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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만화경
김유정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6월
평점 :
만화경을 보듯이 알록달록한 10가지 중단편이 모여 있는 소설집! 이런 SF소설은 "이야기" 그 자체로의 재미가 있다. 다양한 주제와 다양한 관계의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왠지 터무니없다 싶다가도 내용에 푹 빠져들어 읽게 되는 건 작가의 필력이 아닌가 싶다.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하는지, 또 그 상상을 어떻게 이렇게 차근히 풀어낼 수 있는지... 읽는 나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많은 단편들 중에서 제일 독특하고 재미있게 읽은 건 《만세, 엘리자베스》이다. 신통방통하게 집안을 깨끗히 청소하는 로봇 청소기를 보며 '엘리자베스'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준 나, 주은. 주은은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자신이 그 청소기 '엘리자베스'로 변해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청소만 하던(당연히 청소기니까) 엘리자베스가 내 모습이 되어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점차 청소기인 내 모습에 적응해가며 내 모습으로 변신한 청소기인 '엘리자베스'가 들통나지 않게 작은 것 하나까지 가르치다가 문득 느끼는 공포. 진짜 아무도 '엘리자베스'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몰라본단 말인가? 키득거리며 몰입해서 읽다가 무서워서 소름이 돋았다. 코로나19 시대에 쓰여진 글들이라 그때만의 살풍경한 묘사 역시 실감났다.
《우주 시대는 미신을 사랑한다》라는 단편도 감명깊었다. 우주를 떠돌아야 하는 미래거나 전염병이 창궐하는 미래거나 사랑의 힘은 아마 갈수록 더 강력해질 것이다. 이 단편을 읽으면서 내가 여전히 사랑을 믿고 사랑을 꿈꾼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표제작인 《용의 만화경》 역시 좋았다. 나는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떠오르기도 했다. 《용의 만화경》과 《나와 밍들의 세계》는 오디오북으로도 나왔다고 하니 찾아 들어봐야겠다. 모든 단편에 따뜻한 시선이 은은하게 깔려 있어서 좋았다. 10편 다 다른 언어로, 다른 느낌으로 결국은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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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비 내리는 거리에 젖은 우산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그렇게 봄이 끝나는 줄도 모르고.
15. 이 느낌이야. 누군가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 바로 이게 필요했어.
61. 꼬박꼬박 주고받던 안부와 근황 소식이 일 때문에 바쁘다며 점차 간격이 늘어나더니 일 년에 두어 차례가 다인 생존 보고가 되고, 그렇게 유대의 끈은 우주 이쪽과 저쪽으로 점점 더 가늘고 길어지다가 끊어진 줄도 모르게 툭 끊어져 나갔다. 놓치고 사라져 버렸다.
89. 지금의 너는 무슨 생각을 하며 나를 볼지, 나는 여기서 여전한데 현실을 걸어가고 있은 네가 아직도 나를 사랑해 줄지. 갈망이 뒤틀리면 쌍둥이처럼 고통이 뒤따른다는 건을 예전에는 몰랐다. 우리가 여전히 사랑일까.
94. 우주 시대는 미신을 사랑한다. 사람이 여전히 사람을사랑한다는 미신을.
151. 그때 이미 지금에 이르는 과정이 시작됐을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려 해도 새삼 무언가 느끼기엔 몸속 나사가 모두 낡은 기분이라 와닿지 않는다. 생각도 감정도, 부질없고 잔잔한 우주의 먼지로 부서지고 둔감해진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변신해 있던 게 아니었나 보다. 주은은 자신이 아주 예전부터 서서히, 이런 존재로 변화하던 중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나는 무감각한 기계에 꼭 들어맞는 영혼이 되는 걸까.
192. 중요한 것은 내용물미니까, 항상. 어떤 모양이든 어디에 있든.
256. 애타게 갈망하는 은진 혼자만 밖에 남겨 두고는. 처음에는 몰랐던, 존재한다는 자체도 깨닫지 못했던 그 갈망.
395. 괜스레 귀찮음을 그리 변명하며 우리는 그 상태로 살기로 했다. 칠이 안 된 부분에는 우리의 보잘것없는 세간살이를 두었다. 누구나 완벽하지 않은 부분을 가리고 살지 않나. 만족이란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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