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켄 리우 한국판 오리지널 단편집 1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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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중단편 여러권이 묶인 책이었다.

작가의 작품들 중에 한국사람에게 읽힐만한 것들을 솎아서 묶었다고 하는데,

적어도 '나'라는 한국사람의 취향에는 잘 맞았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SF라는 장르는 현재의 상식을 벗어난 세계관, 또는 소재들을 말이 되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힘이 필요한데, 이 정도의 분량으로 그런 몰입감을 주는 작품은 오래간만에 읽어본 것 같다.


이 이야기가 무엇에 대한 이야기일까? 예전에 읽은 SF작품 중에 어떤 여인이 브라질의 깊은 밀림 속에서 여성의 가임기간을 끊임없이 늘리는 물질을 찾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서, 나는 그것부터 떠올렸다.

있을법한 이야기 아닌가? 가임기를 늘린다는 건 젊음을 유지한다는 이야기다. <호>라는 작품은 '영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린 날의 실수로 아이를 임신한 주인공은 아이를 낳아 부모에게 맡기고는 홀연히 떠난다. 그리고 시체로 작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을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다가 '죽음'을 멈추는 임상실험에 참가한다. 영원한 사랑을 꿈꿨지만, 함께 실험대상이 된 남편은 유전자 결함으로 자신의 '생'을 단축시키고 만다. '영생'의 약으로 많은 돈을 벌었고 많은 이들의 삶을 무한대로 바꾸어놓았는데, 그녀는 오히려 불행한 시간을 보낸다. 홀로 아이를 낳고 숨어 산다.

그녀가 낳은 그 아이가 사는 세상은 '죽음'이 희귀한 일이 된다.

'무한의 삶'이 당연한 것이 된 삶에는 애착도 우선순위도 없어보인다.

존엄한 죽음이라는 건 우리가 죽음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을 지우려고 만든 미신이예요.

그녀의 두번째 아이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죽음을 삶에서 잘라내 버린 세대는 이런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이런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이야말로 삶이 만들어 낸 가장 멋진 거예요. 나는 날마다, 매 순간마다 내가 죽을 거라는 사실을 되새기고 두려운 일에 도전해요.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숨이 거칠어지게 하는 일들 말이에요. 그날 당신한테 다가갔던 것도 내가 언젠가는 늙어서 죽을 거라는 사실을 되새겼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에요.

기나긴 시간이 주어지면 우리들은 어떻게 될까? 우리는 점점 더 오랫동안 살아가는 삶을 살고 있다.

불멸을 꿈꾼 옛 제국의 황제처럼 한걸음씩 더 살아가길 바라는 것이 정말 우리들이 원하는 삶일까?

이 책은 아마도, 죽음이 존재하기에 빛나는 우리 삶의 여러가지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랑, 애틋함, 그리움, 간절함 같은 것들 말이다. 시간의 유한함이 안타깝지만 그럼으로 인해 잠들고 깨어나는 아침이 더 빛나는 게 아닐까?

이 글을 다 읽고도 한 참이 지난 이제야 제목의 의미를 찾아보았다.

제목으로 쓰인 <호>란 원둘레 또는 기타 곡선위의 두 점에 의하여 한정된 부분을 의미한다.

끝이 존재하지 않는 원 안의 사람들은 언젠가는 자신의 삶에 점을 찍고 싶어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좋은 책은 좋은 질문과 고민을 많이 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내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네 생각은 어때? 지금 이대로 괜찮아?'라고 말이다.

이 책에는 <호> 이외에도 11개의 작품이 더 있다.

하나하나 독특하고 재미있다. 쓴맛을 남기는 작품들이 많은데 그건 어쩌면 사람들이 생각하고 싶어서 덮어버렸지만 꼭 들여다봐야만 하는 것들을 결국에는 끄집어 내게 하는 작가의 영민함 때문인 것 같다.

<심신오행>에는 우리도 꽤 익숙한 오행에 따른 의술이 나온다. 현대의학의 발전에 의해 많은 것을 누리고는 있지만, 한의학 또한 의지하는 나로서는 꽤 반가운 작품이었다. 먼 미래에 우주비행선을 타고 날아다니다가 잘못 정착하게 되면 우리는 어느 시기즈음으로 퇴보하게 될까? 그리고 그 퇴보한 인류는 자신의 지혜를 어떤 방식으로 발전시켜 나갈까? 그런 상상을 작가는 이 작품으로 이어나간 것 같다. 매우 동양적인 관점으로 말이다. :)

<매듭묶기>에선 입이 비릿했다. 진심으로 감정이 이입되었던 것 같다.

자신의 기술을 노랑머리 톰에게 빼앗긴 채 부족 전체를 빚더미에 앉힌 '소에보'를 보면서 답답하고도 안쓰러웠고, 이 작품에 나오는 구름 위의 마을이 마치 우리나라 같았다. 힘이 없고 기술이 부족했던 민족은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눈을 감은 몇몇 지도자들에 의해 깎이고 깍여나갔다. 그 구름 위의 마을에 펼쳐질 일들은 뻔했다. 빚을 갚기 위해 자신들의 것을 잃어버리고 또 잊혀질 것이다. 부단히 부지런히 일하지만 그 댓가는 엉뚱한 이들의 주머니를 채울 것이다.

<사랑의 알고리즘>은 기술의 발달이 두렵게 느껴지는 서늘함을 선사했고, 그 후에 배치된 <카르타고의 장미>는 끔찍했다. 자신의 뇌를(내 식대로 표현하자면....) 으깨서복사본을 남긴다는 생각은... 작가의 다른 작품에도 이어지는 한가지 주제를 떠오르게 한다.

'물질'이 우선인가? '정신'이 우선인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희안하게도 지난 번에 읽은 조선왕조실록에서 학자들이 설왕설레 해가며 세상의 진리를 논한 성리학의 발전사가 떠올랐다. 그래서.. 성리학의 결말이 무엇이었더라.. ㅎㅎㅎ

<카르타고의 장미>에선 혀끝은 비릿하지만 나름 만족스러운 결말을 보여주었다.

나는 홍옥을 한입 깨문다. 그 황홀한 신맛이 내 몸을 타고 퍼져 나가도록

<카르타고의 장미> 중에서

나는 아직... 육체가 더 중한가보다. 어쩌면 이제 내 몸이 느끼는 감각 하나하나가 소중하다고 느끼는 나이가 된 것 같다.

카르타고의 장미는 - 싱귤레리티 3부작 중 하나의 작품인데, 이 묶음집에서는 다음 이야기로 바로 건너가지 않고 <만조>를 보여준다. <만조>에선 바다가 되어버린 지구. 모든 것이 물에 잠겨가는 그 때에 인류는 이 땅을 버리고 탈출한다. 왜 다들 고쳐쓸 생각은 하지 않고 버리고 떠나버리는 것일까? 도저히 견딜 수 없을만큼의 지점을 지났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바다에 아내를 잃은 주인공의 아버지는 커져버린 달을 향해 날아간다.

그가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나도 주인공도 짐작하는 것 같다. <만조>를 읽으면서 절망감이 차올랐다.

SF를 읽다보면 독특한 전제들 덕분에 언젠가 지금 내가 디디고 서 있는 이 세상이 무너지고 말거라는 불안감을 만드는 작품들이 많은데 <만조>는 그 색채가 어둡고 짙었다. 부모가 된 후로 그런 걱정이 내 안에 겹겹이 쌓였기 떄문에 더 그렇게 느낀 것이리라....

<카르타고의 장미>와 <만조>를 섞어 버무려진 세상이 싱귤레리티 3부작 중 두번째인 <뒤에 남은 사람들>에서 펼쳐졌다. 포화된 땅에서 사람들은 육체를 버린 영생을 선택했다. 남은 사람들은 그들을 '망자'라고 불렀다. 달리 부를 이름이 있을까?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나버린 땅위의 사람들은 <심신오행>에서 등장하는 어느 머나먼 별에 사는 이들처럼 살아간다. 어쩌면 그들보다 더 절망적이다.

개인적으로 <뒤에 남은 사람들>이라는 작품이 전체 작품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다.

가장 많은 고민과 질문을 내게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애버래스팅사가 북극해의 스발바르제도에 거대한 데이터 선테를 짓는 동안, 세계 각국에서는 그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살인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한 소동이 벌어졌다. 업로드된 인간이 한명 생길 때마다 생명을 잃은 육체 한 구가 남기 때문이다. 파괴적 스캔과정을 거친 두뇌가 피투성이 곤죽이 된 채로. 하지만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그 인간에게, 그의 본질에게, 더 잘어울리는 표현이 없어서 굳이 말하자면, 그의 '영혼'에게?

<뒤에 남은 사람들> 중에서

이 작품만 들고 읽었다면, '대체 이게 뭔 일이래?'싶었겠지만, 작가의 작품들이 내 머릿속에서 한켠 한켠 견고한 틀을 쌓아올렸고, 파괴적 스캔을 통한 '영혼' 또는 '본질' 또는 '정신'이 디지털 세계 속에서 마치 <호>에서 처음 등장한 불완전한 '영생'을 드디어 이룩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세상이 온다면 나는 어떤 열차에 올라탈 것인가?

디지털 영생이라니 끝내주는데? 그런데 이미 우리는 영생을 누리는 나를 이 디지털 세상에 마구 흩뿌리며 살고 있지 않은가? 한번 기록되면 삭제하지 않는 한 영원이 남아있는 것들을 말이다. ㅎㅎㅎ

작가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생각을 드러내 보여준다.

로라 누나는 이메일을 읽으며 엉엉 울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그런식으로 말하지 않았으니까. 우리 진짜 엄마는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이토록 엉망진창인 세상에서도 살아가고자 애쓰는 진솔함이었고,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타인엔게 가까워지고자 하는 갈망이었고, 우리 육체가 겪는 고통과 수난이었다. 엄마는 삶에 끝이 있기 때문이 우리가 인간인 거라고 가르쳐 주었다.

<뒤에 남은 사람들> 중에서

작가 고유의 생각이라고 보여지는 이 문장을 보면서 작가를 느낄 수 있었다.

아침에 창을 열면 느껴지는 공기. 그 안에 닮긴 새로이 시작되는 하루에 대한 기대감. 내 손이 느끼는 직접적인 감들. 그 자체가 바로 생이자 삶이라고.

내가 만진 흙과 내가 공들인 세상의 질감들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사람. 하루를 진한 노동으로 채워 살아가는 어떤 사람이 그려졌다.

그리고 이 책을 통틀어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이 등장한다.

오로지 이 세상뿐이다. 우리가 살아갈 운명을 타고난 세상, 우리를 붙들어 놓고 우리에게 존재하라고 요구하는 세상은. 컴퓨터가 만들어낸 환상으로 이루어진 상상의 풍경이 아니라.

<뒤에 남은 사람들> 중에서

나의 개인적인 바램과는 상관없이 <뒤에 남은 사람들> 속 사람들은... <카르타고의 장미>에 등장한 인물들의 다음 세대였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루시가 결국은 '인간이 아닌 상태로는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해'라는 아버지의 절박한 충고를 외면하고 셔틀에 몸을 싣고 말았으니까 말이다. 생명이 살아가는 본래의 방식을 버리고, 쉬지 않고 반복되는, 정신이 아닌 기록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삶을.. 선택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싱귤래리티 3부작의 마지막 편일 것으로 생각되는 이 책의 제목과 같은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 많은 순록 떼가>라는 작품은 기이하다. 앞편의 루시와 같이 고대인으로 불리는 여자의 딸인 '르네'가 등장한다. 고대인이라니..., 나원참. 디지털화된 삶을 선택했지만 3차원의 삶을 고수하는 르네의 엄마. 르네를 데리고 짧지만 긴 여행을 떠난다. 그들에겐 하루지만 남은 이들에겐 몇십년이 지나가버리는 삶.

르네는 그 여행에서 '진짜'세상을 만난다. 3차원의 밋밋한 세상.

막상 '진짜' 마주쳐보니 상상보다 훨씬 멋진 세상을 말이다. 이 작품 속에서 왜 작가가 이 3부작을 그려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사는 진짜 '지금'의 모습은 르네와 엄마가 여행하면서 이야기 하는 '오버엔지니어링' 세상인 것이다.

지금은 아무도 엔지니어링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실제 원자로 지은 건물은 비효율적이고, 비유동적이고, 제한적이고,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비한다. 나는 학교에서 엔지니어링이 암흑시대의 기술이라고 배웠다. 사람들이 아직 깨우치기 전의 기술이라고. 그에 비하면 비트와 큐비트는 훨씬 더 문명적이고 상상력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다.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중에서

이 글을 쓰면서 싱귤래리티의 뜻을 검색해봤다. 싱귤래리티란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의 결합이 가져올 미래를 상징하는 용어로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을 넘어서는 기점`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삶은 설겆이는 식기세척기가 빨래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청소는 로봇청소기가 하고 있다. 우리집은 월패드와 스마트폰이 연결되어 있어서, 어디서나 온도조절이나 조명조절, 방범센서 같은 것들을 조절할 수 있다. 물론 아직도 많은 것들은 몸을 움직여서 직접 해내야 하는 것들이 많지만 수 많은 기계에 둘러싸여 살다보면 내가 기계의 한부분이 된 듯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집의 수 많은 가전제품과 디지털기기들이 내 팔과 다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싱귤래리티라는 아이디어로 인간자체의 디지털화라는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싱귤래리티 3부작을 읽으면서 대학시절 다니던 대학근처에 무슨 과학관이 있었는데, 아인슈타인의 뇌를 직접 볼 수 있는 전시를 한다고 대형현수막이 걸려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왜 한 사람의 뇌를 꺼내서 보관하며 그걸 돌려가며 보고 있을까? 라는 생각에 그 전시에는 가보지 않았었다.

<모든 맛을 한 그릇에- 군신 관우의 아메리카 정착기>라는 작품을 읽으면서는 미국에서 살고 있는 가깝지 않은 친척들을 떠올렸다. 아마 작가 자신도 낯선 땅에 살아가는 사람이어서인지, 이 작품에선 다른 작품과는 다른 편안한 익숙함이 있었다. 금을 캐던 시절은 아니지만, 작가도 어린시절 이민을 가서 낯선 삶을 살아야 했던 장본인일테니까.

내게도 그런 지인이 있다. 결혼적령기에 한국에 여행을 왔던 미국남자(지금의 이모부)을 만나 미국에 가서 살고 있는 이모는 몇 년에 한 번씩 한국에 오곤 했는데, 긴 비행시간을 차치하고서라도 만나는 순간마다 얼굴에 드리워진 묘한 피곤함을 잊을 수가 없다. 낯선 나라. 낯선 땅에 정착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하고 쓸쓸한 일일지... 이 작품을 보며 잠시 이모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엔 별 생각없이 신기하고 즐거운 만남이었지만, 성인이 되어 이모를 만날때마다 '과연 저 사람은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가족을 찾아 떠난 사람'이었고,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모든 맛을 한 그릇에>라는 작품에서 중국남자들은 그들의 축제를 함께 즐기고자 많은 것을 내어준다. 그렇지만 현실의 기록은 참 마음아프게 남아있다. 그들의 결혼을 법으로 금지했고 그들은 그렇게 살다 미국 땅에서 사라져갔다.

책의 머릿말에 저자는 자신은 '도래할 것 같은 미래'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미래예언은 꿈도 꾸지 않는다고... '도래하지 말아야할' 세상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궁금하다.

우리의 내일은, 우리의 진보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바라건데 싱귤래리티 3부작 같은 세상은 제발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작가는 내게 '내가 살아가는 삶의 시간들'에 대해 잠깐의 고찰을 선사해주었다.

내 눈 앞에 있는 것들을 진짜로 실감해가면서 살아가고 싶다고 다짐했다.

좋은 독서였다!


이 글은 황금가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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