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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번트가든의 여자들 - 18세기 은밀한 베스트셀러에 박제된 뒷골목 여자들의 삶
핼리 루벤홀드 지음, 정지영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북트리거 / 2024년 9월
평점 :
1757년 영국 런던에서 출판된 한 권의 책이 있다. 이후 꾸준히 개정판을 내며 25만부의 판매고를 올렸던 책. 당대 가장 성공한 베스트 셀러이면서 동시에 가장 수치스러운 책은 바로 「해리스의 코번트가든 여자 리스트」이다. 18세기 매춘부들의 특기와 전공, 신상 명세를 기술해 놓은 책은 그 당시 사람들도 공공연히 들고 다닐 수는 없었나 보다.
이 책에서 다루는 가장 큰 이야기인「해리스 리스트」는 여성을 상품으로 취급한 남자들의 시선에서 기술된 책(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지만)이라 불쾌했던 게 사실이었다. 실제 「해리스 리스트」의 기술된 내용이 책 속에도 있어서 읽어볼 수 있게 되었지만 삼류 글쟁이가 쓴 매춘부들의 특징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흥미로웠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부정하지 못하겠다.
책의 저자 핼리 루벤홀드는 18세기 런던 뒷골목의 상황과 남성지배적인 사회의 모습을 면면에 드러내며 「해리스 리스트」가 출간된 이유와 출간에 얽혀 있는 잉글랜드 포주 대장 잭 해리스, 시인을 꿈꿨던 글쟁이 새뮤얼 데릭, 최고의 마담 샬럿 헤이즈 3인방의 이야기를 쫓는다.
열악한 당시의 상황에서 매춘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이야기는 철저히 지워지고 남성들의 평가와 조롱으로 그녀들의 삶이 좌지우지되는 현상이 가슴 아팠다. '그런 때도 있었다'는 관점으로 단지 역사의 한 부분에 대해서 담담히 써내려간 책은 누구를 비웃지도 않고 그렇다고 옹호하지도 않으며 그 당대의 현실을 나열한다. 불합리하고 억울했을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지금은 달라졌나?
"매춘을 둘러싼 환경과 매춘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여성들의 취약성을 두고 논쟁이 불붙었지만, 남성의 행동이나 사회적 인식이 악의 한 원인이라고 주장하거나 대담하게 매춘을 근절할 계획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p.243)"
매춘 근절을 외치던 시절이 왔을 때에도 악의 원인을 여성에게 찾던 시절.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동정의 대상이면서 조롱의 대상이고, 도와야 할 사람인 이면에 피해야 될 사람, 사회의 희생양이면서 오염원이었던 그녀들은 '여성' 그 자체로 그저 존재할 수 없었던(p.400) 현실을 읽으며 괜히 숙연해지는 마음도 들었다.
빛나고 찬란한 역사만 바라볼 순 없다. 분노하고 괴로워지더라도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 역시 가슴에 새겨야 더 나은 목적지로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각자의 살아온 모습과 각자의 이야기로 선택된 인생들이라 누구를 탓하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상황으로 비극을 맞았을 많은 사람들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어둡컴컴하고 씁쓸한 과거이지만 한편으로 지독하게 매력적인 책이었다.
덧.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는 거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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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해리스의 코번트 가든 여자리스트]는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다. 18세기 영국 사회의 변두리에서 목숨을 간신히 부지하던 사람들. 계층 사다리에 언제까지나 불안정하게 매달려 있고, 점잖은 사람들의 '정상적인' 집단으로의 입장을 절대로 허락받지 못할 사람들.
🔖396.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사실은, 『해리스 리스트』에 등장한 절대다수의 여자들에게 매춘은 스스로 선택했다기보다는 운명 지워진 길이었다는 점이다.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처녀성을 잃고 난 뒤에야 여자가 남자처럼 성욕을 알게 된다는 믿음이 남성의 자부심을 높여 주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처녀성을 잃게 되면, 실제 행동거지가 어떻든 간에 창녀로 취급되었다. 이런 판단에는 중간이 없다. 자발적으로 음탕한 행위에 동의했든, 강제로 당했든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다. 그 여자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으며, 성적 욕망에 눈을 떴을 뿐이었다. 세상은 이런 상황에 처한 여성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필요악이었던 매춘 외에는 어떤 좋은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았다.
#핼리루벤홀드 #코번트가든의여자들 #북트리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