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자연사
탁수정 지음 / Lik-it(라이킷)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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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수정의 책이 나왔다. 책을 쓰고 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평소의 탁수정답지 않게 트위터에서 조용한 것이 의아했다. 꼭 수정이 아니라 나 같아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책에 대해 얘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근데 수정은 프로필에 ‘책 써요’라고만 적어두고 별 말이 없었다. 그래서 비로소 생각했다. 이 책이 탁수정에게 얼마나 커다란, 적잖게 무거운 의미인지.

탁수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나는 혼자 고민하곤 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 조합원(수정이 매번 외우기 어려워서 물어보는 우리 조직 풀네임), 전 출판사 마케터, 대구의 오래된 지역서점 첫째 딸내미, 직장 내 위계에 의한 성폭력 피해생존자이자 고발자, 유수 일간지와 JTBC 뉴스룸에 출연한 미투운동가. 그런데 이 중 어떤 것을 꼽아도 수정을 대표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제는 “탁수정이 누구냐? 넌 걔를 어떻게 아냐?”라는 물음에 긴 설명 대신 이 책 한 권을 내밀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한 피해생존자가 어떻게 살아남아 여전히 삶을 꿈꾸고 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하지만 저자를 꼭 닮은 노란머리 친구가 발레인지 흐느적거림인지 모를 춤을 추고 있는 표지 일러스트가 말해주듯, 이 책은 독자에게 고통보다는 웃음을, 죄책감보다는 용기를 준다.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저자가 독자를 아주 명확하게 제한해놓고 있으며, 그 독자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탁수정은 시종일관 ‘친구’들에게 말하고 있다.

"활석 < 석고 < 방해석 < 형석 < 인회석 < 장석 < 수정 < 토파즈 < 강옥 < 다이아몬드
학교 다닐 때 익힌 모스경도계이다. 무른돌부터 굳은돌까지 열 가지 돌의 이름. 여기에 소중한 내 친구들의 이름을 대신 넣어볼 수 있을 것 같다. (...) 아주 단단해서 일곱 번쯤 부딪혀도 여전히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같은 친구가 있는가 하면, 보드랍기 짝이 없어 베이비 파우더로 쓰이는 활석 같은 친구도 있다."(41쪽)

‘친구’. 나도 그의 수많은 친구 중 하나다. 이때 ‘친구’는 ‘친하다’의 일반적인 의미, 배타적 관계의 한계를 넘어선다. 수정은 동시대의 폭력에 노출된 채 사고나 자살이 아닌 ‘자연사’를 목표로 하루하루 버티는 모든 여성의 친구다. 페미니스트라고 해도 대부분 자기와 비슷한 스타일의 여성하고 친하고, 또 그 여성들이야말로 페미니스트라고 인정하는 경향이 있는데(나도 그렇다), 수정은 그렇지 않다. 그게 가끔 보면 좀 이상할 정도여서(“넌 저 사람하고도 친해?”), 아 이 친구는 역시 나랑 다르다 선을 긋게 될 때도 있었지만, 중요한 건 내가 그런다고 해서 수정의 ‘친구’ 범위에서 ‘탈락’되는 일은 없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고 더욱더 확신하게 되었다.

이렇듯 ‘친구’이기는 해도 딱히 친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수정의 일상을 속속들이 알지 못했다. 트위터에서 연대 ‘화력’을 모아야 할 일이 있거나, ‘달고나라떼’, ‘부부의 세계’처럼 트위터리언을 하나로 집결(?)시키는 이슈가 있을 때 반짝 나타나는 걸 보면서, 아 잘 지내고 있구나 안심했을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수정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게 되었고, 전보다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소위 말하는 드라마퀸이다. (...) 내가 가장 혐오하고, 스스로 짓누르고 숨기는 정체성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117쪽)

수정은 책에서 자신을 ‘드라마퀸’으로 정의한다. 찾아보니 ‘마치 스스로 멜로드라마 주인공인 양 모든 일을 과장해서 겪고 느끼고 말하는 여자’를 칭하는 단어인 것 같다. 뭐, 진단명이 아니기 때문에 수정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킹’이라는 단어는 없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단어 또한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좀 거슬리는 여자를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졌겠거니 생각한다. 1)여자들은 작은 일에도 호들갑을 떤다. 2)그중에서도 심하게 호들갑 떠는 여자들, 툭하면 자기가 당했다고 떠드는 여자들이 문제다. 아마도 이 두 가지 회로를 거쳐 ‘드라마퀸’은 탄생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세상 모든 여자가 다 드라마퀸으로 태어나는 셈이다.

‘퀴어’라는 단어가 그러하듯이, 이 ‘드라마퀸’이라는 단어 또한 세상이 찍은 낙인이 아니라 우리만의 고유한 의미로 전유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탁수정은 드라마퀸이 맞다. 이 귀여운 여왕님이 사는 곳은 앞서 말한 ‘친구’들의 세계다. 나는 이걸 ‘우정의 왕국’이라고 부르겠다. 수정의 왕국에서는 여성 모두 서로를 돕는다. 왕국의 목표는 모두가 ‘자연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죽을 것처럼 힘든 여성을 그냥 놔둘 수가 없다. 출판사 다니는 친구에게 오랜만에 전화가 오면 대뜸 ‘출판노조 미친년 여기 있다!’의 마음으로 뛰어들어야 하고, 독서모임을 빙자해 ‘겸손 1회에 자랑 10회’ 대회를 열며, “친구라기에 좀 어정쩡한 사이”인 친구와 같이 살며 그 친구의 일생을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는 팟캐스트를 진행한다. 병원에 갈 버스비조차 없어진 친구의 손을 잡고 주민센터에 가서 도움을 구하고, 함께할 친구들에게 연락해 공연을 기획하며, “어머니가 생활비 하라고 육십만 원을 보내주셨는데 거기서 오십만 원을 척~ 떼어” 어딘가에 보내기도 한다. 이 친구가 대체 왜 이러는지 알 도리가 없지만(솔직히 진짜 모르겠다), 읽어가는 동안 어느새 나도 이 우정의 왕국에서 사는 꿈을 꾸게 된다.

물론 문제는 남는다. 성폭력이 일반화된 사회, 여자라는 태생의 ‘을’ 입장에다 노동자 ‘을’의 입장이 더해진 채 살아가는 공통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섣불리 여자들 사이의 ‘차이’를 지우는 일은 위험하고, 내가 가끔 실제로 수정을 만날 때 느끼는 것처럼, 나는 그와 많이 ‘다르다’. “어딘가의 직원으로 사는 게 맞지 않는 것 같다”고 결론 내린 수정과 달리, 나는 어찌됐거나 10년 이상 어딘가의 직원으로 전전하며 살고 있다. 평균 근속이 2년이 될까 말까 한 삶일지라도, 달마다 월급을 받고 엄마한테 매달 용돈도 주고 밤에 떡볶이나 커피가 먹고 싶으면 배달앱으로 주문하며 여자친구들에게 생일도 아닌데 꽃을 사줄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다. 그런 내가 수정의 현재 상태를 잘 이해하고 네 삶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말하는 일에는 어떤 종류의 ‘위선’이 부유물처럼 남아 있다.

그런데 이런 내 생각마저도, 저자는 이미 알고 있고 괜찮다고 말해준다.

"아주 큰 손해를 보지 않아도 선한 선택을 할 수 있을 때, 잃는 것 없이 타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때, 나는 찜찜하다. (...) 특권이라는 생각이 들면 바짝 누리고, 누려서 나아지고, 나아져서 또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력을 행하는 것으로 갚아나가면 될 일인 것이다."(167쪽)

실제로 수정 역시 어떤 종류의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다. 이를테면 이 책에서 내가 제일 많이 운 대목은, 수정이 ‘엄마도 이따위 딸 낳고 하나도 안 좋았을 거면서 왜 자꾸 결혼해서 애 낳으라고 하냐’며 꼬라지(!)를 부릴 때 엄마가 “나는 좋았다 왜! 계속 좋았는데 왜!!” 하고 소리 지르는 장면이었다. 상처 입히려고 한 말이고 엄마는 상처 입어서 울화를 터뜨렸는데 본의 아니게 너무 진심이 튀어나온 것이다. 너라는 딸을 낳아서 너무 좋았고, 지금도 좋다고. 이런 엄마, 이런 가족을 가진 것은 분명 수정의 특권이다.

하지만 이런 ‘특권’을 알아채고 죄책감을 갖거나, 혹은 감추어 혼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도울 연료로 사용하는 것이 이 ‘왕국’의 유일무이한 법칙이다. “죽여주는 동료들과 서로를 챙기며 미래로 가는 일만으로도 바쁜 인생” 탁수정이 머리털을 쥐어뜯고 아마도 방구석에서 몸부림에 가까운 댄스를 추며 이 책을 끝내 완성해주어서 고맙다. 타고난 기획자이자 얼리어답터로서 “이미 이런 책이 나와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데 나 따위의 삶을 써서 뭐 하지”라는 생각에 괴로웠을 것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당신의 책은 이렇게 나왔고, 우리에게 도착했다. ‘이런 책’이 아니라 ‘하나뿐인 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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