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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한기가 느껴지는 듯 하다. 마치 내가 수백년의 세월을 거슬러 병자년 그 매섭던 추위 속에 내동댕이 쳐진 것만 같은 애처로움이라고 할까. 작가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은 국사를 배운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병자호란, 그리고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역사적 아이템을 소재로 하고 있다.
오랑캐라 멸시하던 수십만 외적에 국토를 유린당하고 인조 14년(1636) 12월에서 이듬해 1월까지 궁벽한 남한산성에 갇힌 임금과 신하들, 그리고 혹한의 추위 속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참으며 성을 지켜야 하는 군사들과 그곳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민초들. 지위 고하를 떠나서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한없이 가여운 존재들이다.
그 참담한 심정을 어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전쟁에 이길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기대하던 지원군은 오지 않고, 하루하루 겨우 입에 풀칠만 하고 지낼 수 있는 식량마저 두달을 버틸 수 없다. 도무지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적들은 점점 더 성을 죄어온다. 신료들은 김상헌으로 대표되는 척화파, 최명길이 앞에 선 주화파로 나뉘어 결론나지 않을 논쟁만 계속한다. 앞날에 대한 해법은 없다.
성문을 열고 인조가 눈쌓인 길을 맨발로 걸어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삼배구고두의 항복례를 하면서 백성들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길었던 45일의 파국을 맞이하게 된 셈이다. 삼전도의 굴욕은 임금인 인조 자신에게도 씻을 수 없는 치욕이겠지만 그 시간 동안 형언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 했던 민초들의 삶을 생각한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 느꼈던 애처로움은 이내 분노로 바뀌어 갔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44년 전에 이 나라는 임진왜란이라는 큰 국란을 겪어 전 국토가 황폐해졌다. 그 상처를 회복하기도 전에 인조반정으로 정치판은 요동쳤고 이 일이 있은 후 불과 5년만에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그 여진족 오랑캐가 물러간 후 불과 아홉해 뒤에 병자호란이라는 엄청난 전란을 다시 겪게 됐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44년의 간격을 두고 있다. 정말 지지리 운이 없는 사람이라면 우리나라 역사상에 기록될만한 외침을 세차례나 겪게 되었을 수도 있다. 이것이 그저 운이 없음을 탓할 일일까. 현명하지 못한 군주와 명분에 얽매여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하고 대비를 하지 못한 정치인들이 응당 그 고통을 다 짊어져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이 난리 통에도 엄연히 반상의 차이는 존재한다. 신분에는 귀하고 천함이 있을 지 몰라도, 그 생명에는 귀하고 천함이 있을 수 없는데도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하루하루 몰락해가는 남한산성에 틀어박혀 말로만 나가 싸우기만을 외치는 신료들을 향한 민초들의 비웃음이 지닌 준엄한 가르침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