마즈 호흡법을 들은게 전부인 나는... 출산 당일 호흡은 커녕 내 배를 눌러대는 간호사들 덕에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수술실로 직행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아이가 무엇이 필요한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녀가 아이를 병원에서 낳은지 몇일 되지도 않은채로 집으로 돌아간 것과는 달리 나는 조리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산후도우미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그 도움이 손길이 끊기자마자 나와 남편은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이 책에는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중간중간 그녀의 남편이 한마디씩 코멘트를 한 걸 같이 적어두었는데, 그 부분이 꼭 내 남편의 속마음 같아서 재미있었다.

(우리집 바깥편은 말이 거의 없다. 결혼 초에는 더더욱 그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말뿐이었다.)

가장 먼저 내 폭풍웃음을 자아낸 건 수면교육법 책을 읽은 의견을 써내려간 부분이었다.

데미: 당신이 하도 권해서 나도 이 책 읽어 봤잖아. 이 책은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어. '이 여잔 제정신이 아니다.'

40주면 늦은 것이다. <엄마들이 속아온 거짓말> p 50

임신과 출산 전의 그녀를 보며 9년 전의 내가 새록새록 기억났다.

나도 주변에 조언을 구할 사람이 그다지 없어서 (직장 상사들이 해주는 조언도 물론 있기는 했지만 우리는 일로만난 사이였기에 그다지 상세하게 엄마의 삶을 이야기 해주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저 그녀들의 퀭한 눈이 엄마로서의 삶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책으로 임신과 출산에 대해 '공부'를 했다.

할 수 있는게 뭐겠는가... 책이라도 봐야지.

책으로 배운 육아의 단점을 그녀도 그대로 복기하는 걸 보고 내 일기를 보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책과 현실의 괴리는 읽으면 읽을 수록 자괴감을 절로 불러 일으킨다.

책보며 육아를 해본 엄마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첫 아이 수유는 출산만큼이나 힘든 일이어서 조리원에서 만난 엄마들은 군대동기만큼 끈끈하다고들 말한다. 나는 그런 조리원 동기들과 1호가 신생아이던 시절 매일 젖소가 된 것 같다며 자조하면서 하루를 보냈었다. 잊고 있던 기억들이 떠오르다가 말다가 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바깥편에게 "여보 내가 이때 어땠는지 기억나?"라고 물어댔다.

초보 엄마의 신생아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마무리 될 즈음 그녀가 건네는 조언이 딱 내 스타일이었다.

그 시절은 정말이지.. 암흑같은 시절이다. 그런 시절을 견디는 방법은 안타깝게도 각자가 찾아야 한다.

초콜릿에 기댄 그녀처럼. 무언가에 기대어 버틸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좋다.

먹고 마시고 사라. 이것이 초보 엄마가 불안하고 슬프고 힘겨운 감정에 대처하는 방법이었다. 나는 핫 초콜릿을 (앞서 말했듯) 무지막지하게 마시고 아기용품을 미친듯이 주문하고 크리스마스 쿠키 한 통을 그 자리에서 모조리 먹어 치웠다.

슬픔의 첫 번재 단계는 부정이라 했던가. 나는 슬퍼하고 있었다. 틀림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울었으니까.

거짓말 11 산후우울증은 며칠 안 간다 <엄마들이 속아온 거짓말> 중에서 p. 110

산후우울증이라는 무거운 단어를 초콜릿 중독이라는 발랄한 에피소드로 풀어낼 수 있다니. 이 작가 정말 천재같다! 갓난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서로 상호작용을 할 수 없는 갓난 아이를 키우며 스트레스가 쌓여간다.

내게 해결할 거리면 주고, 나의 사정이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 아니지. 듣지 못한다. 보지도 못한다.

그 가냘픈 존재를 지키는 대단한 존재가 나라는 게 벅차면서도 버거운데. 뭘 알아야 잘 하기라도 하지. 우리 세대는 대부분 핵가족이라 불리는 부모-자식세대만으로 이루어진 가정에서 자라왔고, 다른 이의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관심도 그다지 없다.

그러니... 갓난아이를 키우는 사정을 우리가 어찌 알겠는가?!

보지 못했으니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어렵기만 한 시기가... 첫 출산 후 1년인 것 같다. 그 어려운 시기를 무언가에 기대어서 지낸다. 나도 초반에는 쇼핑중독 (필요한 게 많았으므로)이었고, 무언가에 빠져 지냈던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아마.. SNS 중독이었던 것 같다. 카톡에 하루종일 눈을 꽂아놓고 있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 책을 예비부부에게 꼭 나라에서 지급해 읽게 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산부인과에서 산모수첩을 주면서 함께 나눠주면 어떨까? ㅎㅎㅎㅎㅎ

아기의 수면교육은 어찌하고, 수유는 어찌하고, 분만호흡법이 어쩌고도 중요하지만...

부모의 삶 그자체에 대해 이만한 엄마&아빠의 삶 교과서는 없을 것 같다.

영국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초보 부모도 딱 똑같다! 게다가 재밌다!

2부. 변하거나 죽거나. 다른 선택지는 없다에서는 아이의 수면과 수유에 대한건 정말 중요하고도 참 어려운 과제를 다룬다. 사실 신생아인 아이에게 먹는 것과 자는 것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아! 싸는게 남는구나!)그녀가 재밌게 써줘서 정말 흡입하듯 읽어내려갔다.

나도 초보엄마이던 시절 우리집 1호가 잘 먹는다며 먹이고 또 먹였고, (아마도 가스가 차서 잠들기 힘들었을) 아이가 예민해서 안잔다며 재우려고 몇시간씩 아기띠에 싸매 새벽 아파트 복도를 서성이곤 했다. 아이가 자라는 과정에 대해 이해하고 있던 2호를 키우는 시절은 그런 면에서는 수월했었다. 2호는 잘 잤고, 또 잘 먹었다.

2부의 이야기들 중에 가슴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

둘다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어리석었다.

이제 분명해졌다. 아이를 낳는 것은 저절로 '삶 속에 끼워맟춰지는' 일이 아니었다. 아이는 삶에 끼워 맞춰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부모의 삶을 산산조각 낸다. 우리가 아이에게 맞춰서 삶을 다시 세워야 한다.

모든 것이 바뀌어야 했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배운 점이라면 이것이리라.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성장을 거부하면, 과거에 매달리면 삶은 고통스러워질 것이다. 머지않아 그 고통은 더욱 옥죄어 올 것이고, 결국 더 이상 버틸 힘이 남지 않아 변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겪어본 사람들은 이 심오한 말들을 몇 번이고 강조하고 싶을 것이다.)

1년만 지나면 육아를 좀 더 즐기게 될 것이다 <엄마들이 속아온 거짓말> 중에서 P.194

진심으로 그렇다. 아이가 생긴 뒤에 누구도 이런 말을 해주지 않는다. 그저 두루뭉술하게 웃으며 축하를 건넨다. 그때 그 웃음 뒤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어봤어야 하는데!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이야기는... 그렇게 참혹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가 삶을 바꿀 (거주지를 바꿀) 결심을 하는데 결정적인 이유가 내가 아이를 위해 큰 결단을 내린 이유가 같아서 더더욱 이 이야기가 와닿았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아이도 어떤 이유로 수술을 해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생겼고 그래서 그녀는 삶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나 또한 직장으로 복직을 준비하던 중에 아이가 아팠고, 일을 하는 엄마로서의 삶을 포기하는 선택을 했다.

가끔 아주 많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 선택에 있어서 후회는 단 한 번도 해본적이 없다.

엄마의 삶을 살면서 그 후로 조금씩 엄마로서의 모습에 맞게 아주 조금씩. 바뀌어 온 것 같다.

오랫동안 내 몸은 레깅스와 데미의 헐렁한 운동복, 군용 재킷 안에 숨겨져 있었다.

나는 마치 두 세계 사이에 낀 사람 같았다. 나는 삶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 혼돈의 세계에서 내적인 위기를 맞은 사람이었다.

더 이상 그런 사람으로 비춰지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 22 튼살은 결국 사라진다. 코코아 버터를 써보라! <엄마들이 속아온 거짓말> 중에서 p.219

작가처럼 극적이지는 않지만. 비슷하긴 하다. 나도 신혼집에서 주환이와 함께 첫 이사를 하면서..

결혼전의 내 물건들을 거의 몽땅 처분했었다.

허리둘레 24인치짜리 바지들과 미니스커드를 비롯한 대부분의 치마들

(뱃살때문에 어차피 못 입을. 첫 출산후 7년이 지났지만 마지막 5kg은 사라지지 않는다.)

형형색색의 화장품들 (아이를 위해 3년간은 썬크림 이상의 것을 발라본 적이 없다.)

44반의 재킷들 (진짜! 내가 그런 사이즈를 입었었다.)

그러고보니.... 1호가 어린 시절 대체 내가 뭘 입고 지낸거지? 기억이 안난다. 희한하게.

그리고 딱! 지금의 내 이야기 같은 이야기도 있어서 공감이 됐다.

길을 걸어가는데 렉시가 언젠가 내 품을 영영 떠나리라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오늘이 아니라 언젠가 말이다. 렉시에게 더 이상 엄마가 필요하지 않을 때가 오겠지. 생각만 해도 너무 슬펐다. 아이가 내 삶에 찾아와준 것만으로도 지극히 고마웠다.

우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학교 정문 앞에서 렉시를 꼭 끌어안았다. 나는 눈물을 꾹 삼켰다.

거짓말 32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기만 하면 예전 삶을 되찾을 것이다, <엄마들이 속아온 거짓말> 중에서 p. 340

2020년에 초등학교를 입학시켜야 했던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 나와 같았을 것이다.

코로나라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만연하던 때에 입학은 미뤄지고 하루하루 피를 말리다가 드디어 등교를 하게 된 그 날. 온 가족이 함께 손을 잡고 학교 정문까지 가서는 마스크를 쓴 선생님의 매서운 감시(?) 하에 아이를 홀로 교문 안으로 들여보내야했다. 아이의 교실을 들여다보는 건 불가능 했고 교문 안으로 들어가는 일도 언제가 될지 요원한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등교를 시키는 게 맞는가에 대해 몇일이고 밤잠을 설쳐가며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결정한 일이었기에. 아이와 헤어지는 그 순간의 감정은 복잡했다.

나 또한 답답한 가슴 안에서 올라오는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마지막 챕터에서 그녀와 나는 100% 정확하게 생각이 일치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나는 예전 삶의 마지막 흔적까지 말끔히 없애 버리기로 결심했다. 감히 쫓아낼 엄두도 못 냈던 그 모든 싸구려 물건들, 학생때 쓰던 것들, 파티용품들을 내다 버릴 생각이었다. 전에는 이것들을 다시 쓸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 나는 아이가 없던 예전 삶의 마지막 흔적들이 거대한 쓰레기 더미에 파묻히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것들을 떠나보내니 안심이 됐다. 해가 뜰 때까지 클럽에 죽치고 있던 때, 오전 11시에 아이없이 즐기던 브런치, 휴가 때마다 떠난 기차 여행과 아시아 배낭여행 등등, 모두 멋진 시간이었지만 그때의 우리는 더 이상 지금의 우리가 아니었다.

그립지 않았다.

지금이 훨씬 더 행복했다.

진실 세상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엄마들이 속아온 거짓말>중에서 p.360

결혼 전에는 몇살로 돌아간다면.. 하는 상상같은 것들을 해보곤 했다.

하지만 내 보물들이 내게 온 후로는 그런 상상은 하지 않는다.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겠냐는 질문에는 단호히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 아이들을 다시 만날 수 없을테니까 말이다.

나도 내가 이렇게 아이들을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못했었다. 그녀또한 나와 같은 생각이겠지.

책의 마무리가 아름다워서 다행이다.

이 책을 통해 모두가 육아의 진실을 마주하고 그 아름다움을 천천히 깨닫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작가가 책의 마지막에 남긴 감사의 말이 독특했다.

영국에 사는 그녀가 한국의 내가 한국어로 남긴 감상평을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토록 진실되고 재밌는 육아에세이를 남겨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조리원동기를 만난듯이 반가웠고 유쾌한 시간이 되었다.

수지. 기회가 된다면 만나서 안아주고 싶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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