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은 법에 따라 산다. 주인공은 권리의무의 주체인 
당사자이다. 법률가는 그들의 권리의무를 밝히는 
전문직이다. 법학(jurisprudence)은 법(ius)에 관한
지혜(prudence)의 체계이다. 여기에서 지혜는 공동체의 
지혜를 말한다. 그 발견을 위하여 법률가는 때때로 법적 
양심(legal conscience)에 의지한다. 그것은 법률가로서 훈련된 법률가가 법률직역의 일원으로서 전문적 직능을 
수행할 때, 가슴에 손을 얹고 마음속의 영성의 소리에 
귀기울임을 의미한다. 개별 법률가가 자신의 개성이나 
불만을 내세워 법으로 강제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일은 법률가의 몫이 아니다. 정치가로서 법을 만들 
때에도, 정치적 과정을 통해야한다. 이런 공적 과정을 
우회하여, 법률가(특히 판사)의 위치에 있음을 기화로 
개인적 생각을 집어넣으려 해서는 안 된다. 법률전문가는 
우선 법적 안정성을 제공해야 한다. - P10

물론, 법적 확실성(legal certainty)내지 법적 안정성이 
궁극적 정의와 충돌할 때에는 뒤로 물러나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드물다. 기존의 법(현행법)이나 
과거의 선례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면 유지되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적이다. 사람들은 ‘전(前)부터 그렇게 해 왔다‘는 말을 대개 납득하고 받아들이며, 기존의 규율이 유지되는 
것을 편하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 최선에 못 미치는 차선의 규율이라도 일관되게 적용하면, 같은 사안유형을 같게 
규율하는 일관성(내지 평등)과 예측가능성은 고도로
보장될 수 있다. 예측가능한 규율 하에서 개인의 자유는 
확보된다. - P10

법적 안정성은 법적 평화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평화는 전쟁을 불사하는 의지와 
전쟁수행의 능력이 가지는 전쟁억제력에 의존한다.
법적 평화도 입법 단계에서의 세력균형과, 재판상 또는 
재판외의 권리주장 및그 가능성에 의하여 유지되고 
회복된다. 법률가는 논란을 일으킴으로써 논란의 해결에 
기여하고, 그럼으로써 법적 평화에 기여한다.  - P10

그렇지만 법적 평화가 자동적으로 도달,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쓸만한 법과 실무가 마련되었으면, 
한편으로는 기존의 틀을 유지하면서 기존의 법과 실무의 
안정적 활용에 힘쓰고, 다른 한편으로는 장기적 안목에서 
비교법적 연구를 하는 것이 좋다. 입법부도 신중해야 한다. 대증요법식으로 수시로 입법하는 것은 금물이다.  - P11

법이 항상 어김없이 관철되기는 어렵지만, 법에 의하여 
정해지는 권리의무가 중시되어야 하고, 권한과 권리의 
행사가 부적절한지를 판단할 때에도 법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다만, 법이 어디까지, 또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지는 각국의 정치, 사회,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법칙(法治)의 개념은 영미법과 대륙법에서 
조금 다르다. - P11

영미법에서 말하는 "법의 지배" (rule of law)는 용어상으로 완벽히 표현되지않는 역사성을 가진 개념이다.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법을 수단으로 한 지배(법에 의한 지배)" (rule 
by law)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법의 지배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 문제이다. 그런데 영미법계의 법률가들은 "법의 지배"와 "법에의한 지배가 아주 이질적이라고 애써 
강조한다. "법에 의한 지배"와 "법의 지배"는 비슷한 것이 
아니라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의 지배" 의 진정한 특징은 무엇인가? 
영미법계의 법률가들이 법의 지배를 설명할 때, 
법이 국왕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유달리 강조한다. 
이렇게 말할 때, 그들은 법이 국왕처럼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 P11

영미법에서 "법의 지배"는 "국왕의지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을 의미한다. 법은 국왕의 자의 통제한도다. 
"법의 지배"로써 국왕의 권리가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법이 국왕보다 위에선다는 데 초점이 있다. 국왕의 자의가 
있던 자리에 법이 들어선다. 그 법은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운 국왕에 대응되는 기능도 해야 한다. 

결국, 영미권에서 "법의 지배"는 ‘의인화된 법‘의 지배를 
뜻한다. 왕이 국토와 신민을 지배하듯이 법이 국토와 
신민을 지배한다. 국왕도 법 아래에 있다. 
- P11

이처럼 법은 사람, 통치자에 비유된다. 이런 의제적 요소는
독일의 법치국가(Rechtsstaat) 개념에는 없다. 
독일의 법치국가 원리가 순수한 헌법원칙이라면 영미의
 ‘법의 지배‘(법치)는 정치철학의 색채를 함께 가진다. - P12

법을 자애로운 지배자에 비유하는 사고방식은 이론적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땅에 부착되어 사는 존재로 
생각하고, 땅(영토) ("this land")을 국가의 가장 본질적 
요소로 여겨 온 영국인들의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지배자이자 지배원리인 법은 인간현실을 굽어살피고 법적 안정성의 요청에 부응할 것이 기대된다. 법은 영생하는 
국왕에 비유되어 의인화된다. 그래서 과거,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법은 일관되는 것이 좋다. 민주적 입법이 기존의 
법을 개혁하는것을 인정하지만, 판례는 시간을 통하여 
일관되어야 한다. - P12

영미법계에서 ‘법률가집단의 자율이나 지배‘를 이야기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법이 왕정 하에서의 국왕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점에도 주목을 요한다.
 
영미법은 법의 형성과 운영을 전문가 집단에만 맡기지 
않는다. 오히려 보편적 전문가(generalist) 내지 비전문가
(아마추어)가 특수직 전문가(specialist)의위에 서서, 
중요한 원칙을 정하고 까다로운 사안에서 최종적 답을 
정한다. 영국법은 법조직역 내로 수용된 근대화된 
원님재판을 특수적 전문가의 재판보다 높이 산다. 
영국의 법칙에서는 이것도 가능하며, 또 여기에 묘미가 있다.

법치의 전통이 취약한 국가에서 섣불리 흉내내었다가는 
폭정으로 직결될 만한 일이지만, 영국에서는 유연한 
법발달의 실무로서 행해지며, 영국 법률가들은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 P12

이와 달리, 대륙법계에서는 전문가가 법의 형성과 운영에서 주도적 역할을한다. 제도적으로 법률가직역의 자율성에 
기초하여 ‘법의 자율성‘을 이야기한다.

국가도 이를 존중하여야 한다. 즉, 나랏일 즉 국사도 법에 
따라 수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때그때 법의 입법, 해석, 
적용을 담당한 사람이 전단적이거나 인간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독일어권의 법치국가(Rechtstat) 개념이다. 
여기에서는 법과 법률가집단의 전문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어 있고, 법학계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히틀러가 패권을 잡고 법치주의를 
마비시키는 과정에서 법학자들의 대대적 숙청(purge)이 
있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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