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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끌 같은 나
빅토리아 토카레바 지음, 승주연 옮김 / 잔(도서출판) / 2020년 3월
평점 :
러시아 문학 하면 톨스토이, 도스도예프스키밖에 알지 못했는데 빅토리아 토카레바라는 작가를 새로 알게 되었다. 2000년 53회 칸영화제 공로상을 수상했고 책날개 문구에는 러시아 현대문학의 거장이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그러나 나는 지금껏 러시아 문학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터라 대단한 분이셨구나 생각했는데 책날개를 다시 보니 시대를 앞선 페미니스트라는 어구가 눈에 들어왔다. 요즘 페미니즘 사상이 우세해 지고 있어서 여성 서사라는 이름하에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이 대거 재조명받고 출판해 나오는지라 이 작품은 어떨지 궁금했다. 작가가 1937년 출생이라 그런지 작품은 전체적으로 1900년대 중후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은 '티끌 같은 나', '이유', '첫번째 시도', '남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죠', '어느 한가한 저녁' 이렇게 다섯 작품이 있는 중단편선집이다.
'티끌 같은 나'에서 마르트노프카 마을에 사는 안젤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정말 좋아했고 가수가 되고 싶어서 옆집에 묵고 있는 모스크바 여인에게 돈을 빌려 모스크바로 가서 오디션을 보지만 2차에서 떨어진다. 그 돈을 빌려준 모스크바 여인은 '키라 세르게예브나'이다. 스타가 되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돈을 벌어 어머니를 도우려는 자신의 꿈을 위해 키라의 집에서 청소를 해주며 지낸다. 키라의 인맥 중 프로듀서에게 연락을 해서 찾아가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고 레나라는 여인의 집에서 일하다가 그 집 남편 니콜라이가 안젤라에게 홀딱 빠져 별거하고 안젤라하고 살다가 안젤라는 같이 일하는 사브라스킨하고 사랑에 빠져 떠나가고 니콜라이 혼자 남는다. 사브라스킨은 안젤라에게 피해를 줬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안젤라를 피하고, 안젤라는 담담히 살아간다.
주인공 제외 인물들의 감정선이 복잡한 '티끌 같은 나'는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했지만 당대 현실을 잘 담고 있는 듯 했다. 스타 한명 키우는데 돈이 어마어마하게 필요하다는 것에서 역시 문화예술계는 밑천이 많이 필요한 직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듀서가 치근덕거리면 어떡하냐는 안젤라의 말에 키라는 허락하라며 누군가에게 어차피 허락할거 그가 되지 말라는 법 있냐, 안젤라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럴 순 없다고 하자 키라는 푼돈받고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을 사랑하느니 거물을 사랑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했다. 흔히 옛 영화에서든지 여성은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가면 장땡이고 인생 풀리는 길인 것처럼 묘사하고 실제로 옛날엔 그런 일이 흔했다. 그런데 안젤라도 처음엔 사랑이 먼저라고 생각했을 지 몰라도 소설 중간에는 돈 많은 니콜라이랑 살게 되다니 인생은 생각보다 자기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고 현실적으로 그럴듯 하게 흘러가나 보다.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니콜라이인데, 니콜라이는 처음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다며 아내 레나를 떠났을 때 뭐 저런 놈이 다있지 싶어서 반감이 들었고 아내가 정말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나이도 오십이 넘어가는 사람이 어린 여자랑 사는 게 내 눈에는 별로 좋아보이지 않았지만 안젤라를 진심으로 사랑해주고(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오히려 안젤라가 니콜라이를 금전적으로 이용한다는 생각도 들었고 결국 니콜라이는 안젤라가 떠나갔을 때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뇌가 급격히 안좋아지자 내 마음속 여론이 니콜라이에게도 쏠려 그도 참 안쓰러운 인간이구나 싶었다. 사실 가장 피해를 본 것은 사랑을 갈구했던 레나지만 각기 다른 인물들이 은근히 입체적으로 감정이 서술되었기 때문에 누구의 입장만 놓고 생각할 수 없었던 소설이였다.
이 책의 다른 작품 '이유'에서는 주인공 마리나가 결국 자신을 버리게 되는 사람도 만났고 끝까지 서로 사랑했던 사람도 만났지만 결국 어느 방식으로든지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신을 떠났던 사람 사이에서 낳았던 아이와 자신의 딸이 남긴 자식을 키워내는 모습에서 헌신적인 모성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었다. 마리나는 참 사랑을 주는 것도 좋아했고 받는 것도 좋아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고부갈등이라는 요소도 있어서 더 재밌게 볼 수 있었다. 아마 내가 봐왔던 작품 중에서 한국드라마적 요소가 있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오래전에 나온 소설 중에서 이야기가 역동적이고 감정을 서술한 작품은 이 소설집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사랑에 빠지고 자신이 헤어지고 싶을 때 헤어지고 행복에 겨울 정도로 사랑했지만 주변의 반대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이별도 해보게 되는 다양한 감정의 결을 지닌 주인공들이 이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해주고 있다.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사건도 신선했고 서사가 강하게 짜여있어 새로운 느낌을 줬다. 러시아 문학에서 빅토리아 토카레바라는 문호를 알게 되어서 러시아 문학에도 흥미가 좀 생길 것 같다. 이번 기회에 다양한 나라의 문학을 접해보고 알려지지 않았던 작가들을 직접 찾아내 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