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갈등

PC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새로운 매카시즘‘이자
 ‘나치돌격대의 사상 통제 운동‘ 인가? 배리 글래스너는
이런 과장된 비난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반격이 작은 
불안요인을 뻥튀기하는 미국 특유의 ‘공포의 문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비난이
미국에만 국한된 건 아니기에 미국 문화의 특수성만으론
설명하기 어렵다. - P32

이 논란은 ‘소극적 자유negative freedom‘와 ‘적극적 자유
positive freedom‘를 둘러싼 해묵은 논쟁과 맞닿아 있다. 소극적 자유는 남의 간섭과 방해를 받지 않고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는 자유이며, 적극적 자유는 
공동체 참여를 통해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 P33

분류를 제시한 이사야 벌린이 지적했듯이, 적극적 자유는 가치에 관한 일원론적 관점을 전제한다는 
점에서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가치 일원론이란, 
"사람들이 믿어온 모든 적극적 가치들이 궁극적으로 
양립 가능하며, 어쩌면 그것들사이에 서로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확신"을 가리키는데, 이 관점에 따르면, 
"국가, 계급, 국민"이라는 주체가 이성이나 역사의 
필연성이라는 이름 아래 진정한 자유의 목표를 
설정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자발적으로 수용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이사야 벌린은 "단일 기준이 있다는 신념이 지성과 
감성에게 공히 만족감을 주는 깊은 원천인 것으로 
언제나 판명되어왔다"며, 그런 만족감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운 것으로 보았다. 

마크 트웨인이나 윌리엄 포크너처럼 인종차별에 
비판적이었던 백인 작가들조차 인종차별주의자로 
몰아 공격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특히 대학들이 
시류에 편승해 앞다투어 PC를 학칙으로 만드는
 ‘과잉 경쟁‘을 한 것도문제를 악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코네티컷대학은 ‘부적절한 웃음‘을 금지시켰고, 
듀크대학은 흑인 학생을 조롱하는얼굴 표정을 찾아내기 
위한 감시위원회를 조직했다. 미네소타대학은 성적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이유로 여학생들의 치어리더 
활동을 금지시켰다. 치어리더 여학생들이 그렇지 않으며 
자신들은 괜찮다고 반발하자 대학 측은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희생자가 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여러 대학에서 PC 위반에 대한 규제와 징계를 하는데 
적용한 원칙에도 무리가 많았다. 예컨대, 누군가를 모욕할 
의도가 없었다고 말하는 건 면책이 안 되었으며, 증거는
필요 없고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충분했다. 미시간대학은
그간의 경험상 피해자가 거짓 진술은 하지 않는 법이라고
주장했다. 스탠퍼드대학에선 백인 학생이 흑인 학생에게
욕을 하는 건 안 되지만, 그 반대는 가능하다는 ‘스피치 코드‘를 제정했다. 피해자의 특권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자유는 건전한 절제를 전제로 한다"

PC 운동의 과잉은 반드시 자제되고 교정되어야 한다는 건 당연하지만, 문제는 그런 과잉이나 일탈이 PC 운동자체에 내재된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런 과잉은 ‘집단 극화
group polarization‘와 ‘정보의 폭포 현상information 
cascade‘으로 설명할 수 있다. 

카스 선스타인은 "사회적으로 선호되는 견해를 지지할 
뿐만 아니라 서로 비슷한 사고방식을가진 사람들은 주로 
서로 간에만 대화를 나눌 것이고, 이는더욱 심한 극단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며 "바로 이런이유로, 많은 캠퍼스에서 정치적 올바름이 정말 극단적이고 때로는 심지어 터무니없는 수준까지 가기도 한다"고 말한다. - P37

그 결과 사회 전반에서 널리 공유되는 보수적이거나
온건한 입장을 주장하는 것이 점점 어렵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느낌을 갖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가 
억압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이게 바로 PC 운동을 비난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 P37

그런데 이런 현상은 모든 운동이 갖고 있는 속성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과잉과 일탈은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런 이유 때문에 그 존재와 가치를 
의심하진 않았듯이 말이다. 그런 과잉과 일탈은 디지털 
미디어로 인해 증폭된 것인데, 디지털 미디어의 부작용은 
모든 분야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PC에만 그로 인한 문제를 PC가 떠맡아야 한다는 건 불공정한 게 
아닌가? - P38

미국에 비해 정도와 범위는 훨씬 약하지만, 한국에서도 
PC 운동의 과잉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런 비판 중엔 타당한 것들도 있지만, 과잉의 정도가 심한 
서구에서 나온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현실‘과 ‘가능성‘의 경계가 모호한 비판들도 있다. PC의 주제와 관련된 ‘종속 
혹은 지배‘의 상태를 비교 평가하면서 비판이 이루어진다면소통의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질 것이다. - P38

문강형준은 "정치적 올바름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여기에 필요한 진리를 자신만 안다는 믿음 때문에 교조적 성향을 지니게 된다"고 했는데, 사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할 것이 바로 그런 
교조적 성향이다. 그런 교조적 성향을 ‘종속 혹은 지배‘의 
상태에 대한 견해 차이와 표현의 방식으로 인한 문제로 
재해석한다면, 좀더 구체적인 논의와 논쟁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 P39

가치 일원론을 경계했던 이사야 벌린이 적극적 자유를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벌린이 적극적 자유에 비해 소극적 자유를 자유 개념의 
핵심으로 삼은 이유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적극적 자유에
대한 옹호가 오히려 자유에 대한 지배로 전도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소극적 자유는 그런 경우가 훨씬 더 드물다는
점이었다.  - P39

1997년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가 사망 직전의 벌린에게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구분에 관한 편지를 쓴것도 
적극적 자유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뜻에서였다. 벌린은 적극적 자유라는 개념을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로 사용했는데, 그중 몇 가지만이 전체주의적인 경향성을 갖고 있었다. 블레어가 적극적 자유 개념을 옹호한 것도 전체주의적인 경향성이 없는 적극적 자유도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블레어가 옹호한 적극적 자유 개념은 
유럽과 북미의 중도좌파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 P39

필요하지만 위험의 가능성이 높은 일에 필요한 것은
절제이지 금지는 아닐 것이다. "자유는 건전한 절제를 
전제로 한다"는 건 누구다 다 동의하는 상식이지만, 
우리가 일상적 삶의 작은 일에서조차 자주 절제하지 
못하듯이, 절제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평등을 
위한 자유를 시도해보기도 전에 자유와 평등은 양립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서둘러 내리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인류 역사가 자유와 평등을 추구해온 긴 여정이었던 만큼 
둘을 양립시키기 위한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절제는 PC에 대한 찬반 양측 모두에게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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