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언급한 역설들은 하나의 현상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종의 개체들을 단지 그 종적 개념, 즉 ‘인간들‘ 로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인격들‘ 로 부르는 이유이다. - P21

오늘날 우리는 보통 인간과 짐승을 구별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간‘은 동물학적 개념이고, 고대와 
중세 철학은 인간을 동물 중의 하나로 분류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독일어에는 처음부터 인간이
아닌 것을 내포하는 ‘짐승(Tier)‘ 이라는 단어, 
즉 라틴어의 bestia (짐승)‘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 (animal)을 지칭할 때는, 즉 인간과 짐승을 아우르는 용어어야 할 때, 합성어 동물(Lebewesen)‘을 사용하고,
인간을 이성적인 짐승‘ 이라 하지 않고 ‘이성적인 동물‘로 
부르는 것이 예사다. 여기서 다시 인간이 자기 종의 
본보기인 방식은 다른 유(類)의 개별적 본보기가 그러한 
것과는 구별된다는 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 P21

우리는 나라는 대명사의 도움을 받아 우리를 우리 자신들과 관계하는 방법으로 그 특이성을 설명할 수 있다. 
‘나‘ (Ich)는 일종의 참조대상을 표현한다. ‘나‘를 말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나‘, 즉 한 철학자의발명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특정한 동물, 특정한 
인간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특정한 특성을 붙여주는 바로 그사람을 의미한다. 실제로 각자는 ‘나(Ich)‘ 라는 말을 
가지고 그 즉 화자가 자신인 그 사람을 표현한다. 
그런데도 이것은 이 인칭 대명사를가지고 적어도 두 가지 
방법으로 특별한 설명을 덧붙인다. - P21

첫째, 이 표현이 ‘그‘, ‘그녀‘, ‘그것‘, ‘이것‘, ‘바로 이것", 
하물며 ‘너‘라는 말도 해당되지 않는, 실제로 있는 
어떤 사실적인 것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앞에서 나열한 지시 대명사들은 모두어떤 경우에 상상의 
대상을 가리킬 수 있다. ‘나‘라고 말하는 사람은 존재한다. 
이것이 유명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정식의 기초이다. - P22

그러나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나‘라고 말하고 존재하는 그는 누구이며, 그는 어떤 종류의 존재인가?

 ‘나‘라고 말하는 이는 이것을 알지 못하거나 혹은 이것에 
대해 속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이 인칭 대명사의 두 번째 특별함이다. 우리가 앞서본 
것처럼, 어떤 것들은 그것이 이러저러하다는 질적인 
특성으로, 즉 어떤 종류의 표현으로 특정한 유로 분류되는 
그런 것으로 동일화하면, 쉽게 동일화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은 인칭 대명사 ‘나‘를 통한 동일화에서는 
유효하지 않다. 누군가 그가 누구인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에 관해 잘못 생각할 수는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어느 공간, 어떤시간에 있는지 
잘 모를 수 있다. 그는 기억과 시력을 동시에 잃어버린
사고 이후에 "나는 누구지?", "나는 어디에 있지?"라는 
질문을 던질 수있다. 그는 하물며 인간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지시어는 
그 어떤 불확실한 것과 관련되지 않는다. 이 지시어는 
모든 질적 특징들과는 무관한 순수하게 수적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것은, 그 밖에 그가 존재하는 모습의 모든 
것과는 독립적인, ‘나‘라고 말하는 바로 그 존재와 관련된다. - P22

이것을 마치 ‘나‘라는 표현이 순수한 생각하는 사물, 혹은 
말하자면 무에서 어떤 특정한 것, 본질적인 것을 처음으로 
만드는 본질 없는 실존을 지시하는 것처럼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현상에 대한 오해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 우연히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지 않는다. 그는 ‘하나의 나‘가 아니라 세상 어떤 곳에 존재하는 이러저러하게 창조된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는의식을 갖게 되자마자, 자신이 의식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가 존재하고 있다는 지식은 누구인지 
그리고 어디인지의 지식보다 우선한다. 그의 자기 동일화는 어떤 질적 특성을 통해 매개되지 않는다. 

- P22

나는 내가 어떠한 하나의 특정한 이러저러하게 창조된 
본질을 가지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이 본질이 
아니다. "내가 있다."라는 표현은 특정한 시공간의 점에 
현재화 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고, 그러한 현재화를 
요구한다. 인간은 우리가 조용하는 그 밖의 모든것이 
그러하듯 같은 방식으로 그가 무엇으로 있는 것[본질]이 
아니다. ‘인격들‘ 이라는 말은 이 현상과 관련된 어떤 것이다. - P23

인류 전체에 퍼진 변신의 이념이 이 방향으로 진행한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는 인간이 커다란 벌레로 
변신한다. 동화와 신화는 ‘개구리왕‘, 혹은 ‘강아지 남매‘로 
알려진 것처럼 수많은 변신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오비디우스(Ovidius)는 그의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라는 책에서 변신의 신화를 연달아 소개한다. 
새로운 작품들 중에는 특별히 구이마레스 로사의 나의 
삼촌 재규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재규어 안에서 점점 
진행하는 화자의 변화를 재규어의 내부관점에서
경험할 수 있게 하는 독백이다. 
이 이야기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 - P23

소멸과 생성을 통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적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실체 변화는 한 사물이 존재하는 
것을 중지하고 이 질료적인 기체에서 다른 어떤 것이 
생길 때 성립한다. 하나는 소멸하고 다른 하나는 생성되는 
것이다. 이 양자 사이의 연속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질료(hyle)이다. 

오직 이것. 이 양자의 지속적인 실체들의 구성원질이 
남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자연 안에서 계속해서 
체험한다. 유기체가 죽으면 흙이 되고 이것이 다시 새로운 
유기체의 질료가된다. 이것은 악몽, 신화 혹은 문화적 
허구가 전혀 아니다. - P23

반면에 변신의 특징은, 변화 중에도 지속되는 것이 
질료적인 기체가아니라, 우선 인간으로서 실존하고 
‘나‘ 라고 말하는 주체 자신이라는점이다. 이 주체는 
이어서 곤충, 개구리, 노루, 재규어, 혹은 더 나아가
오비디우스의 이야기에서처럼 나무로도 존재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기의 수적 동일성은 종적 
존재의 변신을 거치는 동안에도 계속되고, 때때로 
다시 본래로 변화하며 ‘구제‘ 될 수 있는 것은 항상 
유일하게인간뿐이라는 점이다. 전에 인간인 적이 
없는 동물이 인간으로 변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이런 추상화된 수직 동일성은 꿈에서도 나오는데,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아는 사람을 만난다. 
그가 우리에게 알려진 어떤사람과 전혀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우리는 그가 이러저러하다고 
알고 있다. 우리는 단지 꿈속의 그가 이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아는 것은 무엇인가? 
- P24

우리가 이름은 알지만 이 사람과 명백히 전혀 공통되지 
않는 꿈 사진의 이 사람‘으로 아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여기서도 우리는 모든 질적 공통점으로부터 수적 동일성을 추상한다. 이 모든 예가 허구를 다루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것은 우리가 인격적 정체성을 질적인 특성을 통해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이 추상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인간 종의 
질적인 특성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명백하게도 우리가 누구인지는우리가 무엇인지와 
단순히 동일하지 않다. - P24

어떻든 변신에 관한 동일한 상상은 모든 윤회 사상을 
이끌고 있는데, 심지어 인간이 짐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경우에도 물론 그렇다. 서양의윤회설에서는 인간이 
같은 특성을 계속 지닌, 단지 다른 인간으로 태어나는데, 
이 경우에 우리는 수적 동일성을 질적 정체성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다. - P24

반면에 인도의 윤회설에서는 마술피리의 사제의 말 그대로사실적으로 이해된다. 즉 어떤 이는 또다시 인간이 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인간과 다른 어떤 것이 될 것이고 
그럼에도 동일한 존재로 있는 것은 중단되지 않는다. - P25

반면에 인도의 윤회설에서는 마술피리의 사제의 말 그대로사실적으로 이해된다. 즉 어떤 이는 또다시 인간이 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인간과 다른 어떤 것이 될 것이고 
그럼에도 동일한 존재로 있는 것은 중단되지 않는다. - P25

한 자연적 실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그것이 행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을 통해 보여 준다. "행위는 
존재를 따른다"고 스콜라 철학의 격언은 말한다. 
그럼에도 이것은 엄격한 의미로는 단지 물리적인 사실에 
부합한다. 벌써 동식물 중에는 우리가 "중에서 벗어났다"고 부르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 이미 동물은 단순히 그것이 
무엇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이 무엇인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것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 P25

본질은 ‘지향성 (Ausseinauf)‘이라는 의미의 ‘내면(Innen)‘으로서 훨씬 더 보편적으로 규정된다. 우리가 지향성을 
그렇게 해석할 때만 그것을 동물 일반으로 인식한다. 
관행적으로 우리는 이 지향성을 자기 보존과 종 보존의 
본능으로 해석한다. 동물 안에서 이목적은 사실상 상상으로 현존하는 것처럼 있는 것이 아니다. 동물 안에서 상상으로 
현존하는 것은 먹이, 교미 상대자, 노획물 그리고 위험
등이다. 관찰자인 우리는 이 ‘충동‘을 체계 기능적으로 
해석하고 진화론적으로 설명하는 존재이다. - P25

그러나 그것이 이런 의미로 구성될 수있는 것처럼, 
지향성, 즉 목적론적 포착이 있으면 거기에 또한 
오류가생길 가능성이 있다. 물리적인 영역에서는 
물리학자가 만드는 오류들외에 다른 오류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이 영역에서 어떤 오류를만들지 않는다. 

무엇을 지향하는 경우에 지향되는 그것에 오류가 
생길 수 있다. 그러므로 세 발 달린 토끼는 잘못 형성된, 
혹은 불행한 토끼인 셈이다. 이는 단지 통계적으로 
과반수의 토끼와 구별되는 것뿐만 아니라, 이 구별은 
이 토끼가 자기 생태 환경에 네발 달린 토끼들보다
더 적응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는 이 토끼가 
덜 행복하고 생존 기회가 덜하다는 뜻이다. 
어떤 것을 욕구하는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이 모든 것은 동물이 본래적인 것과 사실적으로 있는 
것 사이에 내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 P26

인간이 동물인 한에 있어서 인간 역시 이 차이에 놓여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차이, 생명(zen)과 
좋은 생명(euzen)의 차이가 모든 고등동물에게 
특징적으로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아마도 이 차이를 
차이로 의식하는 유일한 존재일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단지 인간의 자기 경험에 비추어 
짐승에 관해서나, 우리에게는 한낱 체계일뿐인 
기계에 대해 유비적으로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충동으로 구성되고, 충동에 고유한 차이를 
동반하는 지향성의 현상은 이 차이를 극복하는, 
즉 이 차이에 고유한 생명성의 형상에 한번 더 태도를 취
할 수 있는 존재에게만 나타난다. 

예컨대 인간은 고통속에서 단순한 생명의 손상인 것과는 
다른 무엇을 본다. 방어 혹은 회피 전략은 그것의 유일한 
가능적 반응이 아니다. 인간은 고통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혹은 생명 자체를 고통의 조건으로 
간주하고 부정할 수 있다.  - P26

마지막으로 인간은 자신을 ‘특정의 부정‘의 방식으로 
특정한 성질, 소망, 충동으로부터 멀리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제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이 차이를 메꾸는 것과 
아둔한 자기 인정을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배려 없는 태도 때문에 비난받는 사람의
"그래, 바로 내가 그래." 라는 몰상식적인 대답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이 "그래, 바로 내가 그래." 라는 말은 그것을 가지고 
타인을, 그의 태도를 보고 이런 사람이라고 못 박아 
고정하고 그에게 다른 한 사람으로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용서를 청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가능성을
빼앗은, 자비심 없는 "그래, 네가 그렇지."라는 말에 
대응하는 말이다. - P27

어느 누구도 오로지 그리고 단순히 무엇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수용이란 비동일성을 전제하고 비동일성의 
의식적 획득, 즉 ‘통합‘ (C.G.Jung)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하리 프랑크푸르트(Harry Frankfurt)는 ‘의지의 자유와 
인격 개념‘이라는 논문에서 비슷한 생각을 발전시키고 
있는데 그는 ‘두 번째 의지‘에 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 다루는 핵심은 우리가 우리의 욕구와 의지행위에 
대해 다시한번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점이다. 

- P27

우리는특정한 욕구를 가질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을 것인지 
욕구할 수 있다. 우리는 단지 우리 욕구에대응하는 사물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구 자체를 평가할 수있다. 
우리의 욕구가 이 평가와 일치를 이루는데 성공하면 
우리는 자유롭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욕구하는 것조차 포기한 중독자나 본능적 행위자와 같이 
무력감을 느낀다. 사람은 자신의 충만함을 원하지 않고 
하나의 특정한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이 욕구도 욕구할 수 있다. - P27

오디세이는 한편으로 사이렌의 소리를 듣고 그녀의 노래가일깨우는 갈망을 체험하기 위해,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이 갈망의 희생제물이 되지 않으려고 세심한 예방조치를 
취한다. 그는 자신의 귀는 열어 놓은 채 귀를 틀어막은 
동료들에게 자신을 돛대에 묶도록 조치를 취한다.

플라톤은 가능하다면 젊은이들이 두려움이 만드는 위협을 극복하고 용감하게, 즉 아름다움과 정의로 인식한 것을 
두려움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 속에서 
살도록 해야 한다고 ‘법률‘에서 제안한다.

- P28

‘두 번째 의지‘ 는 동기의 평행선상에서 자기를 관철하는
매번 더 강할 뿐인 욕구(드라이브)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항상 관철하지 않는다. 이 경우 우리는 
평행 자체를 통제하려 시도한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상벌 시스템을 작동시켜, 이런 갈등 상황에서 원하지만 
너무 약한 기본 욕구가 다른 기본 욕구를 통해 강화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흡연 때문에 건강을 해친다는 사실이 흡연에 대한 
현실적 욕구를 끊기 위한 동기로 충분하지 않다. 
그 대신에 보상을 통해 금연을 격려하는 조치를 취한다면 
가능하다. 금연에 대한 상상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그런 보상이어야 한다. 이 경우에 우리는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고 시도할 때처럼 그렇게 자신을 
다루어야 한다. - P28

물론 우리는 여기서 피할 수 없는 한계를 만난다. 이 자기 
영향이라는 기초 방향은 한 번 더 우리의 개입하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른 경우에는 욕구의 욕구라는 무한한 되풀이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 최초의 자발적인, 더는 대상화되지 않는 욕구와 관련된 것을 이제 시작하는 숙고의 단계에서 과제로 삼을 수는 없다. 우선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본질과 내적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인격에 관한 대화에서 중요해 보인다. - P28

이 차이(간격)는 ‘반성‘ 이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러나 반성은 그것의 징후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차이는 
우리가 반성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현존을 규정한다. 

차이는 반성을 가능하게 하지만, 반성에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반성이란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는것이다. 
그러나 차이는 자기 밖으로 나오는 것, 즉 헬무트 플레스너
(Helmut Plessner)가 이름 붙였듯이, ‘중심에서 벗어난 
위치‘로 서술될수 있다. 이 위치란 나-화자의 표시보다는 
삼인칭으로 있는 자기에 관한 이야기가 더 어울린다. 

- P29

어린아이들은 보통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하는데,
어떤 의미에서 일인칭 화자보다도 더 신기하게 말한다. 
삼인칭 인격에서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하면서 인간은 
모든 자연적 동물이 자신의 환경과 관계할 때 취하는 
중심 위치에서 나오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세계에서의 하나의 사건으로 바라본다. 

자신을 그렇게 보기 위해서 인간은 자기 밖, 즉 자기 
유기체적 중심 밖에서 하나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 
도덕성은 자기 대상화의 이 능력과 자기 상대화 때문에 
비로소 가능하다. 그리고 그럴 때만 언어도 가능하다. 

언어는 말하는 중에 상대방의 입장, 즉 말이 전달한 
단어를 듣는 것이 예상되는 현상이므로 자연적 생명의 
표출과 구별된다. 누가 "나는 통증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말은 말 외의 다른 수단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비명을 지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의 
통증을 세상 안에 발생한 사건으로 전달하기 위해 
고통의 직접적인 표현을 억누르고, 다른 이들이
이러한 전달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말하는 것이다.  - P29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직접 표현하는 대신, 그러한 이해를 
가능하게 만드는, 주어진 규칙 체계에만 진입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이제 거꾸로 되었지만 바로 이 체계가 
우리 안에서 무엇보다 앞에서 말한 차이,앞에서 말한 
자기와의 거리를 만들도록 하는 언어이다. 
이러한 언어 때문에 우리가 인격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 P30

인간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다른 모든 사람의 시선을 
가능한 그 어떤 시선도 자신에게 결부시키지 않는 채 느낀다.인간이 이 시선을 체험하고, 이것에 관해 알고, 이를 안다고 믿는 것, 이것들이 인간을 단지 유기 체계로만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어떻게 유기 체계가 생태계를 
구성하고, 그 안에서 자기 고유한 체계의 욕구를 상대화하고모든 만나는 존재를 의미 있도록 배치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유기체적 중심을 벗어난 인간은 어떤 지평에 
서게 된다. 이 지평에서 유의미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유의미성을 구성하는 것이 본성(자연)에
의하지 않는 방식으로 결정된다. 이미 이 방향에서 
이해의 매체는 전혀 자연적이지 않다. 

인간의 자연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언어를 발명하지도 않는다. 인간이 자신의 소통 
발생으로 들어가 자신이 무엇으로 있는 것으로서, 
곧 인격으로서 자신을 실현한다면 언어는 항상 이미 
전제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인격‘ 인가?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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