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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피, 열
단시엘 W. 모니즈 지음, 박경선 옮김 / 모모 / 2023년 2월
평점 :
책 읽은 소감을 말하라면 경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좋고 나쁨의 뜻을 떠나서 확실히 뜨악스럽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성 작가의 놀라운 데뷔작"이라는 책 띠지와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보스턴글로브] 격찬!!이라는문구에 나도 들뜬 마음으로 한껏 기대를 품으며 책을 시작했다.
열한 편의 단편들로 구성된 책. 그리고 처음 시작되는 단편이 바로 표제작 "우유, 피, 열"이다. 이 조합들은 도대체 무언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춘기 소녀들의 우정을 다룬 이 글의 소재로 마구 이용이 된 우유와 피, 열... 다 읽은 후의 느낌이 "????!!!!" 이랬다. 격찬 속의 소설인데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지 이해를 못하는 건지 잠시 의문의 구렁텅이에 있다가 다음편을 연이어 읽었다. 그렇게 한 편, 한 편 끝이 왔는데도 사실 아직 잘 모르겠다.
첫 단편부터 비릿하고 메스꺼운데 이게 또 멈출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계속 읽어나갈 수밖에 없는 책이다. 매 편은 모두 다른 내용의, 다른 화자들로 이야기를 구성해 나가지만 정도의 차이지 불편함과 비릿함, 얼굴을 찌푸리게 되는 약간의 충격들을 늘 담고 있다. 글을 읽을 뿐인데도 그 생생한 색감과 냄새, 그리고 숨이 막히는 듯한 촉감까지 그대로 전달이 된다. 화자는 대부분 약하고,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분노하고 열을 내면서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그 답답한 심정들이 내게도 온전히 느껴진다.
벨벳 코팅으로 계속 만져보고픈 촉감의 책인데다가 표지까지 강렬한 색감의 디자인으로 너무 예쁘다고 만지작거렸는데 다 읽고 난 지금은 표지 디자인들이 다시 보인다. 뒷 표지의 뼈까지... 작가는 열한 편의 단편들 순서도 정교하게 배열했다고 하니 조용히 작가의 흐름의 몸을 맡겨 집중해 보는 것도 좋겠다.
'만일 여자들에게 궁금해할 자유가 더 많이 허락되었더라면 세상은 지금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라는 뒷표지 구절이 가슴에 깊이 박히지만, 아마 그랬더라면 이런 글은 탄생할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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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열세 살이 되기 전까지는 공허가 짊어질 만한 무언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공허는 대체 누가 거기에 넣은 것일까? 때로는 공허로부터 기어이, 언젠가는 벗어날 수 있을지 궁금해하면서도 때로는 그것을 절대 반납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공허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니까.
🔖72. 혐오는 대부분 자신이 심리적으로 인지한 위험, 그러니까 우리의 죄책감이나 고통을 은폐하는 거예요. 두려움인 거죠. 우리는 두려운 대상을 어떤 식으로 다루나요?
🔖79. 제이 자신은 이류二流가 아니며 아담의 갈비뼈도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존재 자체가 신이라는 것도 이제 안다. 목사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연단에서 소리를 지르며 동생 더크와 같은 소년들을 혐오와 공포에 가득 찬 인간으로 키워내고 있다는 것도.
🔖303. 그런데 우리가 뭘 할 수 있지? 그들의 은식기가 방. 안을 음악으로 채웠다. 하나님 맙소사, 카나리아가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양에게 말하는 걸 우리는 들었다. 우리는 알았다. 그들은 먹을 수만 있다면 그분까지 먹어치울 사람들이라는 것을.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주차장에서 각자 차에 올라타며 서로 시선을 피한 채 어깨만 으쓱였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어린 것을 먹어오지 않았던가?
🔖329. 집에서 길들여진다는 건 짐승들한테나 해당되는 얘기야. 그리고 사실, 짐승들도 그럴 필요 없어. 모든 건 순리대로란다. 네 자신으로 있는 법을 배우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너 아닌 다른 누군가로 살다 죽는 거고. 간단해.
🔖331. 100년이 지나면 고고학자들이나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나를 땅에서 파내 쪼개진 내 대퇴골에서 흙을 털어내고 농담의 실마리를 찾으려 내 상완골을 찬찬히 살펴보겠지. 그들은 절대 알아내지 못할 거다. 전체를 볼 수는 없으니까. 내 척추를 감쌌던 맹렬한 기이함이라든가 안절부절하지못하던 흐름 같은 것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