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는 법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서 - 3,500km 미국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걷다
이하늘 지음 / 푸른향기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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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자갈과 흙, 그리고 연식이 제각각인 낙엽과 풀이 뒤섞인 길을 걷는 것 같다.

그냥 여행에세이와는 조금 다르다.

글을 쓰는 전문가의 유려한 글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하던 문장들이 눈 앞에서 덜컥 걸릴 때면 '어. 뭐지?'하며 멈칫했다.

지금껏 읽어본 여행에세이들은 좀 더 감성적이었다고 하면, 이 책의 글은 조금은 거칠고 투박하다.

다 읽고나니, 아마도 이 글의 여정이 그러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은 AT(애팔래치안 트레일)를 걷는 동안 저자가

그 길에 대해,

자신과 자신의 동반자에 대해,

그리고 길 위에서 떠오른 여러가지 생각들을 타임라인에 따라 한알 한알 정리해 길 위에 내려놓은 조약돌들 같다.

신혼일기같기도 하고, 걷기일기 같기도 한 이 책은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가는 것 같은 느낌이라서

책을 읽는 동안의 나도 산맥을 따라 산을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게 된다.

산티아고의 순례길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었어도 미국에 PCT니 AT니 하는 하이킹 트레일이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동부와 서부의 산들을 이어 걸을 수 있는 길이 그렇게 유명하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미국 동부에 살고 있는 엉클빌과 내 사촌들이 왜 그렇게 한국에 오면 관광지에 가지 않고 큰이모네 동네 뒷산을 헤메고 다니는 건지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 건 이 책을 읽으며 얻게된 덤이다.)

내가 이 책 속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페이지다.

나는 험준한 산보다는 이렇게 나무들이 나를 안아주는 것처럼 따뜻한 느낌이 드는 산이 좋다.

그러고보니 중간중간 이렇게 눈이 쉴 수 있는 페이지가 있어서 참 좋았다.

트레일매직, 책에서 종종 등장하는 이 트레일매직이라는 게 참 재밌었다.

과일 몇개, 물, 얼음바스켓에 담긴 음료수, 응급약품 같은 것들을 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해 내어놓는 마음이 따스하고 예쁘게 느껴졌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 두다리에만 의존한채 걷는 그 길 위에서 만나는 상냥한 마음을 '트레일 엔젤'이라고 부르는 것도 너무나 예쁘지 아니한가!!

길 위에서 만난 예상하지 못한 친절이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큰 행복이 된다는 걸.... 그녀는 투박한 글 위에서 터져나오는 행복감으로 생생하게 알려줬다.

장거리 트레일을 하면서 '소소한 일상의 행복'에 대해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장거리하이킹을 한다 해서 나의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하지만 내가 이 길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소소한 행복을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하곤 했던 따뜻한 샤워가 이 길 위에서는 아주 소중하다.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TV를 보거나 인테닛을 하는 것이 장거리하이킹에서는 특별한 일이 된다. 한국에서는 밤늦은 시간에도 전화 한 통이면 배달시켜 먹을 수 있는 치킨을 하이킹 내내 떠올리다가 마을에 도착해서 먹었을때의 기분을 생각해보라. .... 이 작은 것들이 이곳에서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큰 행복으로 다가온다.

행복해지는 법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서,<행복해지는 법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서> 62p

나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다.

아들 둘의 엄마에겐 소소하고 아기자기한 모습은 매일의 일상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녀의 산행처럼,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며 텐트에서 발 뻗고 눕는 그녀의 고단함과 비슷하게 양치만 겨우 한채로 아이들 틈에 끼어 잠드는 게 엄마들의 일상이다.

그런 나의 일상에, 큰 아이가 써오는 '엄마. 아깐 미안했어요. 고맙고 사랑해요.'라고 적힌 노란 편지지가 내게는 길 위에서 만난 트레일매직 같은 순간이다. 슬픈 노래를 들으며 그날 하루의 기분때문에 눈물 흘리는 나에게 두 아이가 심각하고 안쓰러운 눈을 하고 다가와서는 눈물을 닦아주고 안아주는 그 순간이 그러하다. 새삼, 내가 가진 행복을 다시 새길 수 있게 해준 그녀의 트레일매직 이야기가 고맙다.

그런 와중에도 행복이라는 건 상대적이다.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걷지만 행복감으로 차오르고 있는 그녀와 세번째 트레일을 완성해가는 그녀의 동행은 그 길에 대한 감흥이 다르니까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길을 걷다보니 배우는 것이 또 생겼다. 행복한 삶이 꼭 100% 만족스러운 환경에서 비롯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조건이 만족감을 주는 삶이라면 바랄 것이 없겠지만, 행복이라는 방향성을 추구하고 있다면 때로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어려움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이 길을 계속 가야할까?, <행복해지는 법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서> 90p

살다보면 누구나 이런 시간을 맞이하는 것 같다. 그것도 예상보다 빈번하게.

좋았으면 하는 날조차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 또한 흘러가는 우리 삶의 시간 중 하나다.

그녀는 길 위에서 정말 좋은 인생의 지혜를 얻은 것 같다. 몇 일 전 우리 부부에겐 좋은 날이 있었다.

나는 팡팡 뛰며 축하하고 싶은 순간이었는데, 남편은 자기가 처한 상황상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그 순간 나는 조금 서운했다. 다음 날 함께 축하하고 싶었지만 칭얼대는 아이들 덕에 완전 망치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 조차도 우리 넷의 추억 한 장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저 웃음이 나오는 날이 된다. 인생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신혼여행 중에 맞이한 결혼기념일, 특별한 이벤트 없이 그저 다시 걷는 그 날의 모습이 참 한결같은 이 두부부의 진짜 모습 같아서 귀여웠다.

그리고 결혼에 대한 그들의 진지한 고민이 마치 몇년은 살아본 부부의 그것 같아서 신기했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것에 지쳐 '결혼 이후의 삶'에 대해 충분한 논의 없이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그의 이런 점이 좋았다. 결혼은 결혼식 단 하루가 아니라, 부부가 되어 살아가는 결혼생활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해피 애니버서리 - 결혼에 대한 작은 생각, <행복해지는 법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서> 112p

내게도 '나만의 특별한 결혼식'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우리 부부만의 의미가 있으면 좋겠고, 흔한 결혼식의 모습과는 달라으면 좋겠고, 그러면서도 축하는 진심으로 받았으면 좋겠고... 그런데 결혼식이라는 이벤트를 준비하다보니 지금의 결혼식 형식이 잡히게 된 데에는 한국사회 특유의 문화와 살아가는 모습이 반영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식엔 특별한 사람만 초대하고 싶지만 딱 잘라 너까지는 친한 사람. 너부터는 좀 덜 친한 사람이라고 하는 법을 우리는 못 배웠다.

그래서 중고교 동창부터 직장동료까지 부르다 보면 신랑신부의 지인만해도 100명을 훌쩍 넘긴다.

결혼은 너와 나의 만남이라기 보다는 여자의 집안과 남자의 집안이 유대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가족주의 덕분에... 숙부, 숙모, 이모, 고모, 사촌에 조카까지 참석을 권하게 되니 양가의 8촌이내 가족만 모여도 그 쪽도 몇 십명은 가볍게 넘긴다.

아마도 예전의 마을잔치의 모습이었을 결혼식은 요즘엔 이래저래 200명에 가까운 사람을 모아놓고 할 수 있는 파티가 됐다. 밤에는 술 먹고 참 잘 노는 한국 사람들이 벌건 대낮에 한다리만 건너면 서로 다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서는 못 논다. 그러니 그저 묵묵히 밥을 먹고 교장 선생님의 훈화말씀같은 주례사를 듣고 앉아 있는게 편한 거다.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아이로 자란 우리 부부는 그 '보통','평범'의 테두리를 벗어나질 못했다.

그래도 그 날을 기억하면 행복하다. 축하해주러 온 사람들의 얼굴이, 남편의 이름을 세번이나 잘못 부른 주례선생님의 당황스러운 눈빛이, 축가를 불러주던 친구들의 목소리가, 눈물을 글썽이던 엄마가, 긴장한 채 나와 버진로드를 입장하던 아빠의 손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요즘엔 다양한 방식의 결혼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늘어나고 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가 건강해지는 길이라고 믿는다.

현실적인 결혼을 한 우리 부부는 살면서 부딪히고 또 부딪히면서 결혼생활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책 속의 두 사람이 매일같이 걸으며 부딪히면서 함께인 삶을 만들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뷰는 산행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인데,

그녀의 글을 따라 산을 오르고 중턱에 올라 함께 풍경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라 그런지. 숨이 차오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길을 걸으며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나보다. 단 둘이 길을 걸어가는 것의 가장 좋은 점이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점 아닐까.

사실 결혼을 하고도 부부가 대화를 나누는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 특히나 우리 부부처럼 허니문 아기가 생긴 경우엔 신혼생활이라고 할만한 시간이 아이를 맞이할 준비와 고민들로 채워지기 때문에 두사람의 이야기보다는 '아이'에 대한 대화를 주로 하게 된다. 그건 그것대로 좋지만, 부부만의 대화도 꼭 필요한 것 같다. 서로를 모른채로 함께 사는 것 만큼 헛헛한 일은 없는 것 같다.


저자는 트레일을 하는 와중에 평창 동계 패럴림픽의 성화봉송주자로 뛰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신혼여행 도중에 생각했을 여행루트를 바꾸면서까지 성화봉송 요청을 수락한걸 보면 그녀가 진정한 경험주의자ㄴ탰라는 걸 알 수 있다. 갈 수록 그녀에게 정이간 건 나와 같은 경험주의자라서였나보다. (나도 '엄마'라는 길을 온전히 전부 직접 경험하고 싶어서 직장을 그만두고 엄마라는 길을 선택했다.ㅎㅎㅎ)

장거리트레일에는 우리가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표지판들이 있다. AT를 걸으면서 한 가지 재미난 것은 길의 표식과 관련된 것이다. PCT나 CDT는 고유의 트레일 마크를 이용해서 해왔던 반면, 이곳은 나무에 별도의 표시를 해두었다. '화이트 블레이즈'라고 불리는 흰색 표시는 공식적인 AT루트, 하늘색은 우회로, 식수, 쉘터 등으로 가는 공식 트레일 외의 사이드트레일을 표현한다. ....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공식트레일을 나타내는 흰색과 사이드 트레일인 하늘색 모두를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인생은 선택의 연속, <행복해지는 법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서> 174p

같은 생각의 결을 발견해서 너무 기뻤다. 너와 내가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고, 다른 길을 갈 수 있음을 서로가 인정하는 것.

함께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결혼'식' 대신 산위에서의 언약식을 결혼'일'로 정한 사람.

신혼여행 대신 세계여행을 떠난 사람.

보통의 신혼부부가 선택하는 방법이 아닌, 조금은 과감하고 색다른 도전을 한 그녀가 낯설지만 낯익었다.

나의 지인들 중에도 '다수'가 선택하는 방법이 아닌 자신들만의 결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서인가보다.

10년의 결혼생활을 그만두고 멋지게 솔로의 삶을 사는 사람.

아이를 가지려다 이뤄지지 않아서 여행을 즐기며 사는 부부.

아이와 함께 주말마다 캠핑을 하러다니는 가족.

몇 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1년간 세계여행을 떠난 부부.

우리 부부처럼 아이를 하나 또는 둘 낳고 기르는 가족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각자 사는 법과 생각하는 가치관이 제각각이다.

그리고 서로가 각자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며 그 다름에 대해 타박하거나 훈계를 하려는 사람도 없다.

이들 부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들을 따뜻하게 인정해주는 사람들도 많아졌으면 좋겠고.

서로 모자라다고 타박하지 말고, '너는 그렇구나.'하고 인정하며 살아가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읽은 이 책은 그냥 여행에세이가 아니라, 행복과 다양성에 대한 외침을 닮은 책인가 보다.


본 포스팅은 푸른향기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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