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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슬지 않는 세계
김아직 지음 / 북다 / 2023년 10월
평점 :
안드로이드가 보편화된 세계. 로봇과 인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가정용 안드로이드로 소유주를 도우며 학습을 해나가던 안드로이드 '루시'가 죽음과 사후세계에 의문을 가지며 천국을 꿈꾼다. 은퇴한 노신부인 레미지오의 적적함을 알았던 로봇 루시는 본인의 정체를 숨기고 병자성사를 받게 되는데.
이 일을 알게 된 반안드로이드주의 종교인 "호르투스데이"의 총책임자 유안석은 자신들의 입지에 진흙을 묻히지 않게 하기 위해 이 사건을 비밀에 부치고 성사 받은 안드로이드를 제거하려고 한다.
그들은 인간을 모방한 기계 따위가 인간이 하던 일을 받아 움직이고 되려 인간이 로봇처럼 퇴화되는 지금을 암흑기로 여기고 인간의 가치를 넘보는 안드로이들 막기 위해 마녀 사냥을 시작한다. 마녀 사냥에 대한 의미도, 그리고 로봇과 인간을 구분할 수 있는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던져 준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녹슬지 않을 가치란 무엇일까.
'미등록 인간 하나, 폐기 선고를 받은 안드로이드 하나, 그 둘을 자매라 여기는 치매 노인 하나. 그렇게도 살아졌다(p.291)' 결국은 함께 하는 다정함일까. 보고 싶지 않은 미래의 모습들만 나열된 것 같은 소설이었지만 이 문장을 보고 있으니 그렇게 암흑만은 아닌 것도 같다.
도망친 안드로이드를 추적하는 김제이의 시선에서 범죄물 같기도, 스산하고 음산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스릴러 같기도, 어딘가 다치고 찢어진 것들이 서로 쓰다듬는 다정한 가족물 같기도 하면서 적절하게 가미된 액션까지. 흥미로운 진행 상황에 흡입력이 좋고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묵직하게 던져지는 철학적인 고민까지. 처음 접한 김아직 작가의 다음 작품도 이미 기대된다.
덧. 안도로이드를 마녀로 규정하고 파괴하려는 유안석이 네 이놈은 안드로이드 잡자고 인간에게 칩을 심어 강화 인간을 만드는데 그거 너무 어불성설, 내로남불 아니냐? ㅁ친놈..🤨 어긋난 신념을 가진 종교는 그 자체로 사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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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아늑하고 하릴없는 그 시간이 영혼에 얼마나 깊은 내상을 입혀왔는지는 오직 레미지오만 아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쓸모가 없다는 자각은 지나온 삶의 마디마디에 골절상을 남기는 병증이었다. 하여 레미지오에게 빗속의 통증은 차라리 아름다웠다. 절망과 자기 환멸로 점철된 시간의 늪을 뚫고 나온 핏빚 꽃이었다.
🔖29. 효용이 만능의 가치로 자리 잡은 지금 여기야말로 암흑의 시대라 확신했다.
🔖85. 어떤 재앙은 기회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 법이거든요.
🔖201. 소유주를 간병하다가, 도서관에서 어린이들에게 책을 읽어두다가, 자동차 공장에서 충돌 실험에 동원되다가 돌연 명령어-실행 메커니즘 너머의 것들이 궁금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구는 루시처럼 사후 세계로 눈길을 돌리고, 또 누구는 로봇의 기능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자아정체감을 붙들고 늘어질 수도 있다. 나는 누구인가요? 거리의 안드로이드들이 한꺼번에 그 질문을 외쳐대는 장면을 상상하자 제이는 온몸이 오싹해졌다.
🔖298. 녹슬지 않게 너 자신을 잘 돌봐. 세상이 끝에 다다를 때까지 너도 살아. 죽지 않으면 천국도 필요 없어. 전부터 얘기해주고 싶었어. 나는 이 목소리로, 너의 데이터로, 네 안에 살아 있을게. 이 세계를 무한히 지켜봐. 그리고 무한히 나를 기억해줘.
#김아직 #녹슬지않는세계 #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