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간의 감관을 위해 감각적인 것에서 이끌어 낸 예술작품
지금까지 우리는 예술작품이 인간에 의해 제작되었다고 하는 측면을 고찰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인간의 감관을 위해 산출되며 따라서 또한 다소간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조달된다는 두 번째 규정으로 넘어가야만 한다. 이러한 반성은 예술이 감웅을, 그것도 더 자세히 말해 우리에게 적합한 쾌적의 감응을 자극하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식의 고찰을 유발했다. 이런 고려에서 예술의 연구는 감의 연구가 되었고, 도대체 어떤 감응들이 예술을 통해 자극될 수 있는지, 그것이 예를 들어 공포와 연민이라 하면, 이런 것들이 도대체 어떻게 쾌적할 수 있는지, 불행의 관찰이 어떻게 만족을 보장할 수 있는지 등을 묻게 되었다. 이런 방향의 반성은 특히 모제스 멘델스존의 시대부터 나타나며, 그의 저술들에서는 그러한 고찰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감응은 정신의 모호하고 무딘 영역인 까닭에 그러한 연구는 크게 진척되지 못했다. 감응되는 것은 매우 추상적이고 개별적인 주관성의 형식에 휩싸여 있으며, 따라서 감홍의 차이들도 역시 전적으로 추상적일 뿐 사태 자체의 차이들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예술작품은 혹여 아무 감응이나 자극하는 것이어서는 안되며 왜냐하면 이 경우 예술작품은 이러한 목적을 웅변술이나 역사 서술, 종교적 교화 등과 특별한 차이 없이 공유할 것이기 때문에 다만 미적인 한에서의 감을 자극해야 하므로, 반성은 미를 위해 이제 미의 고유한감 응을 또한 찾아내고 미를 위한 특정한 감각을 발견하는 일에 탐닉하게되었다. 그럼에 있어 그러한 감각은 본성적으로 확정된 맹목적 본능이이 본능이 이미 즉자대자적으로 미를 식별한다고들 하는데 아니라는 사실이 바로 드러났으며, 그리하여 그러한 감각을 위해 교양이 요구되었고 또한 교양 있는 미감이 취미로 불리게 되었으며, 또한 취미는 비록 미를 교양 있게 파악하고 발견하지만 직접적 감응의 방식에 머물 도리밖에 없다고들 이야기되었다.
추상적 이론들이 어떻게 그러한 취미감각을 육성하려 시도했는지, 그리고 그 자체가 어떻게 하여 피상적 일면적인 것에 머물렀는지에 대해 우리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런 입장들의 시대에는 한편으로 보편적 명제들에 결함이 있었거니와 다른 한편 개별 예술작품에 대한 특수한 비판도 좀 더 규정적인 판단을 정하는 방향보다는 (왜냐하면 이를위한 수단이 아직 없었으므로) 오히려 취미 일반의 계발을 촉진하는 방향을 취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양도 또한 비규정적 상태에 머물러 있었으며, 다만 미가 어디에 어떻게 현전하는 직접 발견될 수 있도록 미감으로서의 감응을 반성을 통해 무장시키려 노력했을 따름이다. 그런데 취미에는 사태의 깊이가 은폐된 채 남았으니, 까닭인즉 그 깊이는 감각과 추상적 반성에 그치지 않는, 충만한 이성과 견실한 정신을 요구하는 반면, 취미는외적 표면에만 감응들은 이 주위를 유희하며 또한 여기서는 일면적 명제들이 용될 수 있다. 그 때문에 소위 좋은 취미라는것은 좀 더 심오한 일체의 작용들 앞에서 공포를 느끼며, 사태가 언표되고외면성과 부수성이 사라지는 곳에서 침묵한다.
왜냐하면 심오한 영혼의 위대한 열정과 움직임이 열리는 곳에서는 취미의 미세한 차이나 개별적인 것에 얽매이는 잡동사니 취향은 더 이상 문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취미는천재가 그러한 바닥을 성큼 넘어감을 느끼며 그의 힘 앞에서 뒷걸음치면서 안절부절 더 이상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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