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 문보영 아이오와 일기
문보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펼친 자리에서 순식간에 거의 다 읽어버렸다. 특유의 유머와 엉뚱한 상상력으로 반짝거리는 문장들이 여전히 매력적이다. 바쁜 와중에 짬을 내어 읽는데도 삽시간에 훅훅 줄어드는 페이지가 아쉬워서 몇 페이지를 남기고 책갈피를 끼워두었다. 책이 나의 들판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책의 결말은 초록이 가득한 진짜 들판에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갈피를 끼워놓은 상태 그대로 책을 들고 파주 출판단지로 향했다. 나의 삶의 반대편에 자리하는 도시. 시인에게 아이오와가 있다면 나에게는 파주가 있었다. 들판-삶의 반대편-에서 세 계절은커녕 세 시간도 머무르지 못했지만, 두 개의 들판과 들판이 선물해준 '삶을 망각하는 감각'은 마음 한 구석에 소중히 자리잡았다.


낡은 아이오와 하우스 호텔 주변에는 강변을 따라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낮에는 들판과 반대 방향으로 걸었지만, 밤이 되면 들판으로 들어갔다. 너무 고요해서 그곳에서라면 삶을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이오와는 뭔가를 잊을 수 있도록 돕고, 그것을 다시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공간이라던 동료 작가의 말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그 말은 어쩌면 들판의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난 끝없이 들판을 걸어보고 싶다. 반대 방향으로 걸었을 때 우연히 진짜 삶을 발견하게 되어 지금까지의 삶을,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전혀 다르게 바라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한국과 정반대에 있는 어느 시골 마을에서 자유를 발견한 것과 같이. 그것은 들판이 내게 준 것이었다.

프롤로그 중에서.


삶을 망각하거나 도망침으로써 진짜 삶을 발견하는 일은 평화롭게 실존을 발견하는 방법이다. 죽음 같은 한계상황으로 나를 내몰지 않더라도 진짜 내 삶을 발견할 수 있는 축복을 내려주다니, 영험한 들판이다.

나는 한국의 살 수 없음과 아이오와의 살 수 없음 모두를 겪어보고 싶었다. 그래야 두 가지의 살 수 없음 중 어느 편에 설지 알 수 있을 테니까.

33p.


'자신이 사는 곳을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요?'

60p.


나도 종종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요즘에는 종종보다 조금 더 자주, 그 전보다 더 멀리 떠나는 상상을 한다. 도피처는 파주였다가 제주도였다가 독일이었다가 아득히 먼 우주가 되기도 하는데, 잊고 싶다는 마음이 잊혀지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뀔 때 더더욱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고립되기를 꿈꾼다. 하지만 시인과 다르게 나는 내가 사는 곳을 사랑한다. 그런데 점점 사랑할 이유가 떠나거나 사라진다. 내가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 그리고 시인이나 작가들이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할 때, 괜히 그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이 책 속에서 문보영 시인이 떠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낼 때마다 조금씩 외로워졌다. 그가 떠나간 한국은 지금보다 더 쓸쓸하고 슬플 것 같다. 나도 슬픔을 못 이기고 언젠가 나만의 진짜 들판을 찾아 떠나게 될까?

이 각박한 도시가 들판이 될 수는 없을까? 들판은 이 삶의 반대편으로 가야만 존재하는 걸까? 고립되는 동시에 함께하고, 잊고 잊혀지는 동시에 기억하고 기억될 수는 없을까? 그런 물음들이 남는다. 들판은 위로와 외로움을 동시에 가져다 주는구나. 떠나기를 결심하지 못하고 삶을 영위할 당분간의 나에게 이 책은 작은 들판이 되어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