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쟝그르니에전집 6
장 그르니에 지음, 함유선 옮김 / 청하 / 1988년 8월
평점 :
절판


1. 보라매도서관. 그때 저는 <아웃사이더>라는 책을 찾고 있었습니다. 콜린 윌슨의 책은 좀 어렵죠. 중학생이었거든요. 문득. 얇고 단순한 표지의 <섬>이라는 책에 제 눈길이 잠시. 아주 잠시. 머물렀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꺼내지도 않고, 단지 검지손가락을 들어 아래위로 한번 쓸어보고는 고개를 갸웃-했었던 것 같습니다. 아주 잠깐. '섬'이란 글자가, 각인된 첫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곧 잊었지만. 그 순간 자체는 어떠한 그림이나 장면처럼, 기억이 나더군요. 가끔, 아주 가끔, 이상하죠?

2. 김한길의 소설에서, 남녀주인공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은 것은,
레스토랑 '섬'이었습니다. 사랑한 남자가 결혼을 한 것인지, 아니면 남자를 사랑했는데 알고보니 결혼한 사람이더라- 였는지.. 불확실한 기억중 확실했던 것은, 그 레스토랑 여주인, 사랑하는 사람이 휴식이 필요할때 찾아와서 머물다 갈 수 있는 '섬'같은 존재로서 자기를 자리매김했었다는 것. 그런 사랑, 그러한 사랑의 법이 있구나..생각했었어요. 단아하고 청초한 이미지로 남아있는 그 레스토랑 주인이 실제 있다면. 한번 봤음 좋겠다,했었지요. '섬' 이란, 사람에게 어떤 존재일까, '섬처럼'이란 직유법과 '섬으로'라는 은유법을 조곤조곤 씹어보면서요.

3. 이생진 시인이 섬을 돌아다니며 성산포를 책제목삼아 시를 쓰셨었지요. 물론 안도현의 시도 있습니다. '섬, 하면 가고 싶지만 섬에 가면 섬을 볼 수가 없다 지워지지가 않으려고 바다를 꽉 붙잡고는 섬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수평선 밖으로 밀어내느라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지 못한다 세상한테 이기지 못하고 너는 섬으로 가고 싶겠지 한며칠, 하면서 짐을 꾸려 떠나고 싶겠지 혼자서 훌쩍, 하면서 섬에 한번 가봐라, 그 곳에 파도소리가 섬을 지우려고 밤새 파랗게 달겨드는 민박집 형광등 불빛 아래 혼자 한 번 섬이 되어 앉아 있어 봐라 삶이란게 뭔가 삶이란게 뭔가 너는 밤새 뜬 눈 밝혀야 하리'
사람들 사이에도 여의도처럼 다리를 놓아서 육지로 편입시키기 어려운, 그 어떠한 섬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또는, 사람들사이에서, 섬이 된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부터, 생명처럼 자라가는 섬의 모습이 차츰 인식되고 '섬'이라는 단어가, 조금 더 뚜렷하게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4. 그리고 다시, 어느날 라디오에 소개된 이야기. 여자는 대학4학년, 친구와 바닷가 여행을 갔다가 카페에서 남자를 처음 보았고, 다 마신 홍찻잔에 입술을 거푸 대면서, 어쩔줄 몰랐다더군요. 그 모습에 아픈줄 오해한 친구가 일어서길 권했고, 아무생각 하지 못한 채, 마침 읽고 있던 책의 한 페이지를 찢어놓고 나왔답니다. 그리고 졸업, 한해가 흘러 다시 그 계절, 그때들었던 그 음악이 들리자, 모든 것이 밀려왔겠지요. 머리를 자르고, 안경을 벗고, 사회인이 된 여자에게, 어느 한 순간 운명의 부딪힘같은 기억이..그렇게 다시 찾은 그 카페에서, 다시 보았답니다. 그 남자. 여전히 말걸지 못하던 여자가 눈물을 흘릴 때, 손수건과 함께 내밀어진 쪽지는 그때 그 책의 찢어진 한 쪽. 군대가기 전, 친구의 고모가 하시는 카페 일을 잠시 도왔었는데.. 해를 넘겨 나온 첫 휴가에, 혹시- 하는 마음으로 왔다가,그렇게 만났다더군요. 두 사람이, 그 다음 이야기는 모릅니다. 이야기보다는 등장했던 책이, 더 중요하거든요. 남의 얘기를 무지 자세하게 기억하는 것 같아 스스로도 놀랍지만, 그 속에 나온 책의 제목이 '섬'이었어요.

5. 장 그르니에. 지나갈 듯한 순간들이 모여서 '섬'에게 저를 인도했습니다. 몇 년전 이었는지 기억도 나지않지만, 카뮈의 서문과 그 몽환적인 분위기에 가슴 설레면서 읽던 책입니다. 오늘, 바하의 토카타와 푸가를 들으며, 촛불을 켜고 있자니, 촛불과 잘 어울릴 것 같은 책으로 이 책이 떠오릅디다. 마음이 안개낀 섬을 그리워하는 듯해서 꺼내보니, 무지개색연필로 줄을 잔뜩 그어놓아서 어느 문구가 가슴에 맺혔는지 흐려져버린 그 책의 맨 뒷장에 고독하다-고 써놓았군요. 비 냄새처럼 때때로 돌아보게 되는 책, 장그르니에의 <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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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라이프
소니픽쳐스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한국에서는 어떤 제목으로 개봉을 했었는지 모르겠다. 암튼. SULTZER도서관에서 눈에 뜨이기에 빌려왔는데, 너무 잘 봤다.

월요일 - 첫장면이다. 옛날 학교 같은 건물에서 직원같아보이는 이들이 출근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사무실에 들어서서 함께 청소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서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존대말하고, 하 구분없이 걸레질이며 비질을 하는 모습이 좋아보였다. 장면 바뀌어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웬걸, 나이들어보이는 사람들이다. 출입구에서 이름에 따라 전표 같은 것을 받아 오는데, 무슨 결혼식이나 행사장에 왔나- 싶었다. 순번에 따라 작은 방에 들어가, 상담원 같아 보이는 직원 두어명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고 나서야 그들이 죽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수요일 해질때까지, 자기 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정하라는 요청을 받게 된 死者들의 심경과 추억 더듬을 참 담담하고 이쁘게 표현했다.

수동식 오래된 전화기, 컴퓨터나 심지어 타이프라이터도 아니고 수기로 적어나가는 개개인의 이야기들이, 낡은 배경과 어울려서, 이다지도 기발한 사후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친근하고 정감있게 만들었다.

화요일, 수요일 - 누군가는 아주 어린 아기 시절의 기억을 골랐다. 누구는 중학교 시절, 운전사 뒷편에 서서 버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인상깊었었다. 곱디 곱게 늙은 할머니는 천진한 웃음으로, 유치원 다닐 무렵 오빠가 사준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던 순간을 꼽았다. 디즈니랜드에서 자살을 한 십대 소녀도, 그저 말없이 꽃잎과 솔방울을 줍던 할머니도, 바람기를 주체 못하던 아줌마도, 일하던 클럽에 오는 손님중, 가방에 방울을 매단 아가씨를 짝사랑하던 젊은이도, 자신의 삶 가운데 어느 장면에 최고점을 매겨 넣었다.

목요일, 금요일 -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고르지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지 않겠다-는 철없어 보이지만 나름의 자아가 뚜렷한 젊은이만 빼고, 심지어 무사평온하게 인생을 살아와서 고민하다가 결국 칠십여생이 녹화된 비디오를 돌아보던 할아버지도, 결혼 후 삼사십년만에 아내와 처음 영화를 보고 벤치에 앉아 정담을 나누던 모습을 찾아내었다. 그 모든 선택된 장면들이 세트로 꾸며지고, 영화로 찍혔다.

그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정하지 못하여 다음단게로 이동하지 못한 것이라는 사실과, 이쁘장하게 생긴 상담원 청년은 1차대전?전쟁에서 죽었기에 무사평온 할아버지와 동년배라는 것도, 그리고 할아버지의 아내가 실은 그의 약혼녀였다는 것도 밝혀진다.

토요일 -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영화를 보고, 관람실에 불이 들어오면, 그 영화의 주인공이 사라진 빈자리가 보인다. 그 가장 행복한 순간에 편집되어 존재하는 것이 어쩌면 천국인지 모르겠다. 순간을 포착하고 영원히 고정되는 사진처럼.

상담원 청년을 좋아하던 다른 상담원 아가씨가, 그 약혼녀의 필름을 찾도록 도와준다. 아마도 출병전, 해군제복을 입은 청년과 그 약혼녀가 벤치에 아무말 없이 앉아있던 때가 그 약혼녀가 정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음을 알게되고, 청년은, 그 약혼녀의 남편, 할아버지의 세트장에 아직 남아있는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그곳 스태프들의 이해를 구하여 예외적으로, 살아생전이 아니라, 그렇게 그곳 벤치에서 생각에 잠긴 모습을 필름으로 찍고 사라진다.

월요일 - 결국 아무 순간을 정하지 않았던 젊은이가 추가된 스태프들이 새로운 한주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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