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자유주의는 건국과 함께 우리나라를 규정하는 새로운 이념이 되었다. 1948년 우리나라 제헌 헌법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나라라고 천명했다. 모든 나라의 법과 제도는 그 나라가 표방하는 기본질서를 가지고 있으며, 기본질서는 이념의 기본원리에 기초해 있다. 기본원리가 다르면 기본질서가 다르게 되어, 국민은다른 법과 제도 아래에서 삶을 유지하게 된다. 이념의 기본원리는국가와 개인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의 헌법이 자유주의를 기본원리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우리도 비로소 근대 국가로 출발했음을 의미한다. 자유주의는 근대 서구의 국가들이 절대왕정에서 근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이념적 토대를 제공했다.
우리나라도 자유주의를건국 헌법의 이념으로 채택함으로써 서구의 정치 체제와 경제 체제를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헌법은 한 국가가 표방하는 보편적이념을 규범적으로 선언한 것이기 때문에 그 이념이 곧 현실에서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를 이념적으로 표방하였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정착하여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일반적으로 1987년 이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도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이 현실에서 충분히 실현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개혁이 필요하다.
자유주의의 속성을 밝히는 것은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주의라는 말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사용자는 자기 나름의 분명한 의미를담아 자유주의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듣는 사람은 다른 의미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역사적으로 여러 형태의 자유주의가 존재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자유주의는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여러 형태의 철학적 기초를 가지고 있으며, 그 기초로부터 이끌어낸 자유주의의 이념이나 정책적 함의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이념적 주장에 대해 자유주의라는 말을 공통적으로 사용하며, 각기 다른 철학적 기초에서 자유주의를 말하고 있는 데이비드흡(1711-1776), 아담 스미스(1723-1790), 임마누엘 칸트(1724-1804), 존 스튜어트 밀(1806-1873), 프리드리히 하이에크(1899- 1992), 칼 포퍼(1902-1994), 밀턴 프리드먼(1912-2006), 존 롤즈(1921-2002), 로버트 노직(1938-2002)을 자유주의 철학자라고 부른다. 이들을 자유주의자로 통칭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공통점은 무엇인가?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주의의 특징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의 자유주의를 추적하면 자유주의의 기본 모습이 드러난다. 밀은개인을 인간이 만든 다른 어떤 조직체보다 중요하다고 여겼으며, 개인의 자유가 모든 가치 가운데 우선한다고 믿었다. 밀이 말한 ‘개인의 자유‘는 개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무언가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 곧 개인은 그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자유를 가져야 하며, 모든 인간은 자신의 적절한 노력으로 그렇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밀의 생각은 그의『자유론』에 잘 나타나 있다. 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 책에서 자유에 관한 아주 간단명료한 단 하나의 원리를천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사회가 개인에 대해 강제나 통제(법에 따른 물리적 제재 또는 여론의 힘을 통한 도덕적 강권)를 가할 수 있는 경우를 최대한 엄격하게 규정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그 원리는 다음과 같다.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개인이든 집단이든)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될 수 없다.
밀에 따르면 자유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개인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다. 밀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행위를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개인의 자유를 막아서는 안 된다고주장한다. 상대방을 간섭함으로써 그의 도덕적 이익이나 물질적 이익이 올라가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를 간섭해서는 안 된다.
당사자에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거나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또는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거나 옳은 일이라는 이유에서, 당사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슨 일을 시키거나 금지시켜서는 안 된다. 이런 선한 목적에서라면 그 사람에게 충고하고, 논리적으로 따지며, 설득하면 된다. 그것도 아니면 간청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는다고 강제하거나 위협을 가해서는 안 된다. 그런 행동을 억지로라도 막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일을 하고말 것이라는 분명한 근거가 없는 한, 결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행위에 대해서만 사회가 간섭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개인이 당연히 절대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 자기 자신, 즉 자신의 몸이나 정신에 대해서는 각자가 주권자인 것이다.
그렇다고 밀이 자유의 원리를 모든 사람에게 적용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원리가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굳이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에게만‘ 자유로울 권리를 부여하였다. 그는 ‘미개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도 ‘자유로운 사람‘에 포함시키지않았다. 미개한 사회에 사는 사람과 미성년자를 동일하게 보았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개명시키기 위해서는 독재도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미개인들을 개명시킬 목적으로 그 목적을 실제 달성하는 데 적합한 수단을 쓴다면, 이런 사회에서는 독재가 정당한 통치 기술이 될수도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검토하고 있는 자유의 원리는 인류가 자유롭고 평등한 토론을 통해 진보를 이룩할 수 있는 시대에나 성립되지, 그런 때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밀의 주장 모두를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모든 인간은 인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입장에서본다면, ‘정신적 성숙‘ 여부에 따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발생한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뿐만 아니라 밀의 단서, 곧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한‘과 같은 조건은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있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의 자유에 대한 설명은 여전히 자유에 대한 고전적인 설명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르크스는 개인은 개인을 넘어 존재하는역사의 포괄적인 힘의 통제 아래 놓여 있으며, 개인은 그들의 삶을 형성해갈 수 있는 힘이 거의 없다고 믿었다.
마르크스에게 사회 변화의 도구는 사회 계급이었다. 개인은 사회 계급의 일부가 됨으로써 사회 변화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마르크스는 인간 사회의 변화는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에 밀은 인간의 문제는 혁명이 아니라 개혁을 통해 효과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유주의자들과 같이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였지만, 그가 말하는 ‘자유‘는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와 그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자유‘를 중요한 가치로 인정한다고 해서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의 공통점
자유주의는 18세기에 하나의 이념으로 등장한 이후 끊임없는 진화를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 현대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자유지상주의, 냉전 자유주의, 복지 자유주의, 공동체 자유주의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면서 그 내용이 보완되고 수정되고 재해석되었다. 어떤 학자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나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여러 자유주의들이 존재한다면, 자유주의 사이에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있는가?
자유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이 그것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가?
수정과 재해석을 거듭한 여러 형태의 자유주의가 ‘자유주의‘라는하나의 이름 아래 포섭될 수 있는 공동의 내용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이 책은 다양한 형태의 자유주의들은 ‘가족 유사성‘을 넘어 특정의 공통성을 갖는다는 주장을 수용하였다.
우선 자유주의의 공통성은 역사적으로 자유주의가 다양한 나라에서 전개되면서, 그것이 저항하고 극복하려고 한 것에서 찾을 수있다. 자유주의는 공통적으로 종교적 순응, 타고난 생득적 신분 곧귀족주의적 특권, 정치적 절대주의에 저항하고 반대하였다. 첫째로 자유주의자들은 종교의 자유,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종교와 정치를 일치시킨 중세적 세계관에 대한 반동이었다. 중세에는 교회와 국가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없었다. 국가권력은기독교의 세계관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둘째로 자유주의자들은 귀족 신분제에 반대하였다. 귀족 신분은후천적으로 이룩한 지위가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난 지위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신분에 따라 귀천이 결정되었다. 이런 세계관은 인간의 신분적 평등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유주의는 이러한봉건적인 신분제에 반대하였다. 상당 기간 초기의 자유주의자들은모든 사람이 평등하여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따라서 모든 성인들에게 보통 선거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신분제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이후 자유주의자와 공통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절대주의를 공격하였다. 정치적 절대주의에 대한 공격은 귀족 신분을 부정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세적 신분제에서는 귀족들이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무수한 특권을누렸다. 절대주의 아래서 왕은 법 위에 군림하면서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절대주의를 붕괴시키고 정치권력을 민주 권력으로 대체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지금까지 말한세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유주의를 규정하는 고유한 특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회주의와 같은 다른이념도 그러한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에만 있는 고유한 특성은 무엇일까? 이념으로서 자유주의를 다른 이념과 구별시켜주는 요소는 무엇인가? 존 그레이에 따르면 역사가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있었던 자유주의관점의 존재를 밝혀내긴 했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근대 자유주의의구성 요소라기보다는 자유주의 이전 시기의 한 요소일 뿐이다.
하나의 정치적 흐름과 지적 전통으로서 자유주의, 그리고 뚜렷한 정체성을 지닌 사상적, 실천적 노선으로서의 자유주의는 19세기에 나타났다. 1812년 스페인의 자유주의 정당이 ‘자유주의적‘이라는 말을 정치적 운동을 뜻하는 것으로 최초로 사용하였다.
9) John Gray, Liberalism, Second Edition(Buckingham: Open UniversityPress, 1995), p.xi. 이보다 앞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시대에 아담 스미스는 평등, 자유, 정의에 대한 자유주의의 계획‘을 말했지만, 아담 스미스 이전에 ‘자유주의적(liberal)‘은 인간성, 너그러움, 열린 마음과 같은덕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다양한 형태의 자유주의는 다른 시대와 구별되는 근대적인 인간관과 사회관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존 그레이는 다양한 형태의자유주의에 내재된 공통적 요소로 개인주의적인(individualist) 요소,평등주의적인 (egalitarian) 요소, 보편주의적인(universalist) 요소, 사회 개선주의적인(meliorist) 요소를 꼽았다.
개인주의적 요소는 사회의 집단적 요구에 반대해 개인의 도덕적 우선성을 주장하고, 평등주의적 요소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도덕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사실을 인정하여 사람들 사이의 도덕적 가치를 차별하는 법질서나 정치 질서를 허용하지 않는다.
보편주의적 요소는 인류 전체의 도덕적 단일성을 인정하고 특정 시대의 사회 문화에 대해 부차적인 중요성만을 인정하며, 사회 개선주의적인 요소는 모든 사회제도와 정치 질서를 올바르게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이 네 가지요소가 자유주의의 방대한 내적 다양성과 복합성을 모두 뛰어넘어자유주의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인간관과 사회관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이념이나 운동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단 하나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느슨한 가족 유사성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여러 자유주의가 존재한다는 주장도 하지만, 그레이는 자유주의는 자신이 말한네 가지 구성 요소에 의해 단일한 전통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 가운데 이성의 권위를 인정하는 보편주의적 입장과 사회 개선주의적 역사철학은 자유주의 이론 내부에서 상호 보완해주면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자유주의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를 이룬다고 말한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그레이는 존 로크, 임마누엘 칸트, 존 스튜어트 밀, 허버트 스펜서, J. M. 케인스, F. A. 하이에크, 존 롤즈, 로버트 노직을 자유주의자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현대적 자유주의에 자리를 내주긴 했지만, 양자는 단일 전통 안에 있으며, 자유주의의 정체성은 변화하면서도 지속성을 지닌 인간관과 사회관에 의해 유지된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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