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고대의 로마법

1. 12판법

역사적 기록이 남기 시작했을 시점의 로마는 왕정 
체제였으나 기원전 6세기 말에 왕이 축출되고 공화정이 
도입되었다. 이때 로마는 티베르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공동체였다. 
그곳 사람들은 스스로를 그리스인들이 트로이를 
함락시켰을 때 피난해 온 트로이 사람들의 후예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의 법은 대대로 구전되어온 관습 
형태로 존재했고 이러한 법은 로마인들의 민속 문화의 
일부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법은 로마 시민들에게만 
적용되었고 로마 시민들만이 주장하고 원용할 수 있었다
(로마법을 지칭하는ius civile 라는 라틴어는 ‘로마 시민들 
cives‘의 ‘법 ius‘이라는 뜻이다). - P17

관습법이 특정 사건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은 경우에는 국가의 종교적 행사를 관장하는 
귀족들로 구성된 사제단의 해석에 따랐다. 로마 시민은 
상류층 자산가에 해당하는 비교적 소수의 귀족 계급과 
이런저런 불이익과 차별을 받는 다수의 평민 계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사제들은 전부 귀족 계급 출신이었으므로 
평민들이 개별 사건에서 문제가 된행위나 서식의 효력에 
대한 사제단의 판결이 언제나 공정하지는 않다고 여길 
만했다. 평민들은 관습법이 사건 발생 전에 미리 적혀 
있으면 자신들에게 유리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 자신이 
처한 법적 입장이 무엇인지를 사제단에 문의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게 되고, 사제단의 해석 권능도 적혀 있는 법의 
문언으로 제약될 것이기 때문이다. - P17

이런 갈등과 논란의 결과 기원전 451년에 10인 위원회
decemviri가 구성되어 관습법을 성문화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이것은 아테네의 유명한 솔론법을 모델로 
삼았다. 10인 위원회는 ‘12판법‘이라고 알려진 법령집을 
완성해서 로마 시민들의 회의체 인민회에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다.

12 판법을 승인한 민회는 옛날 법을 변경하고 새로운 법을 도입한다고 여긴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계속 존재했던 법을 더욱 명확하게 확정한다고 생각했다. 성문화된 문건으로 
채택됨으로써 12판법은 법률lex 이 되었는데, 법률을 
지칭하는 ‘lex‘는낭독한다는 뜻을 가진 ‘legere‘에서 
온 것으로서 법 ius 을 성문화하여 공식적·공개적으로 
선포한다는 뜻이다.
- P18

12판법은 우리가 아는 로마법의 시작점에 해당하며 
공법과 신성법[종교적 사안을 규율하는 법 규정]을 
포함한 법의 전 영역을 다루는 규정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원문은 남아 있지 않지만, 12판법 구절들을 인용한 후대 
문헌들이 워낙 많다 보니그 내용은 대체로 복원되어있다. 
인용된 이런저런 구절들이원래 어떤 순서로 등장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19세기 학자들이 구성하여 현대에 
출간된 12판법의 여러 버전들은 이법률의 체계적 특징을 
확실히 과장하고 있다. 하지만 첫 부분은 소송 개시에 
필요한 피고 소환 절차를 다루고 있고, 끝부분은 소송 
종료 후 판결 집행 절차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밝혀져 있다. - P19

12판법은 모든 사람이 법으로 알고 수용한 내용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분쟁의 여지가 있었거나 논란이 될 만한 
사안을집중적으로 다룬 것이다. 거기 수록된 규정들은 
평민에게 특히 유리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법의 상당히
많은 부분이 이제 고착된 형태로 존재하게 되었으니 
평민들은 자신들의 입지가 어떠한지 알 수 있게 되었다. 

- P19

특히 12판법은 시민이 법원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자구책을 마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법정에서의 
절차를 개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소송 절차를 
상세히 규정해두었다. 공화정 초기에는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피해 보상을 받아내는 것을 도와줄 
정부 인력이 많지 않았고, 법적 절차를 개시하려면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이 여러 수순을 스스로 밟아야했다.
일정한 경우에는 자력구제가 허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공동체의 힘이 개인의 자력구제를 금지할 만큼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2판법은 자력구제를 제도화함
으로써 엄격한 제약하에서만 그것을 허용하겠다는 결단을 
보여준다. - P19

분쟁이 발생하여 당사자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게 되면,
정무관 magistrate 에게로 가야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의 면전에서 개최되는 회의의 목적은 그 분쟁이 시민법 
civil law을적용하여 해결할 수 있는 성격의 분쟁인지, 
그렇다면 어떻게 판결해야 하는지를 정하는 것이다.  - P20

‘정무관‘이라고 번역한 ‘magistratus‘는 로마 공화정 
제도에서 법의 적용과 집행에 대한 궁극적 권한을 가지는 
이를 뜻한다. 폼포니우스의 설명에 따르면, 과거왕정시대에 왕이 가졌던 모든 권한이 공화정 제도에서는 정무관에게 
있었다(법률의견선집, 1.2.2.14). - P20

판결해야 하는지를 정하는 것이다. 공화정이 시작되기 전 
아주 오랜 옛날에는 로마인들도 물이나 불을 이용한 
신판 ordeal에 의존하거나, 각 당사자들이 정해진 숫자의 
서약인을 내세워 그들이 실수 없이 서약 oath 을 마치는지에 따라 분쟁을 해결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공화정에 와서는 시민법을 적용하여 분쟁을 
해결할 경우 당사자들과 정무관이 선정한 사인(때로는 
여러 명의 사인들)에게 사건을 회부하여 그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심판인 index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이 홀로 배심원이 
되는 셈인데, 그는 (아마 처음에는 자신이 직접 아는 
내용에 의존하여) 사실관계를 조사하고 증인의 진술과 
당사자들의 주장을 청취하여 그에 따라 원고 승소 또는 
피고 승소의 판결을 선고했다. - P20

이런 소송을 제기하려는 당사자가 겪는 어려움은 절차의 
첫단계에서 상대방이 정무관 면전에 출석하도록 하는 
것이다. 피고는 분쟁을 매듭짓기 위해 협조할 수도 
있었겠지만, 피고가자발적으로 출석하지 않으면 원고는 
출석을 강제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출석 강제권이 어떤 경우에 사용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사용될 수 없는지가 그 전의 관습법에서는 
명확하지 않았었는데, 12판법에서 원고가 취할 수 있는 
조치들이 무엇인지를 상세히 규정했다. 정무관 면전에 
출석해달라는 원고의 요청을 피고가 증인이 보는 앞에서 
거부할 경우와 피고가 도망가려고 시도할 경우에만 
원고는 강제력을 동원하여 피고를 정무관에게로 끌고 
올 수 있다. 피고가 아프거나 나이가 많은 경우에는 
원고가 적절한 탈것을 제공해야만 피고의 출석을 요구할 수 있도록 규정했는데, 법 규정은 쿠션이 있는 가마일 필요는 
없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정무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감행할 수 있는 행위도 특정되어 있었다. 

- P21

12판법은 밤중에 도둑질을 하고 있는 도둑을 잡거나, 
낮에라도 도둑이 체포에 저항할 경우에는 즉각 살해해도
 무방하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직접적인 
제재를 가하려면 법원의 판결을 받아야했다. 

심각한 신체 상해가 가해진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는 
적절한 배상 금액을 합의하도록 권장되었다. 
합의가 이루어지지않으면 12판법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같은 수준의 상해를 가하는 동해보복 lex talionis 을 
허용했다(눈에는 눈, 이에는이). 

그러한 물리적 보복 가능성을 규정해둠으로써 당사자들의
합의가 촉진되었고, 가해자 가족이 배상금을 마련해주지 
않게나 마련할 수 없는 경우에만 물리적 보복이 실제로 
이루어졌을것으로 짐작된다. 덜 심각한 상해에 대해서는 
동해보복이 허용되지 않았고, 유형별로 미리 정해진 액수의 정액 배상금이 지급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 P21

지금까지 개인 간의 분쟁에 대해서 살펴보았지만, 
사실 로마시대의 개인은 일정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파악되어야 할 경우가 더 많다. 초기 로마법에서는 
가족이라는 단위가 바로 이 집단에 해당한다. 

가족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법이 개입하지 
않았다. 가족 구성원들 간의 관계는 사적인 문제로서 
공동체가 그것을 통제할 권한은 없었다. 가족 외부와의
관계는 호주 paterfamilias가 가족을 대표하여 처리했고, 
가족의 재산은 모두 호주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호주의 남계 후손들은 모두 호주의 가부장권 potestas 
하에 놓여 있었다. 어린이가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가부장권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호주가 사망할 
때까지 그 자손은 누구도 스스로의 이름으로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다. 그 결과 가족의 재산은 흩어지지 않고 
하나로 모여 있을 수 있었고, 가족 전체의 재원은 더 
공고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실제로 가구의 노예나 가부장권하에놓여 있는 자식이 
절도를 하거나 남에게 상해를 가한 경우 그 피해자는 
가해자의 호주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야했는데, 그 이유는 호주만이 그 가족의 자금으로 배상금을 지급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12판법은 이 경우 호주는 손해배상금을 지급할 수도 있고, 돈을 내지 않는 대신 가해행위를 한 노예나 자식을 피해자
 또는 그 호주의 가부장권에복속되도록 넘겨줄 수도 있다고 규정한다(해악물 양도).

- P22

살인이 벌어진 경우에는 손해배상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할여지가 없었고, 정무관이 공동체를 대신하여 
살인범을 기소함으로써 가문 간의 보복 살인이나 
유혈 분쟁이 일어나는 사태를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법 제도는 당사자들이 타협하여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 P23

12판법이 제정된 시기에는 심판인이 지급하라고 판결한 
돈을 피고가 30일이 지나도록 원고에게 지급하지 않을 
경우 원고가 피고를 압박하여 죽음에 이르게까지 할 수도 
있었다. [승소하고도 돈을 못 받은] 원고는 피고를 정무관 
앞에 강제로 끌고 올 수 있었고(이번에는 정중히 출석을
요구할 필요도 없다), 패소한 피고가 여전히 돈을 지급하지 
않거나 피고를 위해 지급을 보증할 든든한 보증인을 
내세우지도 못하면 정무관은 원고가 패소한 피고를 사슬에 묶어 60일 동안 가둬두는 것을 허락했다. 

이 기간 동안 원고는 장이 서는 기간 중 사흘 연속하여 
피고를 시장에 끌고 가서 그가 빚을 못 갚고 있는 상황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하고, 그의 친지나 가족이 문제를 
해결할 수있도록 기회를 줘야 했다. 이래도 빚을 갚지 
못하면 원고는 이불운한 피고를 로마 외의 지역에 노예로 
팔아치우고 받은 대가를 채권자들이 나눠 가질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궁극적인압박 수단으로 작용했다. 

만일 채권자들이 원하면 [패소하고도돈을 못 갚는] 피고를 
살해하여 그 시체를 토막 낼 수도 있었다.
12판법은 꼼꼼하게도 어느 한 채권자가 자신의 몫보다 
더 많이 피고의 사체를 잘라내더라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규정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 포셔가 샤일록에게 사용하게 될 주장["조금이라도 더 많이 또는 더 적게 자르면사형과 전 재산 몰수형을 면치 못하리라"] 미리 예상이라도한 듯 말이다. - P23

나중에는 로마인들 스스로도 12판법에 원시적 규정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인정했지만, 12판법은 법 집행을 위한 
제도를마련하는 데 필요한 국가 인력이 충분하지 않았던시절의 법률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12판법은 시민들이 
스스로 분쟁을해결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제도적 틀을 
제공한 것이다. 자신의 노예나 가족 구성원, 그리고 친지들의 조력을 동원할 수있는 당사자는 그렇지 못한 당사자보다 
더 유리한 입장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 P24

2. 해석을 통한 법의 발전

공화정 시대를 거치면서 12판법의 일부 특징이 변경되긴 
했다. 승소 판결을 받은 채권자들이 채무자를 살해하는 
것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지만 패소한 채무자는 강제 
노동으로 빚을 갚아야 했으며, 나중에는 채무자에 대한 
파산 절차가 도입되어 채무자의 재산을 강매하고 그 수입을 채권자들이 분배했다. 

하지만 12판법이 제정되고 500년이 지나서도 로마인들은 
12판법을 역사가 리비우스 Titus Livius 의 말처럼 ‘모든 
공법과 사법의원천‘이라고 여겼고, 키케로Cicero는 어린 
학생들이라면 모두 12판법을 외워야 한다고 했다. - P24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법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아득한 옛날부터 로마인들 삶의 일부를 이루어온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동시에 법이 합리적 범위 내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바대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공화정의 처음 절반가량 기간 동안에는 불문 관습법이건 
12판법과 같은 성문법이건 법을 해석하는 권능은 여전히 
사제단에게 있었다. 사제단은 법을 진보적으로 해석하기도 했고, 종래의 법에는 없는 새로운 제도를 법 ‘해석‘을 통해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런 해석의 사례로는 가부장권하에 있는 자식들을 
가부장권에서 해방[분가]하는 제도를 들 수 있다. 
호주가 그 자손에 대해 가지는 가부장권은 호주가 죽거나 
자손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12판법 시대에는 
호주가 그 자손과의 관계를 자발적으로 절연하는 법적인 
방법이 없었다. 

호주는 아들을노예와 비슷하게 팔아치울 수 있었는데, 
12판법은 호주가 이 권한을 남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아들을 세 번 팔면 아들이 아버지의 가부장권에서 
벗어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아들을 여러 번 파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구입한 자가 아들을 해방하면 아들은 
다시 그 아버지의 가부장권에 복속되었기 때문이다. - P25

해석을 통하여, 3회 판매에 관한 법 규정은 아버지가 
아들이 분가할 수 있도록 해방하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아버지는 자기 친구에게 아들을 세 번 판매하는 시늉을 
하고 친구는 아들을 매번 해방하는 것이다. 세 번째 팔린 
후 해방되면 아들은12 판법 규정에 따라 가부장권에서 
놓여나게 된다. 
- P25

여기까지는 해석이라기보다는 명백한 어떤 규정을 원래의 
용도 [아들을 노예처럼 판매하는 행위를 일정 수준에서 
제약하고자 하는 용도]와는 다른 용도 [자발적 분가]에 
적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해석은 계속 확장되었다. 12판법은 아들 판매에 
관해서만 규정하고 있었으므로 딸이나 손자 손녀들은 
호주가 아무 제약 없이 노예처럼 팔아치울 수 있었다. 
3회 판매에 관한 규정을 호주로부터의 분가에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아들을 분가하려면 3회 판매가 필요하고 딸이나 손자 손녀를 분가하는 데는 1회 판매만으로 족하다는 
해석이 자리 잡게 되었다. - P26

물론 이런 변화는 12판법을 만든 10인 위원회 위원들이 
상상도 못 했던 용도로 12판법 규정이 변용되어 적용된 
결과라는 점을 많은 시민들은 파악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법률가들 입장에서는 분가 제도를 완전히 새로운 제도 개혁 결과라고 내세우기보다는 12판법에 
명시적으로는 아닐지라도 묵시적으로 이미 내재해 있던 
것이라고 제시하는 편이 더 받아들이기 편했을 것이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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