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니시드
김도윤 지음 / 팩토리나인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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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BIFF 부산스토리마켓 IP 선정작"으로 이름을 올린 소설! 영상화로의 가능성을 이미 입증한 소설이다. 화제의 소설인 만큼 역시나 재미있다. 꽤 묵직한 책인데도 빨리 읽어낼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느끼는 페이지 터너 소설. 서사도 탄탄하고 인물묘사도 섬세해서 빨려 들어간다 그냥.

남편의 비밀스러운 순간을 우연히 보게 된 아내는 못 본 일로 덮어두기로 한다. 오로지 나를 위해, 내 아이들을 위해. 그 일 이후 갑작스레 사라진 남편, 10년 후 아들마저 사라지게 되는데... 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많은 일의 연결고리가 되는지 머리가 복잡하다. 하지만 소설 마지막에는 내가 했던 그 선택들이 누군가의 교묘한 설계속에 '그렇게 되어질 수밖에 없었던 일'이었던 것도 같다.

극중 화자는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연정하"다. 평수가 다양하게 존재하는 아파트에 살면서 겪게 되는 불편감, 이웃들과의 소통 부재, 자존감 따위는 한 방울도 없는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남편, 그리고 타인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실감나서 속이 시원하기도 하면서 가슴이 답답하기도 했다. 연정하가 사는 현실은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고 감옥 같았을까.

애정 없는 결혼 생활,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살아야만 했던 현실들이 이미 지옥같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고통만 안겨줬던 현실 속에서 나를 지켜줘야 할 마땅한 보호자가 없이 컸던 정하는, 자식에게 자신과 같은 삶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가족에게 필요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배려라고 생각해서 표현하지 않았던, 표현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쌓여서 그 작은 틈이 영원히 메워지지 않았던 건 아닐까? 하긴 소통의 부재만으로 설명 되기에는 정하의 첫 번째 남편 오원우가 너무 무책임하고 이기적이고 찌질한 새끼이긴 하다. 마지막까지도 인간말종이었던 정하의 전 남편 오원우.

사실 완독을 하고 나서도 마음이 복잡한 소설. 너무나 재미있고 빨리 읽히지만 끝무렵엔 읭? 하게 되는 여운이 자꾸 남는다. 정하는 자신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애정과 표현이 넘치는 새로운 남편을 만나게 되는데 이게 그렇게 해피엔딩 같지는 않아 보이는 게 내 찜찜함의 원인. 원우는 원우대로 파렴치하지만 우성은 우성대로...무섭다 나는. 한 놈은 무책임함의 극치고 한 놈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잘 포장되었지만 집착과 광기의 수준으로밖에 안보인다. 어디까지가 사랑인지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왠지 속편이 나온다고 해도 재미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정하와 우성의 뒷 이야기, 사라진 아들과 전남편의 행방, 나머지 자식들의 더 자세한 이야기들, 카메오로 자영이 엄마의 이야기까지. 나혼자 너무 깊게 가나?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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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남편이 밖에서 무슨 일을 저지렀든 위험이 나와 아이들에게까지 미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차올랐다. 고민은 불과 몇 초였다. 난 그 몇 초의 마지막 초침이 채 움직이기도 전에 결심했다. 모르는 척을 하기로. 내가 모르고 아이들이 모르면 아무도 모르는 거다. 무슨 일이 있었든지 간에 그건 남편 혼자만의 일이었다.

95. 이런 모임을 만들어서 모이는 사람들은 뭘까. 영어 공부를 핑계로 연애를 하고 싶은 걸까. 단합을 핑계로 술을 마시고 싶은 걸까. 자기만족을 위해서 만드는 연극과 죽을 맞춰주러 온 사람들. 초등학교 학예회만도 못한 공연을 선보이고도 무대에 섰다는 것만으로 스타가 된 것처럼 착각하면서 들뜨는 사람들. 축하를 하면서 자기들도 무대 위의 '특별한' 사람들과 일행이라는 것을 은근히 드러내고 우쭐함에 취하는 사람들.

103. 문학도라는 것은 낭만적이지 않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우수에 젖은 남자는 현실에서는 절대로 남자 주인공 역할을 꿰찰 수 없다. 자격 미달이니까. 당장 먹고살 게 걱정인데 앵무새처럼 시를 읊어대는 남자를 두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여자는 없다.

206. 모르는 척하고 물었다. 잘난 척 떠드는 사람 앞에서 바보인 척 연기하기. 그러면 상대방은 적선하듯이 말을 풀어놓는다.

214. 완벽하게 맞아서 꽉 채워진 퍼즐의 판 같은 가정이 세상에 있기는 한 것일까. 그런 가정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외부에서 볼 때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가정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무도 모른다.

218. 몹시, 몹시도 슬펐다. 앞 동 남자의 호의를 받으면서 나는 그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남편은 나와 아이들을 위해서 간식 한 번을 사 온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제 아빠에게 불평 한마디 없었다. 혹자는 아이들이 잘 교육되었다고 여기겠지만 그건 아니다. 아이들은 제 아빠의 무관심에 익숙했을 뿐이다.

267. 돈을 많이 쓴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새 남편과 백화점을 걷는 동안 긴 시간 마음에 담아두었던 억하심정도, 억울함도, 언젠가 꼭 되갚아 주겠다고 곱씹고 곱씹던 악한 감정들도, 미처 깨닫기도 전에 나의 마음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돈이 있으면 사람이 착해진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329. 나는 너무 오랫동안 아물지 않은 상처를 숨겨왔다. 상처를 좀 더 일찍 드러냈어야 했다. 실질적 보호자가 없는 나를 보호해 줄 존재는 오로지 나였는데 방어하기 위한 방법으로 나를 학대하는 쪽을 택했다. 어리석었다. 결국 비뚤어지고 모나게 된 것은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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