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당시 상황을 무도한 세상이라고 진단하고 이러한 당시의 흐름을 바꾸어보고자 노력했다. 공자가 천하의 유도와 무도를 판단하는 지표는 예악과 형벌을 운용하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의한 것이었다.
천하가 유도하면 예약과 정벌이 천자에게서 나오고, 천하가 무도하면 예악과 정벌이 제후에게서 나온다.
여기에서 말하는 ‘예약‘과 ‘정벌‘은 정상 혹은 비상 상황에서 취하게 되는 정치적 행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주례에 제정된 내용을 대표하는 개념들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운용하는 주체가 천자라는 것은 곧 주례가 실현되고 있다는 뜻이고, 그 주체가 제후라는 것은 곧 주례가 붕괴되었다는 뜻이다.
권력을 가졌다는 것은 곧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뜻이다. 특히 최고권력자의 ‘힘‘은 누군가에 의해 제재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제어하지 않으면 ‘무소불위‘가 될 수 있다. 주례가 추구한 질서는 각각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위치에 따른 한계를 자각하고 그 한계를넘어서지 않을 것을 전제로 보장된다. 그런 의미에서 수많은 예의 조문들은 각각의 한계에 대한 규정들이며, 이러한 규정들은 ‘힘‘의 오용 내지 남용을 방지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예란 힘의 논리보다 높은 차원에서 힘을 제어할 수 있는 합의된 ‘권위‘라고 할 수 있다. ‘예괴악붕‘의 시대는 ‘힘‘의 이동과 함께 도래하였다. 천자에서 제후로 다시 제후에서 대부로 ‘힘‘이 이동하면서, 예는 자신의 본래적 ‘권위‘를 잃고 ‘힘‘의 논리에 의해 조작되고 농락되었다.
원칙이 결여된 권형짐작은 상황논리에 매몰되고, 권형짐작이 작동하지 않는 원칙은 완고한 교조가 된다. 그래서 공자는 "군자는 천하에서꼭 그래야만 한다는 것도 없고, 꼭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없으며, 의와 함께할 뿐"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꼭 그래야만 한다는 것도없고, 꼭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없다"고 한 것은 모든 상황에 항상 권형짐작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뜻이고, "의와 함께 한다"는 말은 그 모든 권형짐작은 반드시 ‘원칙‘에 따를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렇게 의리는 개념은 첫째, 사사로움을 극복하고 공공성을지향한다는 점과 둘째, 원칙에 근거하여 권형짐작을 수행함으로써 적절성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예의 본질이 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중에 전자가 더욱 본질적인 것으로, 후자에서 말하는 원칙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예가 현실에 구현될 때 합당함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행례의 주체가 사사로움이 아닌 공공성을 지향하는 방향에서 권형짐작을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공공성에 대한 지향이 곧 원칙의 기조 위에서 권형짐작을 작동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안연이 인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를 이기고 예를 회복한다면 인하다 할 것이다. 어느 날 자기를 이기고 예를 회복한다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인을 하는 것이 자기에게 말미암지 남에게 말미암겠느냐?" 안연이 말했다. "그 세목을 여쭙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
‘도통론‘을 통한 예 주체의 전환
퇴계의 예학사상에 가장 직접적이고 지대한 영향을 끼친 단연 주자이다. 퇴계가 주자로부터 이기론과 심성론은 물론 수양론에 이르기까지 학문사상 전반에 걸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예학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는 퇴계 예학의기본자료로 평가받는 [퇴계상제례답문]에서 주자를 가장 많이 고거하고 있다는 사실이 단적으로 입증해주고 있다.
주자는 형식보다 본질을 중시했던 공자의 예관을 기본적으로 계승하면서도 당위로서의 예의 근거를 천리와 연계시킴으로써 존재와 당위를 일치시키는 철학적 차원의 예관을 제시했다. 이는 성리학적 사상체계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는 독특한 예관으로, 퇴계 예학사상의 본원적 토대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