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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개업
담자연 지음 / 한끼 / 2024년 7월
평점 :
이승과 저승 사이를 잇는 '환승'의 공간이 있다. 온통 사막인 곳에 우뚝 솟아 있는 신비한 국숫집. 운명이 꼬여 버린 산 자와 망자들의 영혼만이 국숫집을 방문할 수 있는데, 제 사장이 말아주는 국수 한 그릇 먹고 나면 꼬였던 일도 풀어져 영혼들이 제 갈 길을 갈 수 있다. 다시 이승이든, 저승이든.
스무 살 생일을 앞둔 채이는 갑자기 환승 세계에 떨어지게 되고 제 사장이 말아주는 국수를 먹고 다시 이승으로 돌아가려는데 채이의 '운명의 구슬'이 없다. 제 사장은 채이의 구슬을 찾아 꼭 이승으로 보내주기로 약속하고 채이의 구슬을 찾기 전까지 국숫집에서 시간을 보내라고 한다. 말 많고 활발한 채이와 이전의 기억은 물론 자신의 이름까지 모두 잊어버린 무뚝뚝한 제 사장과의 하루하루는 어떤 모습일까?!
사연 많은 국숫집의 손님들을 맞이하며 그들의 사연을 듣고 공감해주면서 채이 역시 자신의 조각난 기억들을 마주하게 되고 얽혀진 실타래를 차근히 풀어간다. 벌을 받고 있는 중이라는 제 사장 역시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국숫집을 벗어날 수 있는지 하루하루를 버티는 모습을 보며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태초의 생명과 십이지신, 인간의 등장으로 빚어진 비극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이야기가 자칫 무겁고 어려울 수 있을지 몰라도, 할머니가 전래 동화를 들려주듯 편안하고 이질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전달되어 재미있게 읽은 것 같다. 사막의 황량한 풍경과 이승과 저승, 가운데 문턱인 환승 세계의 신비로움, 동양의 판타지스러움이 몽땅 어우러진 맛깔난 소설이랄까.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의 연대와 공감의 힘. 온기가 느껴지는 푸근한 이야기 한 편 맛있게 먹은 기분. 진하고 뜨끈한 국수 한 그릇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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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인연이란 말이 영 거짓은 아니네만, 인연은 누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야. 가지고 태어난 실을 원하는 사람에게 묶으면 그게 인연인 게지. 묶는 것은 자유이나 어디에 묶을지, 얼마나 세게 묶슬지에 따라 관계의 모습도 달라질걸세. 그러니 실을 묶고 푸르고 잘라내는 것 역시천부 인간 스스로 해야 하네.
🔖155. 바닷가에서 노을을 보며 애인 손도 잡고 그랬죠. 효율성이라곤 없고 번거로운 일들이지만, 너와 함께 하니까 특별한 일이 된다고. 앞으로도 같이 비효율적이고 성가신 일상을 만들고 싶다고요.
🔖185. 어디서 봤는데 인생이 영화와 딱 하나 다른 점이 그거라고 하대요. 영화관에서는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항상 비상시 탈출 경로를 알려주잖아요. 그런데 우리 인생은 비상구 같은 게 없다는 거예요. 친구가 그러는데, 도망갈 길 같은 건 없대요. 슬픈 장면도 참고 봐야 하는 거죠.
🔖247. 사람은 운이 나쁘면 남 탓을 하지만, 결국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건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라는 거죠. 행복과 불행 중 어떤 걸 택할지는 온전히 나한테 달려 있다는 말이에요. 난 웬만하면 행복을 고르기로 했고, 행복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고 노력했어요. 사람들을 만나고 베풀고... 놀랍게도 내 마지막 모습은 외톨이가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해피엔딩으로 하려고요. 해피엔딩이 어떤 모습이라고 정해진 건 아니잖아요?
#담자연 #심장개업 #한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