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 - 제2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강화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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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에 둘러진 ‘띠지’에는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표시와 함께 “이 이야기를 끝낼 사람은 바로 ‘너’다”라는 비장한 문구가 써 있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휘발성이 강한 문장에 물 흐르듯 읽히는 구성이었는데도 사이사이 멈추는 때가 많았다. 멈춰서, 내가 그간 여성으로서 겪어온 경험들과 내가 보고 들어온 여성들의 경험, 그 모든 것들을 통째로 불러와 동시에 읽어야 했다. 이 소설 속 여성들이 현재 직면한 고통에 맞서서 봉인된 과거를 풀어헤치듯이, 소설은 독자에게도 노골적으로 그렇게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이들과 ‘다른 사람’인가?


진공청소기가 빨아들인 기억 속으로

“그녀를 가장 경멸한 건 누구였던가. 여자들이었다. 자신은 하유리와 다르다며 마치 진실에 맞서는 듯 지껄이던 년들. 하유리와 다르다는 걸 자랑스러워했지. 너희가 가장 악마들이었어. 너희는 다 똑같은 년들이야.”

다 똑같은 년들. 이건 소설 속 한 남성의 발화이다. 나 역시 빼도 박도 못하게 ‘똑같은 년들’ 중 하나로서 이 서평을 쓴다. 소설에서는 진아, 수진, 유리, 단아, 이영 등 (이름만 들어도) 정말이지 ‘똑같은 년들’의 현재와 과거가 교차되며 펼쳐진다. 주요 인물인 진아, 수진, 유리는 안진이라는 지방 도시에서 대학교를 같이 다닌 동창들이다. 진아는 누가 봐도 잘생기고 능력 있는 직장 상사와 연애를 하다가 상습 폭행을 당하고, 그것을 공론화하는 과정에서 “진공청소기 같은 년”이라는 익명의 비난 트윗을 보게 된다. 그 짧은 한 줄이, 진공청소기 필터 안처럼 지저분하고 자욱하게 엉켜 있는 과거로 진아를 안내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 남자나 닥치는 대로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 같은 년이라고 불리다 교통사고로 죽은” 유리, “깡촌에서 할머니 밑에서 혼자 크며 따돌림을 당하다가 대학에 와서는 물불 안 가리고 킹카를 꿰차며 진아를 엿 먹인” 수진... 잠깐만. 유리와 수진에 대한 이 수식들은 온당한가? 이 소설 전체가 그것을 밝혀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소설 내용을 더 자세히 이야기하게 되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다. 사실, 자세히 이야기할 필요가 없기도 하다. 소설 속 화자가 스스로 여러 번 언급하고 있듯이, 이 책의 사건들과 인물들 자체가 전부 ‘클리셰’에 가깝기 때문이다. 혹은 ‘괄호’. 이 괄호들 속에 우리는 각자가 알고 있는 실존 인물들의 이름을 손쉽게 써 넣을 수 있다. 다들 학교 다닐 때 유리 같은 년, 수진이 같은 년, 있었다. 있었던 것이다. 진아는 그렇게 층층이, 칸칸이 나뉜 채 먼지 쌓여가고 있었던 ‘년들’의 기억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폭행을 당한 건 자신인데도 오히려 자신이 비난을 당하고 있는 상황, 스스로도 격렬하게 저항하지 못했고 원인이 자신에게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도 그 “똑같은 년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진아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과거의 ‘똑같았던 여자들’에 대한 기억이다. 서로를 구획지어야만 견딜 수 있었기에 그렇게 했던 그들.

그런데 정말 그러했던가. 나는 다른 사람이었던가. 똑같은 년이 되지 말라고 구슬리고 다그치고 패고 죽이던, 어떤 커다란 구조 속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던 건 아닌가. ‘진공청소기’는 아무 남자나 홀리는 유리가 아니라, 억지로 갈라놓고 ‘넌 저년과 달라’라고 안심시키다가 수틀리면 ‘똑같은 년들’이라며 무자비로 한데 빨아들여버리는 성폭력적인 사회구조 그 자체가 아닌가.


우리는 ‘기억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진아, 수진, 유리, 단아, 이영...의 뒤를 이어 ‘나’라는 클리셰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 진아 두어 명, 수진이 서너 명, 유리 다섯 명은 거뜬히 떠올릴 수 있는 나라는 년에 대해서. 내 기억 속에 살고 있는 여자들을 불러와 만나는 일은, 그러나, 멀거나 가까운 과거의 ‘나’를 불러와 만나는 일하고 별로 다르지 않다. 애인의 데이트폭력을 용인하는 바보 같은 여자들과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녀들과 ‘다른 사람’이 아니다. 기억은 파내도 파내도 끝이 없고, 파낸 것을 어디다 영원히 버릴 수도 없다. 그 자리에 다시 덮어둘 뿐. 수많은 기억들과 이별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선언하지 못한다. 정말 바보 같지만, 왜인지 입이 안 떨어진다. 페미니스트인 것 같기는 한데, 그렇게 발화할 수가 없다. ‘아이 캔 낫 스피크’다.

진아, 수진이, 유리, 단아, 이영은 어떨까. 이 여자들은 시간차를 두고 고통에 직면해 그것을 살아낸다. 실수하고, 자기를 상처 입히고, 다른 여자들까지 상처 입히지만, 아주 조금씩 진실과 대면하고 행동한다. 나라고 아니겠는가. 똑같다. 우린 누구 말마따나 똑같은 년들이니까.

"그 기억, 그 흔적으로부터 페미니스트가 등장한다. 페미니즘은 포스트페미니즘의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의 인식 뒤에 따라붙는 ‘...를 원한다’, ‘...이면 좋겠다’, ‘...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말들과 그 말들이 안고 있는 바람과 욕망, 희망이나 좌절, 절박함, 새로운 생각의 단초 등의 형태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미래’가 지속적으로 좌절당하고 여성의 생존 자체가 위기로 내몰리면서 세계의 표면으로 되돌아왔다. 잊혔으나 사라지지는 않았던 것의 귀환인 셈이다.
(중략)
그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지속적으로 정체화하는지 안 하는지조차 당장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세계에 그가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페미니즘의 기억이 잠재적인 삶의 조건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_손희정, <페미니즘 리부트>, 103쪽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여성으로서의 질기고 더러운 기억, 기억, 기억들을 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을 양분 삼아 우리는 페미니스트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일종의 ‘기억의 공동체’로서 우리는 삶의 투쟁을 계속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의 기억을 나에게 달라. 나도 그렇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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