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저녁의 연인들
서윤빈 지음 / 래빗홀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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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장기를 교체할 수 있는 미래 세상. 이론상으로 영생을 살 수 있다. 다만 장기 구독료를 낼 수 있는 사람에 한해서. 장기는 교체해야 하는 상황이 올수록 누진세가 붙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장기 구독을 하지 못하는 인간은 자연히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버디'의 등장으로 버디를 삽입한 인간 모두는 겪었던 모든 일을 기억한다. 주인공 "유온"은 피부 이식과 장기 임플란트 등으로 청년의 모습이지만 아마 실제 나이 100세는 된 '젊은 노인'이다. 모든 것을 기억해야만 하는 인간의 모습과 누진세를 감당하기 위해 조용히 발버둥치는 모습이 애잔했다. 유온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장기 임플란트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을 찾아 연인이 되어 주고 그의 마지막 순간을 외롭지 않게 함께 있어준 후 유산을 얻어 낸다. 그런 유온이 우연치 않게 알게 된 '성아'와 진정한 사랑을 꿈꿔보는 이야기이다.

초입의 몰입감에 비하면 늘어지는 부분도 꽤 있었고 개인적인 생각으로 필요치 않다고 생각되는 내용도 있어 흐름이 끊길 뻔했지만 다 읽고 나서 돌아보니 각각의 캐릭터의 내용도 작가가 보여주는 미래상의 한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끔찍한 미래라니, 혀를 내두르다가, 현실과 별반 다를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의학 기술의 발전, 인공 지능의 발전으로 편리하게 살 수 있고 영생마저 꿈꿀 수 있는 소설 속 세상에서도 여전히 계급과 차별은 존재하고 아둥바둥해야 하며, 모든 것을 기억해야만 하는 게 고통 자체인 인간의 모습에 혀끝마저 씁쓸하다. 영생과 오차 없는 완벽한 기억력. 이건 축복일까?

조용하게 혼잡했던 이 소설의 첫 느낌이었던 완벽한 디스토피아라는 단어가 마지막에는 약간 무색해지긴 한다. 왜일까. 성아와 유온의 관계의 실낱같은 희망 때문에? 아님 현실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우리 지금의 모습은 어떤가 되묻게 된다. 소설처럼 차갑고 어두워지기 전에 조금은 주변을 한 번 더 돌아보는 마음을 가져야겠다는 생각만 든다. 흐리고 축축한 오늘 날씨 같았던 소설이었지만 여러 갈래로 생각의 물꼬를 트는 이야기였다.

덧. 서윤빈 작가와 담당 편집자의 인터뷰가 엮인 샘플북도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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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상대방의 성향도 모르는데 자기에 대해 늘어놓는 건 위험하다. 성향은 타협하거나 설득할 수 없다.

🔖120. 성아의 말은 마치 일종의 고발처럼 들렸다. 나는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듣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비밀은 책임을 만들어낸다. 남의 이야기까지 책임지기에 나는 이미 짊어지고 있는 미라의 무게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다.

🔖142. 타인의 기억을 내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기억처럼 받아들이는 일은 절대 유쾌하지 않다. 기억을 전달받는다는 건 거기에 얽힌 상대의 감정과 생각마저 고스란히 받는다는 뜻이다. 나의 판단이라는 성벽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채.

#서윤빈 #영원한저녁의연인들 #래빗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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