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별 사건에서의 구체적 타당성 추구가 지나치면 법의 지배 (nule of law)가 아니라 ‘재량, 즉 자의의 지배(arbitrary 
rule)‘가 된다. 법관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내세워, 
감성적으로 양형과 손해배상액 산정을 고무줄식으로 
좌지우지하는 것도 문제이다. 법관이 거리낌없이 자의를 
휘두르면, ‘임금과 마주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재화는 
없‘었던 고대의 폭정(tyranny)‘이 법정에서 재연될 것이다. - P5

정확히 말하면 tyranny는 참주(tyrant)에 의한 정치, 
즉 참주정이다. 왕이 참주일 때에는 폭군이지만, 왕정 
하에서도 꼭 왕만이 참주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독재, 과두정, 민주정을 가리지 않고 참주정이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정치학에서는 ‘폭군‘이라 하지않고 참주정이라 한다. 

그런데 한국의 대중매체를 보면 Lyranny를 경계하는 대신 
"독재"를경계하는 데 신경을 집중시키는 모습이 보인다. 
이것은 초점이 빗나간 것이다. 통치자의 숫자에 따라 
독재 (autocracy, 1인체제), 과두정 (oligarchy), 
민주정(democracy)을 나누고, 각유형별로 나타나는 
정치현상을 고찰하는 일도 의미있다. 그러나 통치자
(내지 실권자)의 숫자에만 시선을 빼앗겨 본질을 놓쳐서는 곤란하다. - P5

유대국의 왕 솔로문의 지혜로운 판단도 근대적 법제도에 
걸맞지 않는다. 고대로부터 오랜 발달과정을 거치면서, 
법과 법률직역은 정치로부터 분화되었다. 정치와 개별 
법관의 즉흥으로부터 법제도의 운영을 차단하는 일은 
법치(ruleof Law)의 기본이며 요체이다. 

물론 법률가도 사람이므로 동정과 공감능력이 중요하다. 
법적 과정(legal process)의 표현적 기능(expressive 
function)도 주목할만하다. 즉, 당사자가 사법과정이나 
비사법적 진상규명활동을 통하여 마음을 표현하고 
심리적으로 치유될 수 있다. 

그러나 법 외적인 것이 법을 구부려서는 안 된다. 
언론의 주목을 받은 범죄자를 엄벌하는 것이 아무리
대중매체 시청자에게 후련하더라도, 소위 국민정서법이나 괘씸죄로 형사처벌이 발동되거나 가중되어서는 안 된다. 
감정의 동요 없는 냉정(sang froid)은 판사, 검사, 변호사를 불문하고 법률가의 미덕이다. - P5

정의론의 사고실험(thinking experiment)과 법적 과정
(legal process, 입의법 및 재판의 과정)을 혼동해서도 
안 된다. 사회철학자의 머리 속의 사회학적 구상이 곧바로 
법의 영역으로 넘어와서는 안 된다. 철학자는 자신의 
머리를 소유하고, 자신의 철학적 사량의 주인이다. 
그러나 그는 실생활 속의 타인들을 지배할 수 없다. - P5

사회 속의 개인은 철학자의 실험용 쥐가 아니다(혹은 그의 머리 속에서만 실험용 쥐이다.)

 ‘법적 정의‘에 국한하지 않고 넓은 범위에서 정의의 
내용을 탐구하는 것은 사회철학으로서의 정의론의
몫이고, 법률가가 여기에도 귀기울이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법과 법률이 항상 정의론에 우선적으로 
복종해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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