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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리는 개 ㅣ 안온북스 사강 컬렉션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유진 옮김 / 안온북스 / 2023년 11월
평점 :
읽으면서 좋다고 무한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몇 줄의 문장으로, 짧은 글로도 마음을 후벼파는 감각을 느끼게 하는 책이 있다. 사강은 [패배의 신호]로 잠깐 접했는데 그때와 비슷한 느낌으로 좋았다. 내용은 전혀 달라보이지만 결국에 사랑에 대한 감정을 이야기한다는 건 동일하려나. 사강, 사강 하는 이유를 좀더 확고히 알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늘 치이고 굴욕당해도 아무렇지 않은 너무나 보잘것없는 한 남자인 "게레"는 어느 날 광재더미 앞에서 보석 꾸러미를 줍게 된다. 조용히 집어 들었던 이 보석은 살인 사건이 연루되어 있었고 그 일로 인해 게레의 인생은 그전과 다르게 흘러가는 듯하다. 하숙집 주인이자 한때 마피아의 정부로 이름을 날렸지만 지금은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마리아는 게레의 보석을 보고 그를 용의자로 짐작한다. 자신을 용의자로 짐작하는 마리아의 눈빛에서 그전과 다른 경외감 혹은 진정한 남자로 바라보는 느낌을 받은 게레는 그녀를 속이게 되고... 마리아의 사랑을 계속 갈구하며 그녀와의 새로운 인생을 꿈꾼다.
어떠한 상황으로 인해 나도 모르게 서서히 변해가는 생활 태도나 성격에 대한 묘사가 놀라웠다. 나도 잘 알지 못했던 감정들을 유려하고 정확하게 풀어놓은 글을 보면 가끔 너무나 놀라서 빠져드는데 이 소설 내내 그런 느낌이었다. 읽고 보니 나도 분명 느낀 적 있었던 이 감정, 말로 표현 못했던 그때의 기분과 표정이 새삼 떠오르는 것이다.
마리아는 게레를 사랑하긴 했던 걸까? 너무 평범하게 살아온 게레는 소용돌이 쳤던 과거를 가진 마리아에게 끌린 걸까? 아니면 정말 그 순종적이고 복종하려는 그 마음이 사랑인가? 나는 게레를, 마리아를 정말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고.. 한편으론 아예 낯설어서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도 같다. 둘을 다시 떠올려보니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은 기분이다.
마음이 뭔가 휑하니 서글퍼졌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자꾸 손이 가. 책을 덮자마자 다시 읽고 싶어졌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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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특히 영광의 하루를 보내고 난 지금, 그는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보다 그녀가 더 이상 그를 용의자로 믿지 않는 게 더 두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무자비한 범죄자로 바라보던, 그래서 온종일 진정한 남자로 살게 했던 그녀의 사자같이 형형한 시선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두려웠다.
🔖157. 게레는 어디선가 두려움에는 냄새가 있다는 걸 읽은 적이 있었다. 아마 그건 진실일 거였다. 그리고 어쩌면 개가 그에게서 그런 냄새를 맡은 게 아닐까? 밤에, 홀로 침울한 방에서 옷을 벗으며 게레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팔과 어깨에 코를 갖다 대보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피부에서 식별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치의 냄새였다.
🔖177. 그것들은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갑자기 이 누추한 집에 걸맞지 않아 보였다. 그 위풍당당한 보석들에서 핏자국이 지워지자, 부정할 수 없는 진품임에도 모조품처럼 밋밋하게 느껴진 것이다.
🔖179. 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수수께끼 같은 표정에서 벗어난 그녀는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를 것 같기도 했고, 눈물이 떨어질 것 같기도, 혹은 그를 물어 뜯어버릴 것 같기도 했다. 그를 향해, 너무도 흉폭한 동시에 애원하는 표정을 지으며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었기에, 게레는 의자를 뒤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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