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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본 백석 시집
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 문학동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학창시절 이후 시라는 것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내게 백석의 시 한편은 놀라움이었다. 한편으론 신선함이었고 쓸쓸함이었으며 결국은 안타까움만 남았다. 마음을 다치고서도 그의 시집을 사고야 말았던 것은 백석이란 시인의 신비로움에 이끌렸던 탓이 크지만 그가 쓴 다른 시들은 과연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하는 궁금증도 컸었다.
사실 시를 잘 모른다. 좋은 시를 쓰는 것은 애시당초 꿈도 꾸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시인의 멋진 시를 제대로 읽어내는 능력 또한 만무하다. 그럼에도 호기롭게 백석 시집을 손에 넣고야 만 무모한 열정에 뒤늦은 후회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끝을 알 수 없는 갈증과 결핍이 계속 나를 괴롭혔을지도 모른다.
백석으로 더 알려졌지만 그의 본명은 백기행.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고보와 일본의 아오야마 학원을 졸업하고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근무했다는 것이 그의 간단한 약력이다.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며 등단했고 해방 이후 고향에 머물다 1995년에 사망한 것으로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있는 것이 시인 백석에 대한 정보의 모두다.
주로 이북에서 활동했던 탓에 백석이란 존재가 '오랫동안 현대시사의 광상 속에 매몰되어 있다가 뒤늦게 발굴된 보석'처럼 빛나게 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이다. <정본 백석 시집>을 펴낸 고형진은 백석의 시가 지상의 진열대 위에 놓이면서 찬란한 빛깔과 광택을 지닌 보석으로 광채를 뿜기 시작했다며 그의 시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시에는 문외한인 나로서는 고형진이 얘기하고 있는 백석의 시세계와 시사적 의의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하긴 어렵다. 하지만 백석의 시들을 한편 두편 읽어가노라면 "지용이 우리 시에 최초로 현대시의 호흡과 맥박을 불어놓은 시인이라면, 백석은 그 생명체에 다양한 조직과 기관을 이식시켜 활발한 생명력을 불어넣은 시인"이라는 그의 평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래도 첫 정이 무섭다고 하지 않았던가. 수십여편의 시를 읽어봐도 내게는 백석의 첫 시였던 '흰 바람벽이 있어'라는 시가 역시 최고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워줄 만 하다. 왠지 이 시는 나와 같은 백석의 마음이 느껴져서 좋다. 애잔해서 좋고 쓸쓸해서 좋고, 또한 외로워서 좋다. 백석처럼 나 또한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난 것은 아닐까.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울력하는 듯이
눈길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널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