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대신 라면 - 밥상 앞에선 오늘의 슬픔을 잊을 수 있지
원도 지음 / 빅피시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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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 들어 읽었던 책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에서 원도 작가를 처음 접했다. 좋은 기억이 있었기에 이번 책도 기대감 가득 담은 채 읽어 나갔다. 처음도 음식 얘기였고, 이번 역시 푸드에세이니 내가 지나칠 수 없는 소재 중 하나는 '음식'인가 보다.

매일 하는 생각 중 한 가지도 '오늘 뭐 먹지?'이다. 하루 한 번만 고민하면 그나마 다행인 것. 가정을 꾸리고 딸린 자식들이 있다 보니 대충 넘어갈 수도 없는 고민이 항상 먹고 사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배고픔만을 채울 영혼 없는 음식 말고, 어떤 걸 먹더라도 그 음식에 얽힌 기억과 추억, 같은 음식에서도 무궁무진한 조리법, 음식으로 유발되는 철학적인 사유까지. 흔히 볼 수 있어 낯설지 않은 음식들에 첨가된 다양한 이야기들이 읽는 재미를 붙든다.

많은 챕터 중 조개전골은 살짝 낯설었는데 읽는 내내 얼마나 침이 꼴깍 넘어 가던지. 말만 들어도 내 소울푸드가 될 자질이 충분한 음식 같단 말이지.

시작이 밍숭맹숭하다고 섣불리 양념을 치지 말고 차분히 인내하자. 곧 입을 벌릴 조개 사이로 맛있는 육수가 흘러나올 테니. (p.57)

음식 하나를 앞에 두고도 이렇게 철학적인 사유를 하는 사람의 머릿속이 궁금해진다. 작가는 하나의 음식에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조리법을 다양하게 펼치는 셰프들의 능력을 부러워하기도 했는데 내가 딱 그 짝이다. 덕분에 나도 잊지 못할 나만의 음식이 있는지 고민해본다. 뭐가 됐든 배가 든든해야 근심도 조금은 누그러지고, 도저히 찾을 수 없던 기운도 슬그머니 돋아나는 게 느껴지니 이젠 정말 대충 먹을 수도 없단 말이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추워질 때가 많이 지난 것도 같지만). 몸도 마음도 잘 챙겨야 하니 [눈물 대신 라면] 첫 챕터의 주인공 '미역국'으로 내일 아침을 단단하게 시작해볼까 한다. 메뉴를 정한 것만으로도 왠지 기운이 좀 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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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시작이 밍숭맹숭하다고 섣불리 양념을 치지 말고 차분히 인내하자. 곧 입을 벌릴 조개 사이로 맛있는 육수가 흘러나올 테니.

🔖139. 대화하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나. 나와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생각. 이 사람과는 아무리 많은 시간을 쌓아도 이야기가 걷돌기만 할 뿐 영혼이 가까워질 순 없겠다는 판단. 이렇게 '내 사람'이 되지 못할 바엔 체력을 아껴야겠다는 계산만 부쩍 빨라진다.

🔖169. 최선을 다한다고 영원할 수 없는 게 사랑이고 관계임을 알지만, 나는 언제나 그 모든 것들이 영원할 거라 철석같이 믿었다. 부서질 걸 알면서도 과감하게 뛰어드는 대신 영원히 부서지지 않으리라 믿으며 태평하게 구는 건 얼마나 한심한 일이었던가.

🔖201. 1만 1천 원어치가 나에게 적당하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 나는 온갖 재료를 쑤셔 넣어왔다. 맞지 않는 자리임에도 꾸역꾸역 참석해서 뒤탈을 만들었고, 결이 다른 사람이었음에도 인내했다. 지지부진한 처지에 그놈의 인맥이 대체 뭐라고! 좋아하지도 않는 재료들끼리 한데 넣고 팔팔 끓였다 얼얼한 매움에 눈물만 쏙 뺐을 뿐, 결국 남는 건 행복한 포만감이 아닌 복통이었다.

#원도 #눈물대신라면 #빅피시 @bigfish_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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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있는 집의 질문들 - 돈 걱정, 사교육 고민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부너미 지음 / 어떤책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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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6학년 딸, 4학년 아들을 두고 있다. 사실 나는 책 읽는 것도 좋아하고 아이들과 여전히 대화도 많으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나름 공부도 제법 했고 평범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라 지금의 내 가정도 큰 탈 없이 잘 꾸려 가고 있었기에(그렇다고 혼자 생각했기에) 나는 나의 고정관념이 이렇게나 케케묵었는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기본적인 개념,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균열을 내는 책은, 참... 날 양가감정에 들게 하는데 그래도 긍정의 쪽으로 큰 점수를 준다. 이렇게나 배울 게 많은 세상!!

부제 '돈 걱정, 사교육 걱정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날 솔깃하게 만들었다. 사실 한참 돈 걱정, 사교육 걱정을 할 때(이미 주변에 비해 고민 시기가 많이 늦었다🥲)이지 않은가. 힘들고 고달픈 육아의 세계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고 아이와 함께 하며 더 찬란할 미래를 위해 고민해야할 다양한 주제들을 끌어와 다양한 인물들이 조목조목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이때까지 알고 있던 진실이 정말 누구에게나 적합한 정답이 될 수 있는지 묻는다. 과연 그것만이 정답일까?

모든 주제가 빠질 것 없이 탄탄했고 정말 많은 생각을 하며 나와 내 자식들을 돌아본 시간을 가졌다. 이런 책이 더 많이 많이 출간되어 육아를 하는 모든 사람들이 읽고 작은 변화를 깨닫고 실행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양한 주제들로 정말 풍성히 꾸려진 책이었지만 어떤 주제들은 짧게 끝나는 게 아쉬워 더 긴 버전의 새로운 글들이 출간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서로 고민하고 노력하는 만큼 우리 가정의 모습이 더 좋은 방향으로 달라질 거라 믿는다. 나름 매우 건강하고 밝은 가정이라 자부했지만 이 책이 큰 도움이 됐다. 특히 사춘기를 앞두고 있는 시점의 자녀가 있다면 필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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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 질문을 오래 붙들고, 곱씹고, 고쳐 쓰는 과정은 "어쩔 수 없다"는 말에 균열을 내는 일이었고,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을 단단하게 만드는 시간이었습니다.

🔖139.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더 가치 있고, 경제력이 곧 권력이라는 공식은 이미 어린이들의 머릿속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어린이들 사이에서 가난에 대한 혐오로 작동한다.

🔖159. 편법, 투기, 불법적인 방식으로 돈을 벌어도 '돈만 많이 벌면 성공'이라는 인식이 팽배하고, 반대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해도 '돈을 많이 벌지 못하면 무능하다'는 낙인이 찍히는 사회 속에서 우리 집에서 만큼은 사람의 삶과 존엄을 지켜내는 대화를 아이들과 더 자주 나누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돈의 많고 적음보다 중요한 것은 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선택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어도 누군가 다친다면 버튼을 누르지 않겠다"라고 주저없이 말하는 아이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 그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하며 곁에서 함께 걸어주는 어른들이 많아진다면 '돈이면 다 된다'는 믿음은 서서히 힘을 잃을 것이다.

🔖196. 서로의 접점을 찾으려면 끊임없이 서로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다름을 보고 문제라고 지적하기 이전에 왜 다름이 문제인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왜 어떤 것은 당연하고 어떤 것은 안 되는지 아이들과 함께 질문을 던지는 양육자가 되고 싶다. 사회의 강요가 있을지라도 자신을 지지해 주는 이가 있다면 비록 상처받을지라도 세상을 보는 아이의 눈은 넓어지고 내면은 단단해질 것이다.

🔖318.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사회와 가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어떻게 살아갈지, 누구와 살아갈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는 데 아주 깊은 영향을 미친다. 누구도, 심지어 부모조차도 자식이 스스로 생각해 내린 결정을 제멋대로 휘두를 순 없다. 아이에게는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사회 방식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

#부너미 #아이가있는집의질문들 #어떤책 @acertain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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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단단한 하루 - 누드 사철 제본
지수 지음 / 샘터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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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고 난 소감은 "앗! 벌써 끝이라고?"였다. 아쉽다, 아쉬워. 책이 끝나가는 게 아쉬운데 빠져 읽다 보니 마지막 장이었지 뭐냐.

'귀여운 건 무적이다'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집 막둥이의 토실토실한 귀여움을 보면 가끔 복장이 터지다가도 마음이 사르르 녹고 만다. 언제까지 귀여우려나? 귀여움은 나를 무장해제 시킨다.

우리집 막둥이 같은 책, [오늘도 단단한 하루]에는 귀여움이 덕지덕지 묻어난다. 반복되는 일상, 지친 하루 끝에 손에 쥔 이 책은 사실 귀여움만으로도 날 웃음 짓게 했으니 제 몫을 충실히 이행한 셈이다. 귀여움만 있다면 기억에서 쉽게 휘발될 수 있지만 작고 단단한 이 책은 모두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 있다. 일상 속 누구나 느끼는 감정들을 다룬 책이라 흔하면서도 특별했던.

이 책만의 특별함은 작가의 마음가짐이 오롯이 독자에게 전달된다는 점이다. 작가는 자기 자신과 매우 단단하고 튼실한 관계를 나누고 있는 듯하다. 지친 타인에게 건네는 진부한 말들이 위로가 되지 않는 건 진정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음성으로만 헛도는 메아리일 때가 많아서 그렇다. 이 책의 작가는 자신의 겪은 경험을 곱씹어 긍정적으로 체화한 후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전한다. 글에서 온기가 느껴지고, 온기로 인해 내 마음의 묵은 고민들도 잠깐은 위로받았다고 여겨졌다. 거기에 귀여운 김토끼 캐릭터까지 덧입혀졌으니 일석삼조.

어떻게 매일매일을 완벽하게 보내겠느냐 이 말이다. 가끔은 쉬어가기도, 드러눕기도 하면서 높은 곳에 있는 성취만을 바라보지 말고 눈 앞의 루틴, 사소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상에서의 건강한 습관들로 나를 잘 다독여보자 싶었다. '혼자 있는 시간도 관계(p.192)'라는 말이 주는 울림이 컸다. 혼자인 시간을 외롭지 않게, 나와의 관계를 잘 정립해보는 시간이라 여기면 그 어떤 시간도 충만할 것 같은데. 나 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벌써 설렌단 말야? ☺️ 지치고 힘들 땐 정말 이런 책이 크나큰 위안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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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이제는 그 전조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머리가 무겁고, 눈이 건조하고, 말이 짧아지고, 속으로 "아무것도 하기 싫어"가 맴돌기 시작하면 눕는다. 망설이지 않고, 눕는다. 잘 쉬는 사람이 오래 간다. 회복은 행동이 아니라 멈춤에서 시작된다.

🔖98.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른다고 했던가. 몇 년 뒤, 또 무언가를 잃고 나면 지금 이 순간도 아주 찬란하고 예뻤다는 걸 깨닫게 되겠지. 잃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소중한 걸 가졌었는지 알게 된다.

🔖176. 예민함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예민함을 적으로 두지 않는다. 나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감각'이라고 여긴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삶을 조용히 설계하고 있다는 것. 그게 예민한 나의 자랑이다.

🔖192. 이렇게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 나는 나를 다시 배운다. 혼자 있는 시간도 분명한 관계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 가장 가까이 함께할 사람은 결국 나니까. 이 관계를 소중히 여길수록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덜 흔들리고, 덜 아파진다. 이건 외로움이 아니라 친밀함이다. 혼자지만, 혼자가 아니다.

🔖239. 삶의 시기마다 내 우선순위는 달라질 수 있고, 나는 또 달라질 수 있다. 적어도 무엇 하나가 전부인 것처럼 살지는 말자. 삶은 언제든 다른 모양으로 흐를 수 있어.

#지수 #오늘도단단한하루 #샘터 #샘터사 @isamt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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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
클레어 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반타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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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악 재미있다!!! 휴. 주인공과 함께 800년이 넘는 시간을 쉼 없이 달리다 보니 이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가 있네. 약간 조급하고 긴장되면서 불안이 덕지덕지 묻어 났던 시간이었다.

우리의 주인공은 태어나고, 살고, 죽고, 또 다시 태어나고를 반복하는 인생을 산다. 대신 매번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항상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에 다른 시간여행자나 환생하는 인간들과는 다르게 늘 같은 시간대를 살아야 하는 한계의 고통이 굉장히 크게 다가온다.

죽은 뒤 모든 기억을 안은 채 다시 두번 째 같은 삶으로 태어났을 땐 제정신으로 살기 어려운 걸 모두가 상상할 수 있듯이 일곱 살 때 정신병(남들이 보기에)으로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또 다시 태어나게 되면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새 삶의 모색을 꾀한다. 나라면? 이전 삶에서 아슬아슬하게 놓쳤던 선택의 순간에서 미처 뽑히지 않고 버려두었던 삶을 다시 살아보려나. 글쎄, 그것도 한두 번이지 무한 반복되는 같은 시대의 삶이라면... 그건 축복보다는 저주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주인공 해리 오거스트와 동일한 불멸의 삶은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저렇게 모여 '크로노스 클럽'을 결성, 자신들의 안위와 세계 평화를 위해 규칙을 만들며 나름 협응하는 생활을 한다. 하지만 항상 예외는 있는 법, 불멸의 삶을 이용해 인류의 미래 자체를 바꾸려는 자, 빈센트 랜키스가 어디에서나 등장하고 해리는 천하는 숙적으로 빈센트를 막으려 한다. 여러 번의 생애 동안!

그 과정이 생생하면서도 더디고, 더디면서도 눈 깜짝할 새라서 도통 앞일을 종잡을 수가 없어 중후반부부터는 쉴 새 없이 그들과 함께 여정을 달렸다. '망각', 혹은 '필멸의 삶'으로 존재 자체를 없애는 싸움에서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이냐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숨막히는 전쟁이다, 증말. 해리나 빈센트나 보통 아니야... 그도 그럴 것이 800년 이상을 살면 척!하면 착!하고 뻔히 보일 테니 그들의 피 튀기는 두뇌 싸움은 독자들을 도파민 파티로 이끌어 준다 이 말이야.

결말에서 안도감을 느끼고 무척 뿌듯해했던 것도 찰나, 이러면 우리 주인공 해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또 다시 열여섯 번째의 삶을 살아야 되는 건가? 나는 좋았던 것도 잠시, 한편으론 안쓰럽고 착잡한 마음이 좀 더 컸던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일엔, 어쩌면 끝이 있기에 아름답고 소중해지는 것 같다는 진부한 말을 끄집어 올 수밖에 없다. 재미있었다는 얘기다. 이렇게 할 말이 궁시렁궁시렁 많아지는 이야기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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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세 번째 생애에서 그 죽음은 선로에 묶인 사람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기차처럼 찾아왔지. 불가피하고 막을 수 없는 사태를, 멀리서부터 예감하며 밤마다 상상했어. 내게는 실제 죽음보다더 끔찍한 일이었는지도 몰라.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기에, 막상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자 차라리 안도감이 들었어. 기대가 종결된 셈이니까.

🔖140. 우리에게 죽음은 전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공포는 재탄생에 있다. 재탄생, 그리고 몸이 아무리 갱생해도 정신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

🔖287. 정말로 성공적인 위협의 요체는 언성을 높이거나 욕설을 하는 게 아니라, 때가 되면 대사 고함을 쳐줄 배후의 무리가 있다는 걸 듣는 상대에게 확실히 각인시키는 고요한 자신감을 기르는 데 있다.

#클레어노스 #해리오거스트의열다섯번째삶 #오팬하우스 @ofanhouse.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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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의 도시
연여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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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을 읽고 작가의 이름이 마음에 새겨지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부적격자의 차트]의 연여름 작가 역시 그랬다. 가상의 세계를 이야기하면서도 어쩐지 낯설지 않은, 담담하면서도 아련한 느낌을 주는 문체에 쏙 빠졌었던 것 같다. 기대감으로 이번 책을 들었다. 지난번 보다 훨씬 더 광활하면서도 체계적인 배경과 탄탄한 구성에 초반부터 몰입하여 읽기 시작했다.

먼 훗 날, 극심한 토양 오염이 휘몰아친 후 뿔이 자라는 인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뿔은 타인에게 어떠한 피해도 없고, 전염성도 없음이 확인된 후 그렇게 각인(角人)과 비각인이 함께 사는 세상이 도래한다.

각인은 뿔이 자랄 때 극심한 통증을 겪게 되고 야생 사망에서 자라는 흑각을 섭취하면 그나마 통증을 줄일 수 있다. 각인에게 흑각은 필수품이 되지만 공중도시 라뎀에서는 흑각의 불법 채취를 금지하며 공중도시의 흑각만을 유통하려 한다. 태어날 때부터 지상 그늘에서 자라온 '시진'은 비각인으로 면역인이지만, 각인인 누나 '유진'의 고통을 보며 자라왔기에 누나를 위해 그늘에서 야생 흑각을 불법으로 채취하며 근근히 살아간다. 각인과 비각인의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누나 유진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지도 7년. 절친했던 친구 '베르트' 마저 각인 혐오자에게 살해당한 소식을 들은 시진은 베르트의 행적을 뒤쫓게 된다.

차별과 혐오, 계급이 나뉜 사회에서도 끝끝내 지켜야만 하는 가치에 대해 되새겨 보는 시간이었다. 소설의 배경은 가상 현실, 혹은 도래하지 않은 먼 미래 이야기지만 연여름의 글이 낯설지 않은 건 언제나 '인간' 자체를 들여다 보기 때문 아닐까.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지 못하는 세상이라면 그 어떤 세계든 멸절되고 말 것이다. 연여름 작가의 이야기 속 주인공은 어쨌든 지켜낼 세상에 대한 의지가 있고 변화에 앞서 타인을 먼저 떠올릴 줄 아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메마른 내 상상력과, 상실을 거듭하는 내 인류애에 다정한 온기 한 방울 머금게 되는 글이랄까.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세계를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새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눈앞에 두고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시진의 마음을 나는 알 것도 같았다. 어쩌면 누군가는 바보 같은 짓이고, 후회할 짓이며, 생산성이나 실용성이 전혀 없는 선택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그 멈칫하는 마음에 깃든 이타심을 본다. 세상이 실용만으로 돌아갈 리가 있나. 그 바깥의 온기에 집중하고 싶다. 이 이야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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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샐은 늘 누군가의 사정이나 이야기에 먼저 귀를 기울였다. 처음엔 그저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경청이라는 외피를 두른 능동적 침묵이었다는 것을 시진도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알 수 있었다.

🔖74. 너는 나를 이해하는 게 아니야. 연민하는 거지.

🔖115. 데인이 그토록 열정적으로 뿔을 연구한 이유는 다름 아닌 각인의 정체성을 더욱 깨끗이 부정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이 모순적이긴 했다. 두 번 다시 지상에 발 들이지 않고, 이 뿔을 그 어떤 타인에게도 드러내지 않으며, 그야말로 투명하게 천국의 천사로 지내려는 계획을 위해서였으니까.

🔖148. 하지만 그렇게 하나둘 자기를 숨기는 일이 결국, 다른 각인들의 삶을 지우는 출발점이 되기도 해.

🔖196. 원래 한번 비어버린 자리는, 지키는 사람이 없으면 금방 허물어지고 마는 거야.

#연여름 #각의도시 #문학과지성사 @moonji_books
#연여름장편소설 #각의도시_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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