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군대를 거부한다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53인의 소견서
전쟁없는세상 엮음 / 포도밭출판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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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군대를 거부한다>는 군대에 가지 않겠다는 선언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 53명의 병역거부자들은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하나의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사람을 해칠 수도 있는, 그것이 전제되어 있는 병역 의무를 평화적 신념에 따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서 겪은 일상적인 폭력, 이라크 파병부터 밀양 송전탑 건설에 이르기까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국가의 폭력과 범죄들, 53인은 이러한 경험들 속에서 저마다 병역거부를 결심하게 된다.

나 또한 지금의 군대가 근본적으로 전쟁과 살육에 복무한다고 생각하며, 그 때문에 병역거부를 택하는 이들을 위해 다른 형태의 병역제도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다. 그런데 군대에 대한 내 생각이라는 것은 현재 이 정도가 전부다. 내가 이 53인의 이야기에 매료된 것은 사실상 군대를 벗어난 차원이라고 봐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군대'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복잡하며 끈끈한 어떤 것이다.

그래서 기분전환 삼아 읽어보라고 권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군대에 관심 없는 사람은 안 읽어도 된다고 제쳐두기는 더욱 어렵다.


이것은 거부가 아니다

명색이 병역거부선언인데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나는 '거부'라는 말이 뭔가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대부분의 글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거부라기보다는 '선택'이다. 세상에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해지는 것들, 선택의 영역이 아니라고 세뇌당해 온 것들에 적극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왜 선택하면 안 돼?"라고 묻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다른 것을 선택해 보임으로써 증명한다.

"이런 분열에도 나는 병역거부를 선택한다. 분열하기 때문에 나는 병역거부를 선택한다. (줄임) 완벽해야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자신을 안고 끊임없이 선택하는 실존적 모습이 내가 믿고 있는 유일한 도덕체계다."(조은, 175쪽)

이들에게 선택이란 곧 '자유의지'이고, 그것 자체가 '인간'의 다른 이름과도 같다. 명령을 내리는 권력과 주어진 현실조건에 저항하고 자기 의지로 선택하는 것, 그 선택에 따르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말이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기 이전에 한 명의 인간이 되고 싶다. 이성을 가진, 영혼을 지닌 한 명의 온전한 인간이 되고 싶다."(안홍렬, 124쪽)

당연히 이러한 종류의 얘기는 우리를 항상 불편하게 하며, 여기에 시비를 거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그럼 군대 가는 사람은 인간도 아니라는 말이냐?" 아시다시피, 그런 말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나'이다. 애초에 '나'가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면 저항이나 선택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문제를 분명히 느끼고 있는 '나'를 눈감아버린다면, '나'를 제외한 대다수의 의견에 편승해버린다면, 그 '나'가 스스로를 인간으로 느낄 수 있을지 미지수다. 결국 이들은 '나'를 인간으로 지켜내고자 하는 53개 '나'들의 집합이다.


이것은 고립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자기 신념을 드높이며 홀로 당당하고자 하는 것만은 아니다. 동시대의 평범한 젊은이들과 부대끼며 같은 길을 걷는 대신 외로운 감옥에 들어가는 길을 택했다고 해서, 이들이 고립을 자초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 도도하고 도전적이기만 할 것 같은 선언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연대의식'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애초에 다른 모든 이들과 이어져 있다는 깨달음 같은 것인데, 그게 조금은 서글플 정도로 절박하게 묻어난다.

"이 지구생명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의 피와 살로부터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를 얻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이용석, 92쪽)

"나의 삶을 다른 이들과 포갤 수 있는 위치에 이르고 싶다."(현민, 164쪽)

"우리는 결국 우리가, 같은, 사람이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줄임) 우리가 모두 이어져 있음을 느낄 때에, 우리의 승리는 시작될 것입니다."(안지환, 196쪽)

그리고 자신의 병역거부를 남에게 설명해내는 과정 자체도 이들에게는 병역거부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듯 보인다. "난 전쟁에 반대해. 평화를 원해. 그래서 군대에 갈 수 없어." 아주 간단하게는 이런 해명이 있을 수 있다. 이 한 줄에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정말로 보잘것없어서 거의 틀린 말처럼 들릴 지경이다. 이럴 바에야 아예 말을 안 하는 게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삶을 통해 온전히 검증되지 않은 '내면의 소리', 일반적으로 양심이나 신념으로 명명되는 것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애써 드러내고 설명해야 한다는 사실"(오태양, 16쪽), "나의 언어가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 나라는 존재가 다수와 외떨어져 있다는 고립감"(임치윤, 30쪽)이 많은 병역거부자들을 괴롭게 했다.

다른 개체들과 자기 자신이 이어져 있다는 감각, 남에게 총을 겨누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겨누는 것과 같다는(또는 더 못할 짓이라는) 믿음에 따라 병역거부를 결심했다. 그런데 정작 남에게 그 마음을 전달할 수 없다면, 남에게 이해받지 못한다면 그 고통은 또 어찌해야 할까.

그래서 병역거부를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개인의 소견서는 그만큼 절박한 인간의 언어, 그야말로 '사람의 말'일 수밖에 없다. 이해받고 싶기 때문에, 내밀한 양심의 소리를 공적인 언어로 번역하기가 거의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시도한다. 언제까지나, 앞서 시도한 사람의 언어를 이어받아서, 몇 번이고 다시, 사람의 말을.


이것은 영웅이 아니다

자유의지, 연대의식, 그밖의 어떤 면에서든 이들이 대다수의 평범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과 구분되는 투사, 혁명가, 도덕가, 활동가로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주변에 병역거부자가 몇 있는데, 저렇게 헐렁(?)해 보여도 사실은 무시무시하게 똑똑하고 의지가 굳고 급진적인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뭐, 그것은 경우에 따라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책 전반에서 읽히는 진솔한, 조금은 수줍기까지 한 고백들, '나는 당신과 크게 다른 사람이 아니다'라는 메시지에 자연스럽게 마음이 열리는 것을 느꼈다. '신념이 아니면 죽음!' 물론 이러한 입장도 간간이 섞여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일단은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강한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 내가 왜 군대에 안 가려고 하지?'라는 질문에 대한 답부터 천천히 찾아나가야 할 만큼, 문제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왜 아니겠는가? 병역거부고 뭐고 다 사람 사는 일인데 어떻게 단순명쾌할 수 있단 말인가.

53인 중에서 특히 현민씨의 기나긴 소견서를 인상 깊게 읽었다. 그는 시종일관 솔직하고 담담한 언어로 자기가 도덕적 영웅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그러나 "나 같은 사람도 괜찮지 않을까"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게 병역거부의 사유로 밀 만한 키워드는 없는 것 같다. 천주교 세례명이 있지만 냉담자다. 소속단체가 없다. 활동가가 아니다. 짝사랑하는 사상가는 있지만 '무슨주의자'라고 하기엔 쑥스럽다. (줄임) 평화를 사랑하기보다 그냥 싸움을 못하는 것 같다."(161쪽)

"나는 병역거부를 하기 위해 자신을 완전무결한 도덕적 주체로 포장하고 싶지 않다. 대의에 기대고 싶지도 않다. 샅샅이 뒤지면, 병역거부에 필요한 이력이 없진 않다. (줄임) 하지만 그런 활동은 단일한 목표의식 하에 행해진 일이 아니었다. (줄임) 실은 모든 삶은 이질성으로 그득하기 마련이다. 내게 완결된 서사는 불가능하며 매력이 없다. 완결된 서사의 이면, 즉 내밀한 일상의 파편은 정치적 올바름을 훼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치를 다르게 사고할 수 있는 자원이라고 생각한다."(163쪽)

결국 그 '내밀한 일상의 파편'들이 쌓여 양심적 병역거부의 역사를 이뤄온 것이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느끼기로는 충분히 그렇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부딪히곤 하는 부조리들에 남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다. 파편이 낸 생채기에 더 아파하거나 더 화를 내거나 더 끈질기게 생각한 나머지 자연히 행동을 남보다 '하나쯤' 더 하게 되었는데, 그 하나가 병역거부였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마 지금보다 훨씬 나은 세상이 주어져서 군대라는 의무가 없었다면, 다른 어떤 의무에든 의문을 제기하고 저항하고 또 다른 선택을 기어이 찾아 했을 것이다. 그 의무가 그들에게 인간이 아닐 것을, 또는 그들 자신이 아닐 것을 명령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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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꿈은 자연사
탁수정 지음 / Lik-it(라이킷)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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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수정의 책이 나왔다. 책을 쓰고 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평소의 탁수정답지 않게 트위터에서 조용한 것이 의아했다. 꼭 수정이 아니라 나 같아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책에 대해 얘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근데 수정은 프로필에 ‘책 써요’라고만 적어두고 별 말이 없었다. 그래서 비로소 생각했다. 이 책이 탁수정에게 얼마나 커다란, 적잖게 무거운 의미인지.

탁수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나는 혼자 고민하곤 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 조합원(수정이 매번 외우기 어려워서 물어보는 우리 조직 풀네임), 전 출판사 마케터, 대구의 오래된 지역서점 첫째 딸내미, 직장 내 위계에 의한 성폭력 피해생존자이자 고발자, 유수 일간지와 JTBC 뉴스룸에 출연한 미투운동가. 그런데 이 중 어떤 것을 꼽아도 수정을 대표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제는 “탁수정이 누구냐? 넌 걔를 어떻게 아냐?”라는 물음에 긴 설명 대신 이 책 한 권을 내밀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한 피해생존자가 어떻게 살아남아 여전히 삶을 꿈꾸고 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하지만 저자를 꼭 닮은 노란머리 친구가 발레인지 흐느적거림인지 모를 춤을 추고 있는 표지 일러스트가 말해주듯, 이 책은 독자에게 고통보다는 웃음을, 죄책감보다는 용기를 준다.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저자가 독자를 아주 명확하게 제한해놓고 있으며, 그 독자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탁수정은 시종일관 ‘친구’들에게 말하고 있다.

"활석 < 석고 < 방해석 < 형석 < 인회석 < 장석 < 수정 < 토파즈 < 강옥 < 다이아몬드
학교 다닐 때 익힌 모스경도계이다. 무른돌부터 굳은돌까지 열 가지 돌의 이름. 여기에 소중한 내 친구들의 이름을 대신 넣어볼 수 있을 것 같다. (...) 아주 단단해서 일곱 번쯤 부딪혀도 여전히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같은 친구가 있는가 하면, 보드랍기 짝이 없어 베이비 파우더로 쓰이는 활석 같은 친구도 있다."(41쪽)

‘친구’. 나도 그의 수많은 친구 중 하나다. 이때 ‘친구’는 ‘친하다’의 일반적인 의미, 배타적 관계의 한계를 넘어선다. 수정은 동시대의 폭력에 노출된 채 사고나 자살이 아닌 ‘자연사’를 목표로 하루하루 버티는 모든 여성의 친구다. 페미니스트라고 해도 대부분 자기와 비슷한 스타일의 여성하고 친하고, 또 그 여성들이야말로 페미니스트라고 인정하는 경향이 있는데(나도 그렇다), 수정은 그렇지 않다. 그게 가끔 보면 좀 이상할 정도여서(“넌 저 사람하고도 친해?”), 아 이 친구는 역시 나랑 다르다 선을 긋게 될 때도 있었지만, 중요한 건 내가 그런다고 해서 수정의 ‘친구’ 범위에서 ‘탈락’되는 일은 없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고 더욱더 확신하게 되었다.

이렇듯 ‘친구’이기는 해도 딱히 친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수정의 일상을 속속들이 알지 못했다. 트위터에서 연대 ‘화력’을 모아야 할 일이 있거나, ‘달고나라떼’, ‘부부의 세계’처럼 트위터리언을 하나로 집결(?)시키는 이슈가 있을 때 반짝 나타나는 걸 보면서, 아 잘 지내고 있구나 안심했을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수정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게 되었고, 전보다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소위 말하는 드라마퀸이다. (...) 내가 가장 혐오하고, 스스로 짓누르고 숨기는 정체성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117쪽)

수정은 책에서 자신을 ‘드라마퀸’으로 정의한다. 찾아보니 ‘마치 스스로 멜로드라마 주인공인 양 모든 일을 과장해서 겪고 느끼고 말하는 여자’를 칭하는 단어인 것 같다. 뭐, 진단명이 아니기 때문에 수정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킹’이라는 단어는 없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단어 또한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좀 거슬리는 여자를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졌겠거니 생각한다. 1)여자들은 작은 일에도 호들갑을 떤다. 2)그중에서도 심하게 호들갑 떠는 여자들, 툭하면 자기가 당했다고 떠드는 여자들이 문제다. 아마도 이 두 가지 회로를 거쳐 ‘드라마퀸’은 탄생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세상 모든 여자가 다 드라마퀸으로 태어나는 셈이다.

‘퀴어’라는 단어가 그러하듯이, 이 ‘드라마퀸’이라는 단어 또한 세상이 찍은 낙인이 아니라 우리만의 고유한 의미로 전유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탁수정은 드라마퀸이 맞다. 이 귀여운 여왕님이 사는 곳은 앞서 말한 ‘친구’들의 세계다. 나는 이걸 ‘우정의 왕국’이라고 부르겠다. 수정의 왕국에서는 여성 모두 서로를 돕는다. 왕국의 목표는 모두가 ‘자연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죽을 것처럼 힘든 여성을 그냥 놔둘 수가 없다. 출판사 다니는 친구에게 오랜만에 전화가 오면 대뜸 ‘출판노조 미친년 여기 있다!’의 마음으로 뛰어들어야 하고, 독서모임을 빙자해 ‘겸손 1회에 자랑 10회’ 대회를 열며, “친구라기에 좀 어정쩡한 사이”인 친구와 같이 살며 그 친구의 일생을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는 팟캐스트를 진행한다. 병원에 갈 버스비조차 없어진 친구의 손을 잡고 주민센터에 가서 도움을 구하고, 함께할 친구들에게 연락해 공연을 기획하며, “어머니가 생활비 하라고 육십만 원을 보내주셨는데 거기서 오십만 원을 척~ 떼어” 어딘가에 보내기도 한다. 이 친구가 대체 왜 이러는지 알 도리가 없지만(솔직히 진짜 모르겠다), 읽어가는 동안 어느새 나도 이 우정의 왕국에서 사는 꿈을 꾸게 된다.

물론 문제는 남는다. 성폭력이 일반화된 사회, 여자라는 태생의 ‘을’ 입장에다 노동자 ‘을’의 입장이 더해진 채 살아가는 공통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섣불리 여자들 사이의 ‘차이’를 지우는 일은 위험하고, 내가 가끔 실제로 수정을 만날 때 느끼는 것처럼, 나는 그와 많이 ‘다르다’. “어딘가의 직원으로 사는 게 맞지 않는 것 같다”고 결론 내린 수정과 달리, 나는 어찌됐거나 10년 이상 어딘가의 직원으로 전전하며 살고 있다. 평균 근속이 2년이 될까 말까 한 삶일지라도, 달마다 월급을 받고 엄마한테 매달 용돈도 주고 밤에 떡볶이나 커피가 먹고 싶으면 배달앱으로 주문하며 여자친구들에게 생일도 아닌데 꽃을 사줄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다. 그런 내가 수정의 현재 상태를 잘 이해하고 네 삶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말하는 일에는 어떤 종류의 ‘위선’이 부유물처럼 남아 있다.

그런데 이런 내 생각마저도, 저자는 이미 알고 있고 괜찮다고 말해준다.

"아주 큰 손해를 보지 않아도 선한 선택을 할 수 있을 때, 잃는 것 없이 타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때, 나는 찜찜하다. (...) 특권이라는 생각이 들면 바짝 누리고, 누려서 나아지고, 나아져서 또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력을 행하는 것으로 갚아나가면 될 일인 것이다."(167쪽)

실제로 수정 역시 어떤 종류의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다. 이를테면 이 책에서 내가 제일 많이 운 대목은, 수정이 ‘엄마도 이따위 딸 낳고 하나도 안 좋았을 거면서 왜 자꾸 결혼해서 애 낳으라고 하냐’며 꼬라지(!)를 부릴 때 엄마가 “나는 좋았다 왜! 계속 좋았는데 왜!!” 하고 소리 지르는 장면이었다. 상처 입히려고 한 말이고 엄마는 상처 입어서 울화를 터뜨렸는데 본의 아니게 너무 진심이 튀어나온 것이다. 너라는 딸을 낳아서 너무 좋았고, 지금도 좋다고. 이런 엄마, 이런 가족을 가진 것은 분명 수정의 특권이다.

하지만 이런 ‘특권’을 알아채고 죄책감을 갖거나, 혹은 감추어 혼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도울 연료로 사용하는 것이 이 ‘왕국’의 유일무이한 법칙이다. “죽여주는 동료들과 서로를 챙기며 미래로 가는 일만으로도 바쁜 인생” 탁수정이 머리털을 쥐어뜯고 아마도 방구석에서 몸부림에 가까운 댄스를 추며 이 책을 끝내 완성해주어서 고맙다. 타고난 기획자이자 얼리어답터로서 “이미 이런 책이 나와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데 나 따위의 삶을 써서 뭐 하지”라는 생각에 괴로웠을 것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당신의 책은 이렇게 나왔고, 우리에게 도착했다. ‘이런 책’이 아니라 ‘하나뿐인 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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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 제2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강화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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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에 둘러진 ‘띠지’에는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표시와 함께 “이 이야기를 끝낼 사람은 바로 ‘너’다”라는 비장한 문구가 써 있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휘발성이 강한 문장에 물 흐르듯 읽히는 구성이었는데도 사이사이 멈추는 때가 많았다. 멈춰서, 내가 그간 여성으로서 겪어온 경험들과 내가 보고 들어온 여성들의 경험, 그 모든 것들을 통째로 불러와 동시에 읽어야 했다. 이 소설 속 여성들이 현재 직면한 고통에 맞서서 봉인된 과거를 풀어헤치듯이, 소설은 독자에게도 노골적으로 그렇게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이들과 ‘다른 사람’인가?


진공청소기가 빨아들인 기억 속으로

“그녀를 가장 경멸한 건 누구였던가. 여자들이었다. 자신은 하유리와 다르다며 마치 진실에 맞서는 듯 지껄이던 년들. 하유리와 다르다는 걸 자랑스러워했지. 너희가 가장 악마들이었어. 너희는 다 똑같은 년들이야.”

다 똑같은 년들. 이건 소설 속 한 남성의 발화이다. 나 역시 빼도 박도 못하게 ‘똑같은 년들’ 중 하나로서 이 서평을 쓴다. 소설에서는 진아, 수진, 유리, 단아, 이영 등 (이름만 들어도) 정말이지 ‘똑같은 년들’의 현재와 과거가 교차되며 펼쳐진다. 주요 인물인 진아, 수진, 유리는 안진이라는 지방 도시에서 대학교를 같이 다닌 동창들이다. 진아는 누가 봐도 잘생기고 능력 있는 직장 상사와 연애를 하다가 상습 폭행을 당하고, 그것을 공론화하는 과정에서 “진공청소기 같은 년”이라는 익명의 비난 트윗을 보게 된다. 그 짧은 한 줄이, 진공청소기 필터 안처럼 지저분하고 자욱하게 엉켜 있는 과거로 진아를 안내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 남자나 닥치는 대로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 같은 년이라고 불리다 교통사고로 죽은” 유리, “깡촌에서 할머니 밑에서 혼자 크며 따돌림을 당하다가 대학에 와서는 물불 안 가리고 킹카를 꿰차며 진아를 엿 먹인” 수진... 잠깐만. 유리와 수진에 대한 이 수식들은 온당한가? 이 소설 전체가 그것을 밝혀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소설 내용을 더 자세히 이야기하게 되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다. 사실, 자세히 이야기할 필요가 없기도 하다. 소설 속 화자가 스스로 여러 번 언급하고 있듯이, 이 책의 사건들과 인물들 자체가 전부 ‘클리셰’에 가깝기 때문이다. 혹은 ‘괄호’. 이 괄호들 속에 우리는 각자가 알고 있는 실존 인물들의 이름을 손쉽게 써 넣을 수 있다. 다들 학교 다닐 때 유리 같은 년, 수진이 같은 년, 있었다. 있었던 것이다. 진아는 그렇게 층층이, 칸칸이 나뉜 채 먼지 쌓여가고 있었던 ‘년들’의 기억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폭행을 당한 건 자신인데도 오히려 자신이 비난을 당하고 있는 상황, 스스로도 격렬하게 저항하지 못했고 원인이 자신에게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도 그 “똑같은 년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진아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과거의 ‘똑같았던 여자들’에 대한 기억이다. 서로를 구획지어야만 견딜 수 있었기에 그렇게 했던 그들.

그런데 정말 그러했던가. 나는 다른 사람이었던가. 똑같은 년이 되지 말라고 구슬리고 다그치고 패고 죽이던, 어떤 커다란 구조 속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던 건 아닌가. ‘진공청소기’는 아무 남자나 홀리는 유리가 아니라, 억지로 갈라놓고 ‘넌 저년과 달라’라고 안심시키다가 수틀리면 ‘똑같은 년들’이라며 무자비로 한데 빨아들여버리는 성폭력적인 사회구조 그 자체가 아닌가.


우리는 ‘기억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진아, 수진, 유리, 단아, 이영...의 뒤를 이어 ‘나’라는 클리셰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 진아 두어 명, 수진이 서너 명, 유리 다섯 명은 거뜬히 떠올릴 수 있는 나라는 년에 대해서. 내 기억 속에 살고 있는 여자들을 불러와 만나는 일은, 그러나, 멀거나 가까운 과거의 ‘나’를 불러와 만나는 일하고 별로 다르지 않다. 애인의 데이트폭력을 용인하는 바보 같은 여자들과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녀들과 ‘다른 사람’이 아니다. 기억은 파내도 파내도 끝이 없고, 파낸 것을 어디다 영원히 버릴 수도 없다. 그 자리에 다시 덮어둘 뿐. 수많은 기억들과 이별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선언하지 못한다. 정말 바보 같지만, 왜인지 입이 안 떨어진다. 페미니스트인 것 같기는 한데, 그렇게 발화할 수가 없다. ‘아이 캔 낫 스피크’다.

진아, 수진이, 유리, 단아, 이영은 어떨까. 이 여자들은 시간차를 두고 고통에 직면해 그것을 살아낸다. 실수하고, 자기를 상처 입히고, 다른 여자들까지 상처 입히지만, 아주 조금씩 진실과 대면하고 행동한다. 나라고 아니겠는가. 똑같다. 우린 누구 말마따나 똑같은 년들이니까.

"그 기억, 그 흔적으로부터 페미니스트가 등장한다. 페미니즘은 포스트페미니즘의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의 인식 뒤에 따라붙는 ‘...를 원한다’, ‘...이면 좋겠다’, ‘...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말들과 그 말들이 안고 있는 바람과 욕망, 희망이나 좌절, 절박함, 새로운 생각의 단초 등의 형태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미래’가 지속적으로 좌절당하고 여성의 생존 자체가 위기로 내몰리면서 세계의 표면으로 되돌아왔다. 잊혔으나 사라지지는 않았던 것의 귀환인 셈이다.
(중략)
그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지속적으로 정체화하는지 안 하는지조차 당장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세계에 그가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페미니즘의 기억이 잠재적인 삶의 조건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_손희정, <페미니즘 리부트>, 103쪽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여성으로서의 질기고 더러운 기억, 기억, 기억들을 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을 양분 삼아 우리는 페미니스트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일종의 ‘기억의 공동체’로서 우리는 삶의 투쟁을 계속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의 기억을 나에게 달라. 나도 그렇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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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산한 저 나무에도 언젠가는 잎피 피갯지
김지현 지음, 김복동 그림 / 파시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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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동의 그림을 잇는 김지현의 그림과 글을 잇는 희음의 편집을 잇는 파시클의 출판. 정말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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