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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경고 - 현대인들의 부영양화된 삶을 꼬집어주는 책
엘리자베스 파렐리 지음, 박여진 옮김 / 베이직북스 / 2012년 11월
평점 :
원하는 것을 항상 얻을 수는 없다. 하지만 노력한다면 알게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필요한 것은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여름 휴가 때면 휴양림을 가는 것을 좋아한다. 조용한 산속에 지어진 자그만한 목조건물 안에 들어가 창밖을 바라보며 이따금씩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을 때면, 굳이 많은 돈이 없어도 자연 속에서 조금씩 먹고 조금씩 쓰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곤 했다. 현실에서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불필요한 것들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아둥바둥 하지만, 내 진정한 내면에는 소박함이 늘 존재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이 책을 보고 느꼇다. 내가 생각했던 내면은 소박함이 아니라 사실은 그 반대였다. 내가 꿈꾸는 자연적인 삶은 저자의 말을 빌리면 ‘극도로 인공적이고, 심하게 변형된’ 삶이었다. 나는 자연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귀찮은 것을 제거한 자연, 자연 죽이기를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위적으로 일렬로 심은 나무와 그 사이에 인공적으로 낸 길. 그리고 겉에는 나무로 접착한 인공적인 집. 내가 꿈꾼 소박함은 결국 또다른 욕망의 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왜? TV나 책, 또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야 소박하다고 말해왔으니까.
먹고, 자고, 웃고.. 생존을 위해서는 몇 가지 충족되어야 할 것들은 반드시 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나는 무엇을 원한다’는 말의 의미는 180도 방향을 틀어보면 필요에 따라 중요함이나 논리의 제한을 받지 않고 독단적이고 변덕스러운 욕망까지도 함축하게 되었다. 저자는 욕망 자체에 대해 부정하지는 않는다. 영적 세계를 제외한 인간의 욕망은 ‘내가 왜 살아가는가’에 동기를 부여해준다. 이 책에는 블러버라는 용어를 자주 쓰는데, 블러버란 blubber, 물질적 풍요와 부의 상징으로 여기던 고래 기름을 의미하는데, 이 책에서는 여분 또는 잉여라는 의미로 쓰인다.
블러버는 야누스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여분은 분명 우리에게 여유로움을 준다. 새의 무의미한 지저귐일지라도 짝짓기를 위한 것도 경고를 위한 것도 아닌 순수한 노래는 삶의 즐거움을 채워준다. 또는 하루 중 남는 시간이나 창의적인 놀이를 위해 비워둔 여분의 시간도 그러하다. 하지만 이런 잉여는 어떨까? 운동복 차림으로 멍하니 소파에 누워 TV만 보는 사람. 그리고 보통 차고보다 4배 크기의 차고가 딸린 집에서 혼자 공상을 꿈꾸며 집에만 머무는 사람에겐 주어진 환경은 분명 비생산적이다.
저자는 8개의 장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욕망이 곧 행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실제로 욕망=만족=기쁨=행복이라고 하는 논리의 연결 마디마디가 명백히 거짓이다. 욕망이 꼭 만족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만족은 종종 우리의 기대보다는 덜 기쁜 경우가 많으며 대부분 짧다. 기쁨을 성취했다고 해서 행복이 오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는 욕망이 만족을 거쳐 기쁨과 행복으로 가야한다는 강압적인 사회에서 너무나도 당연히 적응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우린 지나치게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무언의 강요로 인해 그 고마움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행복한 사회에 살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행복의 역설에 대해 다시한번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