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 - 박화성과 박서련의 소설, 잇다 6
박화성.박서련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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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속에서 과연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정세'는 어떠했는가를 계속 되새기고 되물으며 책을 읽었습니다. 먼저 박화성 작가의 글은 그 정세를 어렴풋이 알고 있기에 슬프고도 놀라웠고 박서련 작가의 글은 내가 지금의 정세 속에 살고 있기에 씁쓸하고도 유쾌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다시 말하자면 박화성 작가가 글을 쓰며 살아가던 시기는 일제강점기였고 여성과 노동자와 조선인과 소시민들에게 특히나 부조리한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의 정세 속에서, 작가가 '여류 작가'라는 멸칭을 들으면서도 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써낸 글은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도 촌스럽거나 낡은 구석이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합니다. 하나는 시대를 보는 작가의 의식이 굉장히 혁명적이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작가가 쓴 소설들이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간직한 서사라는 것입니다.


식민지로서의 비참함을 간직한 조선인들의 처지에 더해 제각기 여성, 노동자, 소작인이라는 이유로 이중으로 억압 받는 인물들이 저마다의 가슴 속에 혁명의 씨앗을 틔우며 이야기를 맺을 때, 그 씨앗을 넘겨 받은 후대의 마음으로 이야기를 소화하게 됩니다. 그래서 작가의 빛나는 재능을 흠모하게 되면서도, 아직도 이 이야기가 보편성을 담보한다는 사실이-그때의 정세에 합당하지 못했던 일들이 지금도 여전히 합당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슬펐습니다.


박서련 작가는 현대의 여성 작가로서, 박화성 작가가 던져놓은 부조리에 대한 질문들을 넘겨 받습니다. 저 역시도 학생회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학생회를 함께 했던 친구들끼리 총여학생회가 있어야 한다고 우스개소리로, 때로는 진지하게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어서 이 이야기들이 유독 재미있게 다가왔습니다. 보무당당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우리는 정세에 합당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 두 여성의 존재가 유쾌했습니다.


누군가의 존재나, 어떤 이들의 관계가 합당하다거나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은 어쩌면 시대가 개인에게 찍는 낙인과도 같습니다. 낙인의 내용이 다소 바뀌었더라도 그것은 100년쯤 지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 합당하지 못한 것은 이 낡아빠진 불합리일 것입니다. 불합리를 합당하다 말할 수 있을 만큼 불합리하지 않은 정세를 기대합니다.


스토리와 더불어 스토리를 뒷받침하는 맛깔나고 아름다운 문장들 속에서 세월을 넘어 함께 호흡하는 두 작가의 글들을 읽을 수 있어 즐거웠고, 두 작가 뿐만 아니라 독자인 저 자신도 그들과, 또 그들이 만들어낸 인물들과 이어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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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복지 - 공장식 축산을 넘어, 한국식 동물복지 농장의 모든 것
윤진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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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윤진현 교수의 연구 인생이 시작된 계기부터 거쳐 온 과정, 그리고 현주소를 보여주는 에세이이다. 동시에 그의 연구 분야인 동물복지, 특히 양돈 농장의 돼지들에 대한 복지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대중교양서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핀란드 등 해외의 선진 양돈 농장을 경험하고 그곳에서 연구하면서 얻은 데이터를 통해 기존의 관행 농장이 가진 문제점을 설명하고, 우리나라 축산 농가의 실정에 맞게 자신의 연구 성과와 배운 지식들을 적용할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우리나라에도 동물복지형 농장들이 생겨나고 있으며, 이 농장들을 직접 소개하며 농장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또한 알리고 있다.

관행 농장은 몸집이 큰 돼지들을 스툴이라는 철 울타리에 가두어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분뇨를 흘러가게 만들기 위한 슬릿 구조(바닥이 뚫려있는 구조)로 되어 있어 어미 돼지가 출산 전 본능적으로 행하는 둥지 짓기를 막는다. 또한 어미 돼지와 새끼 돼지들을 분리시키는 '이유' 과정을 빠르게 진행하는 등 결과적으로 돼지들의 스트레스 지수를 높일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악영향을 주어 생산성을 낮추는 방향으로 농가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돼지들은 생후 3일이 채 되지 않아서 진통제 없이 거세를 진행하고, 꼬리 물기 행동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마찬가지로 새끼 돼지 때부터 꼬리를 자르는 등 끔찍한 고통 속에서 성장한다.

한편 이러한 방식으로 출하된 돼지들은 동물복지형 농장의 돼지들에 비해 활동량이 적고 건강하지 못해서, 전염병 등에 취약하다. 그리고 이를 항생제 등 약물을 통해 해결하려는 관행은 소비자들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

돼지, 닭, 소 등 축산 농장의 가축들은 인간과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유전체가 일치한다. 또한 신진대사 구조나 미생물군집의 분포도 매우 유사하므로 박테리아, 바이러스, 기생충 등 질병을 일으키는 많은 병원체가 서로 간에 공유되고 있다. 따라서 가축들이 무분별한 항생제 사용에 노출되면 항생체 내성균, 즉 슈퍼 박테리아가 출현하게 되는데, 이 슈퍼 박테리아는 인간에게도 발달, 전이, 확산될 수 있다. 항생제 내성 전염병은 코로나19 이후 다음 팬데믹을 불러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후보로 손꼽히고 있다.

이처럼 지금의 농장 구조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중심적인 관점에서 관행 농장에 대한 우려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으므로, 동물 복지의 개념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복지는 '조율'과 '향상'이라는 두 가지 층위로 나뉜다.

복지 조율이란 동물이 경험하는 불쾌한 감정이나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동물복지를 조율한다는 것은 이미 동물에게 복지 문제가 존재함을 전제로 한다. (중략) 복지 조율은 복지 문제를 야기하는 요인들을 발견하고 그 상황을 개선하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이 경험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최소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복지 조율은 부정적인 요소들을 완화하는 데 그칠 뿐, 긍정적인 요인을 향상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

150-151p.

복지 조율은 본문의 설명처럼 이미 있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는 사후적 조치로, 다소 한계가 있다.

복지 향상은 복지 조율에서 다루지 못한 긍정적인 경험을 통해 동물의 복지 수준을 향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스트레스의 부재가 아닌 실질적으로 좋은 복지 상태를 의미할 수 있는 긍정적인 감정을 동물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153p.

여기서 긍정적인 감정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복지 향상 개념이 함께 도입되어야 한다. 최적의 환경에서도 동물들은 여러 이유로 부정적인 감정을 겪을 수 있고, 적절한 보상이 언제나 긍정적인 감정을 생성하지도 않기 때문에 농장동물의 좋은 삶,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 저자는 관리자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한다. 복지 조율과 향상 양자 사이의 균형을 맞추어 농장동물의 좋은 삶을 보장하기 위해 관리자는 동물의 자연적인 습성을 이해하고 야생에 비해 인위적이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최대한 동물이 겪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고 긍정적인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첵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도형을 이용해서 웃는 돼지를 형상화한 표지 디자인과, 장이 바뀔 때마다 각 장을 설명하기 위해 삽입된 내지마다 웃고 있는 것처럼 형상화된 돼지 꼬리이다. 그리고 동물복지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던 저자의 학부생 시절, 저자가 처음 양돈 농장으로 실습 나갔을 때의 풍경을 묘사한 초반부가 잊혀지지 않는다. 인기척에 겁을 먹고 한쪽 벽으로 우르르 도망치고, 큰 소리로 울부짖는 돼지들의 모습과 지독하게 풍겨오는 악취 등이 말이다. 돼지들이 인기척을 느끼고도 겁을 먹지 않고, 온전한 꼬리를 가지고 웃으며 생활할 수 있는 동물복지형 농장이 자리잡기를 염원하고, 그를 위해 소비자로서 비인간 존재들의 좋은 삶에 대한 고민과 인식을 놓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이를 실현하기 위해 따르는 과제들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겼다면, 미처 다 소개하지 못한 이 책의 안내를 참고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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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 문보영 아이오와 일기
문보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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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친 자리에서 순식간에 거의 다 읽어버렸다. 특유의 유머와 엉뚱한 상상력으로 반짝거리는 문장들이 여전히 매력적이다. 바쁜 와중에 짬을 내어 읽는데도 삽시간에 훅훅 줄어드는 페이지가 아쉬워서 몇 페이지를 남기고 책갈피를 끼워두었다. 책이 나의 들판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책의 결말은 초록이 가득한 진짜 들판에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갈피를 끼워놓은 상태 그대로 책을 들고 파주 출판단지로 향했다. 나의 삶의 반대편에 자리하는 도시. 시인에게 아이오와가 있다면 나에게는 파주가 있었다. 들판-삶의 반대편-에서 세 계절은커녕 세 시간도 머무르지 못했지만, 두 개의 들판과 들판이 선물해준 '삶을 망각하는 감각'은 마음 한 구석에 소중히 자리잡았다.


낡은 아이오와 하우스 호텔 주변에는 강변을 따라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낮에는 들판과 반대 방향으로 걸었지만, 밤이 되면 들판으로 들어갔다. 너무 고요해서 그곳에서라면 삶을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이오와는 뭔가를 잊을 수 있도록 돕고, 그것을 다시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공간이라던 동료 작가의 말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그 말은 어쩌면 들판의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난 끝없이 들판을 걸어보고 싶다. 반대 방향으로 걸었을 때 우연히 진짜 삶을 발견하게 되어 지금까지의 삶을,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전혀 다르게 바라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한국과 정반대에 있는 어느 시골 마을에서 자유를 발견한 것과 같이. 그것은 들판이 내게 준 것이었다.

프롤로그 중에서.


삶을 망각하거나 도망침으로써 진짜 삶을 발견하는 일은 평화롭게 실존을 발견하는 방법이다. 죽음 같은 한계상황으로 나를 내몰지 않더라도 진짜 내 삶을 발견할 수 있는 축복을 내려주다니, 영험한 들판이다.

나는 한국의 살 수 없음과 아이오와의 살 수 없음 모두를 겪어보고 싶었다. 그래야 두 가지의 살 수 없음 중 어느 편에 설지 알 수 있을 테니까.

33p.


'자신이 사는 곳을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요?'

60p.


나도 종종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요즘에는 종종보다 조금 더 자주, 그 전보다 더 멀리 떠나는 상상을 한다. 도피처는 파주였다가 제주도였다가 독일이었다가 아득히 먼 우주가 되기도 하는데, 잊고 싶다는 마음이 잊혀지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뀔 때 더더욱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고립되기를 꿈꾼다. 하지만 시인과 다르게 나는 내가 사는 곳을 사랑한다. 그런데 점점 사랑할 이유가 떠나거나 사라진다. 내가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 그리고 시인이나 작가들이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할 때, 괜히 그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이 책 속에서 문보영 시인이 떠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낼 때마다 조금씩 외로워졌다. 그가 떠나간 한국은 지금보다 더 쓸쓸하고 슬플 것 같다. 나도 슬픔을 못 이기고 언젠가 나만의 진짜 들판을 찾아 떠나게 될까?

이 각박한 도시가 들판이 될 수는 없을까? 들판은 이 삶의 반대편으로 가야만 존재하는 걸까? 고립되는 동시에 함께하고, 잊고 잊혀지는 동시에 기억하고 기억될 수는 없을까? 그런 물음들이 남는다. 들판은 위로와 외로움을 동시에 가져다 주는구나. 떠나기를 결심하지 못하고 삶을 영위할 당분간의 나에게 이 책은 작은 들판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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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점심
장은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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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표지를 처음 보았을 때, "봄이 왔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진짜 불행한 사람"이라는 띠지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매도당하는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기에, 약간의 편견을 담보처럼 달아놓고 이야기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 읽기 시작했을 때의 인상을 말하자면 이렇다. '문장은 퍽 친숙하게 다가오지만 썩 친숙하지 않은 유형의 인물들 뿐이다.' 심지를 뒤흔드는 문장에 마음을 빼앗겼다가도(이주란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그의 문장에서 느꼈던 정서와 비슷한 것을 느꼈다) 애정이 가지 않는 인물들에 조금 거리를 두면서 읽기를 반복했다. 20대의 비혼주의 여성으로서, 또 개인적인 가치관으로는 공감되지 않는 층위의 이야기들이 다소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이고 특수한 이유를 뒤로 물려놓고 보자면, 그 특수함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 보편이나 공통의 가치들이 책 속에 녹아 있다. 책은 가장 자연스럽고 가벼운 것들을 매개로 삼아 상실이나 결핍을 통과하는 이야기다. 「가벼운 점심」에서는 '나'와 아버지가 영영 헤어지기 전 KFC에서 함께 먹은 햄버거가 그것이다. 「피아노, 피아노」에서는 버려진 피아노고, 「하품」, 「고전적인 시간」, 「나의 루마니아어 수업」, 그리고 「파수꾼」에서는 아마도 고양이일 것이다. 고양이가 왜 이렇게 많이 나올까, 작가님이 혹시 고양이를 키우시나? 그런 의문이 자연스레 들 만큼 거의 예외 없이 등장한다. 생각을 해 보니 몇 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우선 고양이는 생성과 소멸을 매개하는 동물이다. '고양이에게는 아홉 번의 생이 주어진다', '고양이에게는 생과 사를 보는 눈이 있다.' 오컬트 장르 소설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설정이다. 상실감을 간직한 소설 속 인물들은 고양이의 눈동자 속에서 여지없이 떠나간 영혼을 발견하는 것도 같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가볍고 자연스러운 생물이다. 앞서 말했듯 이 소설은 가벼움과 자연스러움을 매개로 상실과 결핍을 통과하는 이야기니까. 어디서든 그것을 발견하고 애정을 나누어 줄 수 있지만 개보다 진득한 유대 관계를 형성할 필요는 없다. 방임하거나 유기해도 되는 생물이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진득한 유대를 원치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 시절을 머물다가 떠나가는 네 계절처럼 그 동물은 잔상만을 남기고 예고 없이 훌훌 떠나간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예고 없이 다시 온다.

어떤 외로움이나 고통이나 상실감도 계절과 존재를 느끼며 흩어지거나 흘러간다. 그리 끝난다면 좋겠지만 계절이 순환하고 떠났던 고양이가 돌아오듯 근원적인 해소는 불가능하다. 소설은 그래서 애써 해소하거나 쉽게 대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보여주는 것이다. 새로운 계절과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것을. 한 계절이 다른 계절을 대체하지 못해도 계속 갈음되는 것처럼 존재도 관념도 다른 것으로 갈음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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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도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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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은 낡은 여관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아니, 시작은 그 전부터 했고, '현재 '원도'가 발 디디고 있는 공간은 낡은 여관이며, 그가 사는 계절은 겨울이다.' 이 정도의 표현이 적당할 것 같다. 주인공 '원도'는 "검은 봉지에 담겨 으슥한 곳에 버려진 불법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낡은 여관에 웅크려 붉은 피를 토하며 생과 사에 대하여 생각한다.


왜 사는가.

이것은 원도의 질문이 아니다.

왜 죽지 않았는가.

이것이다.

최진영, <원도> 15p.


배고프다고 울고, 밥을 차려주어도 울고, 꿈속에서도 울며 엄마를 울리던 아이. 그 아이, 원도는 이제 먹을거리를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어른이 되었다. 밥을 차려 먹고 설거지하고 '밥은 먹었니?' 물으며 타인의 끼니까지 신경 쓰는 어른.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는 어른. 사는 이유를 따져 묻기에는 멀리 온 인생이다. 그리하여 원도는, 삶보다는 죽음 쪽으로 현저하게 기울어 있는 본인을 들여다보며 '나는 왜 죽지 않았는지' 물을 수밖에 없는 거다.

왜 죽지 않았느냐는 자문은 자연스레 인생이 무엇을 계기로 뒤틀려버렸는지를 묻는 질문으로 바뀐다. 원도와 물을 나눠 마시고 '만족스럽다'는 말로 죽음을 맞이한 죽은 아버지. 죽은 아버지는 원도에게 죽음의 공포를 각인시킨 존재다. 매일 울고, 부모 없는 아이들을 돌보고 노인들을 씻기느라 바쁘던 어머니는 원도에게 결핍을 알려주었고, 산 아버지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제한된 선택을 강요했다. 스스로 선택하라고 종용하며 원도에게 선택지를 내밀었다. 원도와 모든 면에서 비슷했던, 어머니가 돌보던 아이 중 한 명이었던 장민석은 원도가 가진 열등감의 근원이었다. 장민석이 원도가 원했던 어머니의 사랑이라든가 관심이라든가 어른스러운 태도 따위를 모두 앗아갔기 때문이다. 이윽고 사랑도 실패했다.

결핍과 실패와 열등감을 가졌던 아이는 어른이 되어 회사 돈을 빼돌리고, 그 돈으로 투기를 하고, 여러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리고는 몰락하여 지금 여기에 있다. 지금의 원도는 선택당한 일과 선택한 일들로 뒤섞여 만들어진 결과물로, 죽음의 앞에 와 있다. 그리고 자신의 구멍을, 구멍을 메울 수 있는 조각들을 찾는다. 지나온 과거들은 원도 삶의 근원적 욕망인가 구멍인가 어둠인가 사랑인가. 치열하게 자신을 까발리는 그의 모습은 비루하다. 사랑스럽지 못하다.

그럼에도 그는 징그러울만치 삶을 갈구한다. 자신의 어둑한 구멍을 관찰하고 자조하다가 역설적으로 그 구멍들이 모조리 생에 대한 열망으로 화한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독자도 알고 심지어 원도 본인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치열하게 자기를 곱씹고 회상하가다 결국 삶을 택한다.


일어나려면 일단 앉아야 한다. 걷기 위해선 먼저 멈춰야 한다. 함께하길 원한다면 우선 혼자여야 한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기억해야 한다.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기억하고 선택해야 한다. 미룰 수 없다.

거부할 수 없다. 주저앉았던 원도가 일어난다. 걷는다. 아직 어둡다. 눈이 내린다.

해가 뜨더라도 충분히 밝지만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추울 테고, 몹시 배고플 것이다.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다. 원도가 걷는다. 망설이며 걷는다. 걸으며 묻는다.

왜 사는가.

이것은 원도의 질문이 아니다.

왜 죽지 않았는가.

이것 역시 아니다.

그것을 묻는 당신은 누구인가.

이것이다.

최진영, <원도> 240p.


비루한 삶을 사는 한 인간이 그 비루함 속으로 다른 이들을 끌어들일 때, 소설 속 문장처럼 생각하곤 했다. "이런 인물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은가?" 그러나 가치 없는 삶처럼 느껴지는 그 삶을 옹호할수도 부정할수도 없게 된 것은 어느덧 그가 나로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이해하기 싫어 거부감을 느꼈던 것은 이해가 사랑이라 믿었기 때문이나, 이해라는 건 실은 욕망하는 것이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저 살기를 욕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살기를 욕망하는 인물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확신하는 순간 왜 사느냐, 왜 죽지 않느냐 묻던 나에게 원도의 눈동자가 닿는다. 그리고 묻는다. "그것을 묻는 당신은 누구인가." 그는 비로소 선택당하지 않는 선택을 한다. 걷는다.

그때 깨달았다. 이 소설을 읽는 행위와 글을 쓰는 행위, 원도를 욕하는 행위, 원도를 나와 동일시하는 행위, 행위와 동시에 하는 생각들이 모두 삶의 지속을 증명하는 것들이라고. 구멍은, 결핍은 10할의 어둠에 비로소 뚫린 빛의 통로이거나 손아귀에 움켜쥘 수 있는 단 하나의 조각일수도 있다고.

원도로부터, 고독한 나날들에 그보다 지독한 고독을 스스로 덮어씀으로써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함께이길 원하기에 외로움을 선택한다. 기꺼이 혼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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