맺는말
일상적 삶에서 ‘정치 전쟁‘ 해소법 - P310
"정치 이야기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금기라고 하는데 요즘은 가족들 사이에서도 금기가 되는 중인 듯하다. 모두가 조심하는데도 기어이 뭔가 신랄한 논평을 꺼내고야 마는 분들이 있다. 이들은정치적 입장 차로 사적인 관계에 생길 위험보다 상대를 계몽시켜 생기는 공익이 더 크다고 보는 것이다. 그럼 좋겠지만, 계몽이 말로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정치에 관한 한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은 드물다.반면 사람을 화나게 하는 건 한두 마디면 충분하다." - P311
‘양시양비론‘을 다시 보자
사회 전체 차원에서도 꼭 해야할 일이 있다. 우리의 사고 습관과 공론장의 논의 방식에 대한 성찰이다.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었던시절을 오래 겪은 우리에겐 "양시 양비론은 나쁘거나 바람직하지않다"는 고정관념이 강하게 뿌리를 내린 것 같다. 그런데 표현의 자유가 만개하는 정도를 넘어 과잉이 된 오늘날에도 그 고정관념이 유효한지 따져볼 필요가 없다. - P315
"양비론은 양측을 똑같이 비판함으로써 누구의 과실이 얼마나 되는지를 가리기 어렵게 한다. 찬성과 반대를 분명히 가리거나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찬반의 대립 구조 자체를 부정하기때문에 의사결정에 장애가 될 수 있다. 중도적인 입장으로 양측을모두 존중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과실이 더 큰쪽을 유리하게 만들어준다." - P315
양비론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은 내용과 맥락을 따져야지 양비론 자체에 대한 논의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양비론을 펴선 안될 사건이나 상황이 있는가 하면 양비론이 필요하거나 불가피한사건이나 상황도 있는 것이지, 그걸 따져보지 않은 채 무조건 "양비론은 나쁘거나 비겁하다"고 말하는 건 곤란하다는 뜻이다. - P315
2022년 대선으로 인해 두 개로 쪼개진 나라, 대선 이후에도 계속될 ‘증오의 정치‘를 우려하는 이가 많다. 정치인이나 유권자들이 시시비비를 가릴 줄 모르거나 가리지 않아서 그러는 걸까?
지인들과 정치 이야기를 하다가 싸웠거나 작은 말다툼이라도 벌여본 사람이라면 흔쾌히 인정하겠지만, 시시비비의 효용은 팩트냐아니냐를 가리는 수준에 불과하다. 이념과 정치적 성향은 시시비비의 대상이 아니다.
게다가 사람들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른 데다 의제 설정에서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느냐는 ‘선택‘의 기준도 다르기 때문에 시시비비로는 해결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 P318
나는 시시비비보다는 자신의 오류 가능성에 열려 있는 자세나 태도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신앙에 가까운 확신을 자제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생각이 다른 상대방의 견해를 경청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던 시절엔 확신은 물론 ‘광신‘마저 투쟁의 동력으로 필요했고 긍정 평가할 수 있었지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체제하에선, 게다가 지금처럼 사회적갈등과 분열이 극심한 상황에선,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확신이다. 확신은 나의 확신을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을 적으로 돌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 P319
"30년 이상 연구를 해오면서 나는 인간 심리에 관한 매우 중요한 진실을 발견했다. 바로 ‘확신은 잔인한 사고방식‘ 이라는 점이다. 확신은 가능성을 외면하도록 우리 정신을 고정시키고, 우리가 사는 실제 세상과 단절시킨다." 미국 심리학자 엘렌 랭어의 말이다. - P318
그런데 확신을 자제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영국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했듯이, 우리 인간이 삶을 기능적으로 살아가려 한다면 자신의 믿음들 중 일부를 완전히 확실하다고 간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어떤 것들을 확신하지 않고는 다른 어떤 것도 시작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 P318
실제 세상은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다
그렇다면 이런 타협을 해보는 건 어떨까? 개인적인 일에 확신을 하더라도 정치를 대할 땐 확신의 강도를 좀 누그러뜨려보자. 미국 정치학자 E. E. 샤츠슈나이더가 갈파했듯이, "민주주의란스스로 옳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체제" 이기 때문이다. 확신으로 가득찬 사람들 사이에선 타협이나 협치 자체가어려울 텐데 어찌 민주주의가 가능하겠는가 말이다. - P319
우리는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가 실제로 살고있는 세상은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다. 2022년 대선에서 거대양당 후보들을 택한 유권자의 선택은 이분법으로 갈릴망정, 선택의 강도가 모두 똑같은 건 아니다. 강도의 범위를 0.1에서 1까지로 잡는다면, 1이라는 확신으로 택한 이들도 있겠지만 망설임끝에 0.1 이라는 매우 낮은 강도의 생각으로 선택을 한 이들도 있기 마련이다. - P319
분류, 특히 이분법 분류는 폭력적이다. 생각을 달리하는 양쪽의 타협이나 협치가 얼마든지 가능한데도 그게 불가능하거나 나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하고, 그래서 ‘승자독식 정치‘를 정당화하는 심리적 기제로 작용한다면, 이게 폭력적인 게 아니고 무엇이랴. - P320
1960년대 중반 미국의 컴퓨터공학자 로트피자데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전통적인 2진 논리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개발한 퍼지 논리fuzzy logic는 오랜 세월 동안 과학계의 냉대를 받아야 했다. fuzzy란 ‘흐릿한, 모호한, 명확하지 않은‘이란 뜻인데,‘흐릿한 논리‘라는 형용 모순을 용납하기 어려운 사람이 많았던 탓이다. 과학 분야도 그랬을진대 열정이 들끓는 정치에 관한 논의에서 흐릿한 것에 대해 관용을 베풀긴 어려울 게다.
- P320
그러나 시대가 그걸 요구하고 있다. 디지털 혁명은 각자 입맛에 맞는 정보와 뉴스만을 선별적으로 소비하게 함으로써 과거 그어느 때보다 확신에 찬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두렵게 생각해야 할 사실이다. 민주주의는 의심을 근간으로 삼은 체제이기 때문이다. 삼권분립을 통한 상호 견제와 감시가 바로 그런 ‘의심 시스템‘이 아닌가? 확신의 과잉은 민주주의를 위태롭게만든다. - P320
양시양비론이 디지털 혁명의 그런 부작용에 대한 해독제로서 가치가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는 건 어떨까? 나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언론도 각자의 이념과 정치적 성향에 충실하기보다는 ‘두 개로 쪼개진 나라‘의 분열 간극을 좁히는 일에 앞장서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언론을 가리켜 ‘기레기‘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줄어들면 좋겠다. -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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