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격자의 차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6
연여름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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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2년, 다섯 번의 세계 대전이 지나고 거의 100프로 치사율을 가진 리누트 바이러스가 횡행해 말 그대로 인류 멸종을 앞두고 있는 어떤 미래의 이야기.

없어진 줄 알았던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인간과 인공지능은 함께 생존을 모색한다. 인공지능 모세는 그저 중재자의 역할로 모두가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고 인간들은 실무자가 되어 생존을 이어간다.

/ 이들은 죽음을 부르짖는 동시에 생존을 갈망했다. 두무리로 갈라진 채에도 그랬지만 한 사람의 내부에서도 두 의지가 충돌했다. 죽음과 안식을 동일시하기도 하며, 생존을 두려워하면서도 희망했다. 인공지능에겐 모순의 연쇄였다. (p.24)

인공지능이 생각한 인간의 이런 모순적인 면은 생존에 치명적인 위험이라 판단하고 모순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 자체를 철저히 제한한다.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으로 중요했던 인간들 역시 중재자 모세를 따르며 잃어도 상관없을 많은 것들을 버리는 삶을 이어간다.

상상은 그 자체로 허구일 테니 금지되고, 꿈을 꾸는 것조차 병증으로 치부되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며, 여러 감정은 오류로 판단되어 결격 사유가 되는 곳. 결점이 7번 누적되면 부적격 판단으로 영원히 소거되는 곳이 배경이다. 9세대까지 이어지던 생존의 찰나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세인은 레드를 만나 생존 가능성이 없는 돔 밖에서 사람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40세를 코앞에 둔 세인의 기록은 무결점. 결점 하나 쌓지 않고 완벽한 실무를 성실하게 맡던 세인의 감정은 흔들린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 못한 비밀을 안고 있던 세인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합리와 실용에 대해서 생각했다. 중재도시에서의 합리란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그저 생존만을 위한 삶이다. 주변 사람들과 감정을 나누고, 실패해도 매사에 선택하며, 꿈과 사랑을 나누고, 호기심을 가지고 나아가는 삶을 원하는 인간은 불합리하고 부적격자로 여겨진다. 밑줄 그어야 했던 문장이 넘쳐났고 한 단어, 한 문장 꼼꼼하게 읽고 싶고, 읽어야만 했던 소설이었다. 생존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존만을 위한 삶을 읽고 느껴본 소감은 매우 착잡하고 괴로웠다. 이야기가 없고 호기심과 희망이 없는 세상이라니 꿈에서조차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점점 더 스마트해지고, 편리함과 실용성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하는 지금의 순간에도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것이 무조건 좋은 것, 옳은 것이라는 판단을 유예하게 된다. 내 인생은 군더더기가 잔뜩 낀 모순 덩어리일지라도 꿈꾸고 희망하고 소통하며 부딪히고 흔들려도 주체적으로 나아가는 인생이고 싶다. 여운이 길어 책을 다 읽고 3일 동안 다른 책을 손에 들지 못했다. 쉽사리 이 책 저 책 이동하지 못하는 게 내 단점일 수 있지만 계속 곱씹을 수 있는 책을 만났다는 것이니 당분간 이 기분을 즐기고 싶다❣️

+ 현대문학 핀 장르 시리즈 나에게 완전 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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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어떻게든 하루라도 더 생명을 연장해나갈 것인가, 예정된 고통을 조금이라도 빨리 끝낼 것인가. 무엇이 더 인간적인가.

🔖154. 돔이 허락한 둥근 경계가 없는, 시작도 끝도 없는 검은 밤. 검디검은, 모두가 꿈을 꾸어도 좋을 시간이. 그 속으로 걸어 나갈 시간이었다. 허구이자 곧 진실인 그곳으로.

🔖173. 인생의 반환점이 아닐까 싶은 해에 예전엔 인류의 기대 수명이 어땠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세계 평균이 40세에 못 미쳤다는 결과를 보았다. 100년 전이었다면 나는 이미 고인일 가능성이 컸다. 어쩐지 그 순간 마지막 장사를 마치고 마감까지 끝낸 다음 어두컴컴한 가게에 홀로 앉아 있는 주인장이 된 기분이 들었다. 자, 오늘로 전부 끝. 내일은 없음. 그리고 그 주인장은 이런 질문을 한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중요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이 시점에도 변함없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연여름 #부적격자의차트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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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의 위기 돌파 경영 전략 - 세계 최대 스포츠 브랜드, 디지털 전환의 기록
시라쓰치 다카시 지음, 박유미 옮김 / 현익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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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마케팅의 전환으로 혁신적인 성공을 이끌어낸 나이키의 경영 전략을 알 수 있는 책. 사실 이 세상에 '나이키'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명실공히 최대의 기업으로 손꼽히는 회사다.

사실 나도 올해에는 자영업자의 삶으로 걸어 들어갈 계획이라 최근에는 마케팅 서적에 대한 관심도도 높아졌다. 신발 파는 회사의 경영 전략이 작은 숙박업을 운영할 사람에게 어떤 도움이 되겠냐마는 책을 읽으며 느끼고 깨달은 점이 엄청 많았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혔고 게다가 유익했다. 회사를 이끌어가는 사람뿐 아니라 개인의 성장이나 일상, 여러 관계 속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이라 확신한다.

나이키를 소비자의 뇌리에 각인시켜왔던 여러 광고나 과감한 위기 돌파 전략은 눈물 찔끔, 소름이 돋기도 했다. 거시적으로는 신발 파는 회사임에 분명한 나이키는, 신발 파는 회사, 그 단어만으로는 부족한 거대한 힘이 느껴진다.

나이키 광고에서는 제품에 대해 절대 언급하지 않습니다. 나이키의 에어솔이 리복의 에어솔보다 뛰어난 이유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나이키는 무엇을 말할까요? 그들은 위대한 운동선수들을 칭송하며 위대한 운동경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이키이고, 나이키가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p.99)

위험 리스크가 있지만 확고한 신념으로 위기를 이겨나간 비법은 스포츠 그 자체로 자리잡은 듯한 나이키의 위상을 높여준 마케팅 방식에 있다고 여겨진다. 스티브 잡스까지도 홀딱 반하게 만든 나이키의 몇몇 광고는 언제 어느때 접해도 소비자의 가슴에 공감을 이끌어내는 천재적인 면모가 보인다.

코로나 시국을 지나 완벽히 자리잡은 디지털 마케팅은 이제 실현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시장이라 할 수 있겠지만 책 마무리 부분에서 작가는 이야기한다. 디지털 마케팅 역시 전통적인 마케팅 기반을 무시하고서는 절대 성장할 수 없다고. 항상 준비된 자세로 현재에 임하며 위기가 와도 탄탄한 준비성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는 힘. 우수한 기본 마케팅에서 디지털 마케팅의 전략까지 비약적으로 합세하여 성장의 동력이 된다는 말에 큰 공감을 했다. 그 저력을 알고 싶은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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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과거에 성공했던 방법을 계속 고수하면 미래는 반드시 실패한다.

🔖44.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마케팅이 조직 전체를 연결한다는 사실입니다. 제품 자체의 디자인이나 기능은 마케팅 프로세스 전체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예전에 우리는 모든 것이 연구실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이 소비자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기술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혁신은 소비자의 지지를 받아야 가능해집니다. 우리는 특정한 이유로 혁신을 일으킬 필요가 있으며, 그 이유는 시장에서 비롯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술관에 전시할 작품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214. 감정을 자극하는 브랜드는 고객이 선호하는 행동을 촉진시킬 수 있다. 이러한 브랜드는 감정에 호소하는 메시지를 통해, 고객과 감정적인 수준에서 연결을 구축한다.

🔖250. 디지털 마케팅은 전통적인 마케팅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디지털 전환을 도입하기만 해도 매출이 비약적으로 향상된다는 착각을 바로잡는 말로 중요한 지적입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우수한 전통적 마케팅 이 있어야 디지털 마케팅이 비약적으로 작동해서 기업 성장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라쓰치다카시 #나이키의위기돌파경영전략 #현익출판 #디지털전환 #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 #DX #나이키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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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작은 것들로 - 장영희 문장들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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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말했던가. 사랑받는 자는 용감하다고. 사랑받은 기억만으로도 용감할 수 있다고.(p.113)

사랑의 힘에 대해서 작고 반짝이는 문장들을 써 온 장영희 교수의 문장집. 연말이 되면 한 해를 돌아보며 나와 내 주의의 관계들을 진중하게 생각하게 된다. 이런 연말에 무척 잘 어울리는 책을 만났다.

살면서 쉬이 스치기 쉬운 모든 것들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지닌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건 순간순간이 반짝이는 듯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나도 사실 알고 있었던 관계의 소중함, 내 마음의 선함을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점차 무뎌지는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음에도 어찌할 도리를 몰랐던 내가, 아니 어쩌면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애쓸 노력조차 해보지 않았던 나의 시간들이 조금은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어릴 적 소아마비로 평생 두 다리의 자유를 잃고, 여러 차례 발생한 암으로 투병 중에도 삶의 희망과 용기를 노래한 장영희 교수의 글들을 읽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불행이 한꺼번에 밀려와 캄캄하고 막막한 인생에서도 살아만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그녀의 말이 내 가슴 속에서 절절하게 쿵쾅거린다.

새로운 해를 앞둔 지금, 나도 그녀처럼 운명도 바꿀 수 있는 희망의 힘을 굳건히 믿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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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 어떤 고통이 우리의 생을 할지라도, 고통은 끝내 사라지고 사랑은 남는다.

🔖31.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내 마음이 이제는 차돌같이 굳어 아무런 틈새가 없는 줄 알았는데 웬걸, 문득 휑한 바람 한 줄기가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아, 가을이구나.

🔖53. 결국 이 세상을 지탱하는 힘은 인간의 패기도, 열정도, 용기도 아니고 인간의 '선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13. 누가 말했던가. 사랑받는 자는 용감하다고. 사랑받은 기억만으로도 용감할 수 있다고.

🔖173. 희망의 힘이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듯이 분명 희망은 운명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라고. 그래서 난 여전히 그 위대한 힘을 믿고 누가 뭐래도 희망을 크게 말하며 새봄을 기다린다.


#장영희 #삶은작은것들로 #샘터 #샘터사
#에세이 #수필 #문장집 #위로 #살아온기적살아갈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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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시렁 - 등산이 싫은 사람들의 마운틴 클럽
윤성중 지음 / 안온북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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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책 제목 이게 뭐야? ㅋㅋ 제목때문에 더 이끌렸던 책이다. 일단 등산 얘기인 건 확실하겠고 도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까지 싫은지 이야기도 듣고 싶기도 하고.

사실 나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다시 내려올 거면서 뭣하러 그렇게 힘들게 꾸역꾸역 산을 올라가겠다고 하는 거냐고요. 그 마음이 바뀐 건 코로나 19 시기부터다. 사람은 피해야 하고 집에만 있기는 싫고 어쩌나 고민하다가 그때 당시 막 8살과 6살이 되었던 내 아이들과 거제의 산 곳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거제 특성상 어떤 산에 올라도 바다가 펼쳐지고 힘들게 오른 만큼 정상에서 느끼는 풍경은 진짜! 말잇못. 일단 한번 가보셔라구. 가보시고 다시 얘기하자 이거야. 거제의 산은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딱 한 번만 가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 그렇게 산의 매력에 퐁당 빠지게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초딩이들 둘을 키우는 학부모라 온전히 산을 느낄 충분한 시간이 넉넉하게 주어지진 않았다.

전국의 산을 종횡무진 다니며 감각적이고 위트있는 기사를 써온 《월간 산》의 기자 윤성중의 책!! 기사도 쓸 겸, 산의 매력에 입수시킬 겸 등산이 싫다는 사람을 끄집고 여차저차 산에 가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천천히는 무적'이라는 마음으로 지치지 않게, 시작부터 산에 정 떨어지지 않게 천천히 그들에게 발 맞춰 길을 이끌어주는 윤성중 대장의 배려와 유머감각에 키득키득이 부지기수. 아무나 맛볼 수 없는 개운함과 성취감, 말로 다 못할 풍경을 직접 본 그들은 역시 다음 산을 또 찾게 된다.

나도 여러 사람 끌고 다녀본 경험이 있는지라! 사람들의 반응을 안다. 물론 여전히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에 맛을 들인다. 정직하게 땀 흘린 후의 상쾌한 기분은 한 번만 맛보기엔 강렬한 기억으로 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을 이끌고 감에는 예기치 못한 어려움도 있고 특히나 속도가 맞지 않는 경우에는 서로의 배려 없이는 너도나도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도 종종 생기는데 내 곁에 윤성중 기자처럼 배려 넘치고 쉴 새 없이 이야기를 걸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한 산행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물론 윤성중 기자와 함께라면 다리보다 입이 더 아플 것 같다. 쉬지 않는 기자 정신!!!ㅋㅋㅋ 질문 공세에 답하다 보면 금세 정상에 와있을 것 같은데?

다른 지역의 산은 아직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지만 아이들이 더 크고 좀더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진다면 전국 곳곳의 많은 산들을 다녀보고 싶다. 그나저나 국내 최상급 난이도의 트레일러닝으로 유명한 《거제 100K》 언급이 몇 번 있어서 잔뜩 기대하며 읽었는데 참가 여부 어떻게 된 건가요? 궁금해. 24년 거제 100K는 기상악화로 대회 중단 이슈가 있어서 글로 못 쓰신 건지. 거제 100K에 대한 내용을 읽으며 가슴 콩닥거리던 설렘 역시 잊을 수없다. 다음 이야기도 기다리고 있을게요. 기자님! :-)

덧. 그간 내가 다닌 거제의 산 사진도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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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멀리서 보면 어려워 보이는데, 가까이 가서 보면 길이 있어요. 천천히 가면 됩니다. 천천히는 무적이에요!

🔖93. 인간은 커다란 컴퓨터다. '경험'은 키보드 자판을 두드려 머릿속에 뭔가를 입력하는 행위와 같다. 생애 처음 산 정상에 오르는 건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일, 그 굉장한 경험이 그녀 머릿속에 입력된다면 나중에 어떤 것이 출력될까? 나는 그것이 기대됐다.

🔖170. 제가 느리게 보이는 건 당신의 기준인 것 같은데, 그러는 당신은 왜 그리 급한건가요? 그렇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나요? 뭔가가 당신을 잡아먹으려고 쫓아오나요?

#윤성중 #등산시렁 #안온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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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의 온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4
정다연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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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강렬하게 느끼도록 만들어준 책. 너무도 빠르고 간편해진 서로의 안부를 묻는 행위가, 어쩌면 편해진 만큼의 여운을 빼앗은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펜을 들고 고뇌하며 고르고 고른 단어들을 써내려 가고 곱게 담은 그 마음을 우편으로 부쳐 며칠에 걸려 소식을 전할 수 있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스마트한 세상에서도, 여기저기 넘치는 안부 인사에도 어쩐지 외로움은 더 깊어지지 않았나 싶다.

작가는 주변의 모든 것에 따스한 시선을 품고 그 시선을 그저 흘려 보내지 않고 품고 보듬어서 그 마음을 전달할 줄 아는 사람이라 느껴진다. 시인의 시선엔 이렇게 온기가 가득한 걸까. 늘 곁에 있어 당연하게 느끼기 쉬운 사람들과 장소, 물건들에까지 다정한 눈길을 주는 일은 쉬워 보이는 한편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치는 순간들이 매번 오더라도 사소하고 작은 것들에게서 받는 애정의 힘으로 오늘을 살아낸다. 가끔 못나고 추레한 내 모습일지라도 온전히 나이기 때문에, 나로 존재하는 모든 시간들에 순순히 감사하게 될 그날을 위해 매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그 마음을 배워간다.

다정하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다. 왜 그럴까 고민해보게 되는 것만으로 가치있는 책이다. 조금 더 다정해지고 싶다. 나를 내세우고 남들을 짓눌러 우위에 서는 강인함이 아니라 타인을 부드럽게 포용하고 녹아들게 하는 힘은 진정 다정함에 있는 것이리라. 내 온도를 가늠해보며 아직은 터무니 없는 미적지근함이지만 이 책을 읽으며 조금 더 따뜻해질 나를 상상하며 꿈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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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어떤 사건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끔 반드시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니까. 사물이나 사람이나 지워지지 않는 흔적 하나 없이 깨끗할 수 있다는 게 오히려 나에겐 더 이상하게 다가온다. 삶은 유리컵을 엎지르고 싶지 않아도 엎지르게 되는 일처럼 통제할 수 없으니.

🔖139. 나는 일곱 번째 문진을 구매한 뒤로는 새로운 문진을 들이지는 않았다. 마음이 식었다기보다는 어떤 사물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려는 태도가 어느 순간부터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이미 가진 사물을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아껴주는 방향으로 중심을 옮겨가고 싶었다.

🔖166. 네가 제주에서 만난 사람들은 자신이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명확히 아는 것 같았어. 앞으로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게 살고 싶은지는 알고 있는 거지. 무엇을 지키고 싶은지, 무엇을 포기할 수 없는지의 방향만큼은.

🔖185. 벚꽃이 언제 피고 지는지, 어떻게 날씨가 변하고 있는지, 그 영향으로 어떤 식물이 더는 씨앗을 품지 않는지 잘 지켜보지 않는다면 지켜낼 수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 나의 일상이 그 존재들 덕택에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야 그들이 서서히 사라지는 걸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테고,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설 테니 말이다.

🔖270. 어찌 되었든 나에겐 이날밖에 없다는 것. 내가 맞이한 오늘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없고 오로지 단 하루로 존재할 뿐이라는 것. 그 단상을 곱씹다가 어떤 페이지도 찢지 말자고 생각했다. 내 삶이 추하게 느껴지는 날에 대해 썼더라도, 숨기고 싶은 감정들이 맨얼굴처럼 드러나도 없애거나 버리지 말자고.

#정다연 #다정의온도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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