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유전학
임야비 지음 / 쌤앤파커스 / 202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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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 몇 페이지 들춰 보려던 게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혁명과 반란이라는 이름 아래에 살인, 납치, 테러 등 악행을 저지르는 사내는 유배지로 떠나기 전 어머니께 들른다. 사내의 유배지가 투루한스크라는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자신의 어릴 적, 투루한스크에서의 잊을 수 없는 악몽을 떠올리고 아들에게 전부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획득 형질 유전"이라는 과학적 가설을 광적으로 믿은 리센코 후작은 러시아 황제의 막대한 재정 지원을 받고 추위를 느끼지 않는 '한랭 내성' 유전자를 만들어 강력한 군대를 바치겠다고 호언장담한다. 20년간 이어지는 생생한 생체 실험에 입을 틀어막은 순간이 여러 번! 수용소에 갇힌 500명의 아이들은 다른 세상의 존재 자체를 모르며 지낸다. 그것이 원래의 세상인 줄 알면서.

부모 대의 노력으로 획득된 형질은 후대에 유전이 된다는 믿음은 그럴싸하기도 했지만 분명 헛점도 많다. 극심한 추위에 노출되어 강제 결혼과 출산을 겪게 되는 수용소 아이들의 노력에도 실험의 진척은 없고 리센코 후작은 점점 미쳐가는데...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기적의 케케"가 바로 유배를 떠나게 되는 사내의 어머니.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과 19세기와 20세기 핫하게 논의 되었던 "우생학" 또는 "획득 형질 유전설"을 덧붙여 이렇게나 매력적인 이야기가 탄생했다. 절대 어렵지 않게 한 페이지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속도감과 몰입감이 있다. 있었을 법도 한 이야기들이라 여러 번 검색을 하며 역사적 팩트를 확인해가는 재미도 있었다.

어긋난 과학적 신념이 정치에 이용되는 모습을 보니 누구 하나 제정신일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 속 '한랭 내성' 유전자를 만드는 실험은 빛을 보지 못했지만 악은 유전될 수 있음을 섬뜩하게 이야기하는 듯한데... 리센코의 생체 실험은 어찌 보면 성공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소설은 소설로 즐겁게 읽고 싶다. 강한 악이 유전되고 또 유전된다면 지금 이 세상엔 악마밖에 없을 텐데. 획득 형질의 유전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대에서만 겪게 되는 여러 환경들의 변수가 많으니 확답은 어렵겠다. 아무튼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양쪽 모두 빠지는 거 없이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흥미롭게 읽히지만 뒷끝이 무거운, 생각할거리와 더 많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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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사내는 그런 남자였다. 그가 걸어왔던 길, 지금 가는 길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길 위에 추위와 죽음 따위는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사내는 거만한 도망자였다.

🔖35. 제대로 된 세상과 정상적인 가정을 경험해 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홀로드나야의 폐쇄된 집단생활과 저수지 입수는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일상이었다. 아이들은 천진난만했다. 이곳 아이들에게 세상은 원래 추운 곳이었고, 오두막은 그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이었으며, 저수지 입수는 그저 괴롭고 지루한 미사였다.

🔖86. 그의 눈에는 어느 때보다 커다란 눈물이 박혀 있었는데, 그것은 소냐보다 훨씬 컸다. 케케는 후작이 소냐를 위해 흘린 짧고 투명한 눈물 뒤에 이어지는 먹물 같은 눈물을 보았다. 미세하게 떨고 있는 검은 눈물은 투루한스크의 모든 밤을 합친 것보다 무서웠다.

🔖175. '획득 형질의 유전'. 리센코는 자신이 맹신하는 라마르크주의가 틀렸다는 걸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단지 시간이 모자랄 뿐이라고 생각했다. 검증되지 않은 이론을 긴 시간 믿게 되면, 그것은 바꿀 수 없는 신념이 된다. 그는 초조해졌고 초조해질수록 포악해졌다. 불안은 광기로, 실망은 폭력으로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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