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약이 폐기되고 붕괴된 지 2천여 년이 되었다. 크게 보면 멀다 할 수없겠으나 이미 계고할 곳이 모두 없어져버렸다. 얼른 크나큰 인물이 나와서 모조리 한 번 정리해야 할 텐데, 그것이 언제일지 알 수가 없다. 오늘날 세상은 변하고 시대는 타락하였으니 아마도 필시 ‘큰 열매는먹지 않는‘ 이치가 있으리라.
위 글에서 주자가 희망한 ‘크나큰 인물‘이란 곧 ‘성인‘이다. 2천여 년 동안이나 폐기되고 붕괴되어 도저히 계고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린 예를 새롭게 정리할 인물로 주자는 성인을 희망했던 것이다.
이때 ‘정리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른바 고례의 형식과 절차들을계고할 수 있도록 해명해낸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현실에 적합한 새로운 형식과 절차들을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도통은 성리학적 관점에서 정리한 "유학의 참 정신이 전해 내려온 큰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정• 주계열의 성리학자들은 자신들의 유학적 학문경향을 ‘도학‘이라 명명하고, 이의 사상적 계보를 도통‘이라는 이름으로 정립한 것이다. 이때 ‘도학‘이라는 말은 다른 학파와 사상에 비해 자신들의 학문이 ‘도덕적 우월성‘과 ‘참된 진리‘를 담보하고 있다는 절대주의적 태도를 반영하고 있으며, 따라서이를 계보화한 ‘도통‘이라는 표현에도 역시 그러한 절대주의적 태도가 깃들어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절대주의적 태도에는 필연적으로 정통ㆍ비정통의 시비를 야기할 수 있는 소지가 내재해 있다. 따라서 ‘도통‘은 노. 불과 같은 유학 이외의 사상에 대해 ‘이단‘이라는 이름으로배척하는 논리로 작용하였고, 같은 유학 내에서도 한·당의 유학은 ‘기송사장‘이라는 이름으로 평가절하하는 논거로 활용되었으며, 송대의 신유학 내에서도 상산 육구연 (1139-1192)이나 용천 진량(1143-1194) 등이 추구했던 사상경향에 대한 배격의 이유가 되었다.
禮 인식의 철학적 정립
1) 16세기 조선의 예 인식 동향
예의 형식보다 본질을 중시하고 주례의 정신을 ‘기인‘의 틀에 담아 이를 유학적 이상으로 실현코자 한 공자의 義중심 예관을 통해유학의 근본적 문제의식이 무엇이고 본질적 좌표는 어디에 설정되어야하는지를 제시한 예학의 시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주자가 공자의 이러한 예관을 토대로 하되 도통론에 입각하여 예 주체의 전환을 시도함으로써 학문의 권위자가 곧 예의 주체임을 확인하는 한편, 당위로서의 예를 존재의 실현이라는 철학적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리‘ 중심의 성리학적 예관을 확립하였음도 검토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이러한 공자와 주자의 예관이 퇴계 예학사상에 내원으로서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바꿔 말하면, 퇴계가 공자와 주자의관을 연원으로 삼아 자신의 예학사상을 어떻게 형성 · 전개해 갔는지를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퇴계 예학사상의 성격을 구명하기 위해 그의 문제의식에 대한 검토부터 진행할 필요가 있다.
모든 학문과 사상은 반드시 학자 자신이살다 간 시대의 자장 안에서 그 시대가 양산한 사회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동력으로 삼아 형성 · 발전한다.
이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또는 윤리적 성격이 강한 유학의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 없으며, 특히 예학이 갖는 사회철학적 또는 윤리철학적 특성에 비추어 보면 더욱 그렇다. 따라서 퇴계의 예학사상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그의 철학적 문제의식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은 논의의 맥락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그의 문제의식을 조망하게 될 것이다. 하나는 퇴계가 16세기 조선의 예 인식을 의리 중심으로 변화시킨 것과 관련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학문적 ·사상적 이론들, 즉 ‘學‘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관한 실천적인 문제의식이다.
16세기 조선은 예학사의 시각에서 볼 때 중대한 전환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이 시기를 변곡점으로 하여 조선에서는 예에 대한 근본적인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첫째, 16세기 조선에서는 예의 주체와 관련한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즉, 16세기 이전 조선에서는 국가가 주체가 되어 예를 국가질서 확립을 위한 교화의 수단으로 활용했었다면, 16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로 말미암아 예는 존재의 실현과학의 구현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수용되었다. 이때 예의 주체는 당연히 학자들이 된다.
둘째, 이러한 예 주체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예의 근거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진행되었다. 즉,학자들 스스로 예의 주체임을 자각하고 예 연구를 심화시켜 나감으로써, 국조오례의로 대표되는 조종성헌로뿐만 아니라 주자가례와삼례서(의례ㆍ예기ㆍ주례)등 이른바 古禮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각도에서 예의 근거들을 모색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결과적으로 예의 권위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즉, 조종성헌과 성현고례가 충돌을 빚을 경우 점차 성현고례에 더욱 큰 권위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인식이 변화되어 갔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주자의 도통론에 관한 검토에서 확인했던 바와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예란 국가가 제정함으로써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의리에 부합함으로써만 권위를 갖게 된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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