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 삶과 죽음에 대한 찬가같다.

내가 왜 읽는다고 손을 들었을까 중간중간 후회하기도 했다. 책의 흐름을 막 타기 시작할 무렵. 민족 명절인 추석연휴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ㅠㅠ 이런 책 읽기는 권장하기 힘들다. 앞의 흐름이 통째로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다시 흐름을 타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처음부터 다시 읽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보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읽은 이 책은 읽었다기 보단 읽어낸 책에 가깝다. (나는 이 분류를 꽤 중요하게 생각한다.)
읽어낸 책들은 그냥 너무 어렵거나. 어렵진 않지만 내용을 베베 꼬았거나. 아니면 나의 기저에 깔린 가치관들과 부딪히는 경우다.
이 책의 경우는 일단, 그냥 읽기엔 학구적인 용어나 사례가 너무 많아 어렵고 나의 가치관 중 그 무엇과 시시때때로 부딪혀 싸워댔다. 그래서 한 장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나는 5살에 세례를 받은 카톨릭 신자다. 하지만 내 자유 의지에 의해 종교를 선택하지 않아서 내 종교에 대한 어떤 의심이 있었다. 많은 신자들이 유아세례를 받으면 성인이 되어서 단교를 하곤 한다. 나는 출산과 결혼이라는 사정상 더 이상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는 않지만. 기회가 된다면 미사에 참여하고 싶은 의지가 있는 신자로, 말하자면 휴교중이다. 내 주변에는 나와는 다르지만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별 다른 거리낌없이 종교의 감사함과 혜택을 이야기 나누곤 해왔다. 아마도 이 점이 이 책의 한장 한장과 싸우듯 읽어야 했던 요인일거라고 생각한다.

종교인이 왜 '종교없는 삶'을 선택해 읽었느냐고 묻는다면 몇 년 전에 알랭 드 보통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를 읽으면서 껄끄러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묘한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고 대답하고 싶다.

책은 8개의 장으로 나뉘어 무종교적 삶에 대해 질문하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무종교인들의 삶에 대해 낱낱이 설명하고 때론 설득해 준다.

1. 신을 믿지 않으면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없는 걸까?
2. 종교에서 멀어지면 좋은 사회에서도 멀어질까?
3. 종교없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4. 종교없는 부모들은 아이를 어떨게 키울까?
5. 무신론자를 위한 공동체가 가능할까?
6. 종교없이 삶의 고난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7. 죽음 앞에서 종교는 어떤 의미일까?
8.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어떤 모습일까?

8개의 질문을 보면.
'종교없음'이 결코 '종교있음'보다 어느 부분에선가 부족하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한 책이겠구나라고 짐작하게 한다. 그건 아마도 저자를 비롯한 많은 종교'없는'사람들이 받아온 비판적인 시선들 때문이 아닐까 생각됐다. 이 책은 지극히 미국적인 시선에서 쓰여졌지만 그게 한국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전 세계에서는 날이 갈수록 종교의 영향력이 적어지고 있다. 내가 어린 시절 다니던 성당의 분위기와 가끔 나가서 느껴지는 성당의 묘한 공기의 차이는 단지 내가 어른이 되었기 때문만은 아님을 알고 있다. 성경의 말씀이 이제는 흥미를 잃었고 재미있고 종교만큼이나 유익하다고 여겨지는 일들이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선 곳에서 쉴새없이 벌어진다.
책의 도입부에서 설명하는 것 처럼 종교의 기능을 선진화된 많은 국가의 각종 기관과 제도들이 대신해 수행하게 되었고, 어느 하나의 시각으로 이루어진 종교로 묶기에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너무나 커졌고 커진 여러 나라와 집단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회적 기능들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는 더욱 무 종교인들이 늘어났다.
이것은 종교 유무의 충분 조건은 아니어도 필요조건은 되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재밌는 사실은 비합리적이고 폭력이 만연한 나라가 더 종교적이고 합리적이고 안전하다고 평가되는 나라가 덜종교적이라는 점이었다.
이 부분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인류의 발달과정 가운데 종교라는 과업을 거쳐 성숙한 가치관이 사회를 안정화 시키고 나면 종교는 그 필요를 다하는 것이 아닐까?'

이 질문이 나의 종교에 대한 관점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책 속에 소개 되는 몇몇 부분이 그런 충격을 더욱 더해줬다.
교회에 회에 나가지 않고 믿음도 없이 아이들을 키우면서 감내해야 했던 많은 갈등들에 대해 토냐와 대화를 나눈 후, 무 종교적인 육아 덕분에 경험한 좋은 점들도 물어보았다. ... "그들에게는 제한이 없어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면에서 많은 종교인들이 아주 제한되어 있거든요. ... 종교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방식이기도 해요. 저는 제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길 원해요."


바로 종교가 사람들을 통제하는 방식이라는 이 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스스로 결정하기 전부터 가져온 종교의 힘이 실로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내 선택에 오히려 선택권이 더 많다고 생각해왔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종교가 사람들을 통제하는 방식으로서 사용되었다는 건 바로 납득이 되었는데 내 삶에 있어서 선택을 제한해왔을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할 것 같았다. 이런 시선을 스스로 가질 수 있다는 게 신선했다.

... 개인의 자유와 성향, 지속적인 선택이라는 유산이 바로 그것이다. 종교가 없는 부모가 자녀에세 가장 확실하게 물려주는 것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그들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낸 의식들, 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무전통의 전통 말이다. 이 것을 이단자들의 유산이라 불러도 좋다. '이단(heresy)'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하이레시스(hairesis)'에서 파생되었고, 그 근본적 의미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데 나는 내 아이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카톨릭 신자가 되길. 신자가 되지는 않더라도 카톨릭 교리 속에서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랬다. 그 건 구복신앙때문이 아니라, 아이들이 다른 이를 스스로처럼 여기고 세상을 따듯하게 바라보며 가졌을때 남과 나눌 수 있는 가슴을 갖길 바래서였다. 그런데 그런 마음은 종교가 아니더라도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고 아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해서 아이에게 쥐여 주는 종교가 옳은 것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거기 앉아 있을때 가장 먼저 든 느낌은 당황스러움이었다. '아기의 심장병을 고쳐달라고 신에게 기도를 해? 이게 말이 되나? 신이 정말로 모든 것을 다 아는 존재라면... 그러니 아기의 심장병도 신의 계획이 아닐까? ... 이게 도대체 무슨 신이지?' ... 모두들 죽어가는 아기를 둔 젊은 부부에게 사랑과 연민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나된 행위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도움을 낳고 있었다.
바로 이게 종교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불편했던 건 나는 종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많은 위안과 즐거움 그리고 지지를 얻어왔다는 걸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어서였는데, 저자도 이 부분을 간과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같은 독자가 많을 거라는 걸 알았나? ㅎㅎ
내게는 큰 의미 없이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종교는 내게 의미가 있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모두에게 종교가 필요하다는 건 아니다. 내게는 그렇다는 거다. 저자에겐 '신비로움'과 '경외주의'라고 표현되는 것이 내게는 '신이라는 어떤 힘'으로 존재하는 것 뿐이다. 인간다움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은 서로 기댈 수 있는 공동체에서 발현하는 것 같다. 그것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간에 말이다.

아직은 책 속의 내용들이 일련의 이어짐으로 정리가 되진 않는다. 너무 많은 사례가 머릿속을 휘저어 놓았다.

저자가 말하는 삶을 사는 방식이 많은 종교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부적인 가르침이야 어떻든 간에, 그것이 카톨릭이건 기독교건 불교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라는 법칙은 존재하지 않나?

어쩌면 사람들이 사는 어디에서나 관통하는 '서로를 향한 사랑'의 모습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이 책의 내용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내용은 바로 '지금. 여기'의 자신의 삶을 만끽하며 충실히 살라고 이야기 한다는 점이었다.
그의 말대로 종교적 관점에서의 현생은 내세 또는 죽음 이후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차고 넘친다. 성서엔 서로 사랑하라는 아름다운 이야기 말고도 사후의 벌에 대한 잔혹한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신이라고 표현되는 존재가 죄를 지은 이들을 어떻게 벌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아마도 '공공의 선'이 덜 정립된 사회에는 그런 일종의 '협박'이 악한 행위들을 막는데 효과를 발휘해왔는지도 모른다. 서로가 지켜주는 암묵적 규칙들이 존재하더라도 인간은 자신과 타인을 향해 얼마든 잔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정한 목적과는 별개로 도구가 목적이 되어온 경우들이 많다.
신은 어쩌면 인간이 창조해 낸 가장 기발한 규율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지금 여기 함께 사는 서로를 위함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으로 무종교인이든 종교인이든 지금. 여기의 삶을 충실히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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