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심도심과 기질변화
감각과 사고 기능으로 이루어진 일반인의 지각은 비록 동물에 비해서는월등하지만, 성현과 달리 소당연과 소이연의 이치를 인식해서 깨달을 수없다고 보는 이이는 처음부터 이황과 지각론적 관점이 달랐다.
이러한 차이는 결국 성혼과의 논변을 통해 "기가 발하고 리가 타는 한 가지 방식만이 있다"는 주기론적 지각 이론으로 귀착되었던 것이다. ‘기발이승‘이라는 하나의 방식으로만 지각이 성립된다는 주장은, 외부 사물에 대한 감각 경험으로부터 독립된 어떠한 내적 발동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이는 이에 대해 "생각건대 퇴계는 안에서 나온 것을 도심으로 여기고 밖에서 느낀 것을 인심으로 여긴 것이요, 나는 인심도심이 모두 안에서 나온 것이지만 움직임은 모두 밖에서 느낀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이황 또한 사단도심을 포함한 모든 지각작용에는 내적 원리의 발동 이전에 기에 근거한 외감이 필수적으로 전제됨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각 내용을 살펴보면, 사단도심 같은 도덕적 감정은 외감과는 별도로 내적 도덕이성이 발현한 것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사단도심이 칠정인심과 달리 당위로서 자각된다는 점에 있었다. 이이는 바로 이 점을 부정한다. 즉, 마음의 지각 작용은 외물의 감응에 말미암되 지각하는 까닭이 개입한다는 형식만을 말할 수 있을 뿐, 사단과 칠정, 인심과 도심의 내용적 차이는 지각상에서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
가만히 퇴계의 뜻을 상세히 살펴보니, 사단을 내부에 말미암아 발현한 것으로 여기고 칠정은 외부를 감응하여 발현하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중락…) 비록 성인의 마음이라도 감응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없으니, 반드시 감응하여 움직이도 감응한 것은 모두 외물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말하냐하면, 부모를 느껴서 효성이 움직이고, 임금을 감응하여 충성이 발동하며, 형을 느껴서 공경이 움직이니, 부모 · 임금 . 형이 어찌 안에 있는 이치이겠습니까?
천하에 어찌 감응 없이 안에서 말미암아 스스로 발현하는 정이 있겠습니까? 다만 감응한 것에 바르고 삿됨이 있으며 움직임에 지나치고 모자람이 있어서, 이에 선악의 구분이 생길 뿐입니다.
이황의 주장처럼 사단과 칠정, 인심과 도심은 도 내부의 지각내용에 의해 선험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지각은 경험적이므로, 성인이라 하더라도 외물의 감응 없이 감정이 발동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부모를 감지하고 느껴야 효도의 마음이 발동하게 되는데, 이때 효도의 원리는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임금에 대한충, 형에 대한 공경의 원리는 모두 내부에 있지 않고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바르고 삿된 것을 가르는 기준으로서의 규범적 예이다. 부모에게는 효도해야 하고, 임금에게는 충성해야 하며, 형에게는 공경해야한다는 예의 절목이 곧 바르고 삿됨,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위에서 외물에 반응하여 움직인 결과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있다는 것은곧 예의 절목에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부모에 대한 효도와 임금에 대한충성, 형에 대한 공경은 이미 외부에 규정되어 있는 예의 절목을 따르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이는 다음처럼 말한다. "그렇다면 천지는 성인의 준칙이며, 성인은 보통사람의 준칙입니다. 그 이른바 수양의 기술이란 성인이 이미 완성한 법도를 따르는 것에 불과합니다. " 성인의 만든 법도 즉 예의 절목에 맞는 경우는 선이 되고 그렇지 않고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경우는 악이 된다는 것이다.
만약 선악을 구분하는 기준이 마음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감정과 행동의 결과가 외적 규범에 부합하는가에 놓여 있다면, 마음에내재해 있다고 말해지는 인ㆍ의 · 예지의 원리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이의 어록에는 제자 한 명이 "마음의 지각이 기인지 리인지"에 대해 묻자 "능히 지각할 수 있는 것은 기요 지각하는 까닭은 리이다"라고 대답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이어서 제자가 지각은지의 틀에 속하는지를 묻자 이이는 다음처럼 대답했다. "지각은 마음이니 인 의 · 예·지의 성을 싣고 있다. 그러므로 사단의 정은 머물러 있는 곳에 따라 발현하니, 이것이 마음의 지각이다. 만약 지각을 지의 틀에 배속시킬 뿐이라면, 인의는 작용할 곳이 없게 된다.
말하자면, 이이는 인·의·예·지가마음에 있긴 하되, 그것은 사단의 지각 내용적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각 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까닭이나 형식적 원리라고 본 것이다.
마음은 이러한 지각의 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머물러 있는 상황에 따라 발현하되 외적 예의 절목에 부합하면 사단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칠정이 된다는 것이다. 선악을 판별하는 기준은 내적 원리에 있지 않고 외부의 규범에 맞는지 여부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감정이 예의 절목에 부합하는지 중절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계산하고 비교하며 헤아리는 의의 작용에 달려 있다. 즉, 정에 의의 작용이 부가될 때 비로소 심이라고 칭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인심과 도심은 정과 의를 겸하여 말한 것이지, 정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칠정은 감정 일반으로서 정이 되고 그 가운데 절도에 맞는 것을 사단이라 칭할 뿐인데, 감정의 결과에 대해 의가 공적 규범인 도의를 위하면 도심이 되고 개인적인 형기만을 위하면 인심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심과 도심은 지각 내에서 선험적으로 대립하는 것으로서 자각되는 것이아니라, 감정이 일어난 후 헤아려서 의도하고 목적하는 것에 따라 두 가지중 어느 하나로 결정되는 것이다. "인심과 도심은 어떤 것은 형기를 위하고 어떤 것은 도의를 위하는데, 그 근원은 비록 하나이지만 그 유출된 것이 이미 갈라진 것이니, 진실로 양변으로 분리하여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양변으로 분리하여 설명한다는 것은 인심과 도심이 지각 내에서대립적으로 자각된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서 결과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만, 처음에 인심이었다가 노력 여하에 따라 도심이 될 수도 있으며, 반대로 도심이었다가 다시 인심으로 전락할 수도 있게 된다. 이것이 인심과 도심은 서로 처음과 끝이 될 수 있다"는 설이다.
이이는 비록 만년에 《인심도심도설》에서 인심을 인욕과 다르게 보되 도심과의 대립성을 인정하고 도심의 주재와 인심의 청명을 강조하는 정론을 확립하게 되지만, 전체적으로 종시설과 만년설 모두 도심과 인심을 지각된 내용에 따라 성명과 형기, ‘리발‘과 ‘기발‘로 구분할 수 있다는 주희와 이황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다. 선악은 마음의 지각 차원에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규범에 부합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자는 ‘선과 악이 본성 가운데 두 사물로 상대하여 있다가 각자 나오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대체로 선과 악은 분명히 두 가지이지만, 오히려 상대하여 각자 나오는 이치란 없습니다. (중략) 리의 본연이란 것은 진실로 순선하지만, 기를 타고발용할 때 선악이 이에 나뉩니다. 다만 기를 타고발용할 때 선한 것이 있고 악한 것이 있음을 보되 리의 본연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대본을 인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단지 리의 본연만을 보되 기를 타고발용한 것이 혹 흘러서 악이 됨을 알지 못한다면, 적을 자식으로 여기는것입니다. 이 때문에 성인은 이를 근심하여 정이 곧바로 성명의 본연을 이루는 것으로써 도심이라 지목한 것이니, 사람들로 하여금 존양하여 그것을 확충하도록 한 것입니다. 정이 형기에 엄폐되어 곧바로 성명의 본연을 이룰 수 없는 것을 인심이라 지목한 것이니, 사람들로 하여금 그 지나치고 미치지 못함을 살펴서 절도 있게 통제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것을 절도 있게 통제한다는 것은 도심이 행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인간의 형제와 모양은 천성입니다. 인심 또한 어찌 선하지 않겠습니까? 그 지나침이 있거나 미치지 못함이 생기는 것으로 말미암아 악으로 흐를 뿐입니다.
이이는 리의 본연이 순하다고 함으로써 표면상 맹자의 성선설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리의 본연은 선악을 떠난 가치적인 중립적 상태라고 봐야 한다. 만약 리가 순선하다면, 그것에 의해 선한 도심과 그렇지 않은 인심이 지각 상에서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이에 있어 그것은 부정되기 때문에, 선악의 기원은 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리의 본연이 기를 타고 발용하여 현상화될 때 그 상태가 선한지 악한지, 인심인지 도심인지는 지각 차원에서 구별될 수 없는 것이다. 기가 유행할 때 선악을 결정하는 기준은 감정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 없이 절도에 맞는가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일반인은 지각 상에서 그것을 인지할 수 없기 때문에, 성인은 사람들이 선과 악, 인심과 도심을 분별하고 수양의 실천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인심과 도심을 규정하고 그것을 구분하는 객관적 기준으로서의 예를 제정했던 것이다. 리의 본연을 그대로 발현시킨 마음은 감정이 절도에 맞는 상태로서 도심이라고 명명하되, 육체적 형기에 가려진 마음은 감정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여 절도에 맞지 않으므로 인심이라고 칭한것이다. 일반인은 자신의 감정 상태를 객관 규범에 비추어 헤아려서 그것이 도심이면 존양하고 확충하며, 그것이 인심이면 그 과불급을 절도에 맞도록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도심이 인심을 통제한다는 것은 둘의 병존과 갈등상태를 말한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심적 상태를 살펴서 성인이 만든 규범으로서의 예의 절목에 맞도록 제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의 발동이 객관적 예의 절목에 맞도록 주재하기 위해서는어떤 수양법이 필요한가? 기가 유행하여 감정이 발동할 때 절도에 맞도록하는 것은 의가 살피는 것에 달려 있으므로, 의를 성실하게 하는 성의공부가 자기수양에 있어 가장 우선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의의 작용이란 마음의 기에 의존해 있으며, 심리적인 기는 몸의 전체적인 ‘형체와 모양‘을 결정하는 심리 -육체적 기질에 속한 것이므로, 기질을 변화시키는 공부가 가장 근본적인 것이 된다. 기질 변화가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이유는, 인심과 도심을 구현하는 데 있어 리와 기의 본연과 유행의 상태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이는 다음처럼 말한다.
도심은 성명에 근원하였으나 발하는 것은 기이니, 이것을 리발이라고 하는것은 불가합니다. 인심과 도심이 모두 기발이나 기가 본연의 리에 순한것이있으면 기 또한 본연의 기이므로 리가 본연의 기를 타서 도심이 되는 것이며, 기가 본연의 리에서 변한 것이 있으면 또한 본연의 기도 변하므로 리 역시 변한 바의 기를 타서 인심이 되어 지나치기도 하고 미치지 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이는 도심이 성립되려면 본연의 기와 본연의 리가 결합해야만 하며, 반면 인심은 본연의 리에서 변한 특수한 이치와 본연의 기에서 변화게 된 특정한 상태의 기가 결합하여 성립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리에본연지성에 해당하는 본연의 리와 기질지성에 해당하는 분수의 리가있는 것처럼, 기에도 본연의 기와 특수한 상태로 변질된 기질의 기가 있다는 것이다. 본연의 리와 본연의 기가 결합하여 성립된 도심은 본연의 순수한리(성)를 보전하고 있는 것이지만, 발동하는 주체는 여전히 심리적 기일 수밖에 없다.
일반인의 심리적 기는 항상 유동적으로 변화하여 불안정한 것이고, 더구나 "기가 리에게서 명령을 듣고 안 듣고는 모두 기가 하는것이요 리는 작용함이 없기 103 때문에, 일반인의 경우에는 늘 인심의 불안정하고 편향적인 심적 상태에 머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성인은 형기가 리에게 명령을 듣지 않음이 없어서 인심 또한 도심이니, 이것은 마땅히 따로 의논해야 할 것이요 똑같이 한 가지 말로 뒤섞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성인의 기질은 순수하고 뛰어나서 심리-육체적인 기질이 본연의 기의 상태에 가깝기 때문에 항상 본연의 리를 곧바로 이루지만, 일반인의 기질은 성인과 달라서 항상 불안정하고 편향되어 있기 때문에 본연의 기의 상태를 회복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인은 도심을 이루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텅 비고 밝은지각 능력을 가지므로 기질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즉, 일반인의 지각은 성인처럼 이치를 인식하고 실천할 수는 없지만, 동물과 달리 심리-육체적 기질을 성인과 같아지도록 노력할 줄 아는 인지 능력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로지 인간만이 성인이 되고자 하는 수양 공부가 가능하다.
이이에 있어 기질의 변화란 이렇듯 일종의 심리학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기질 변화에 있어 그 기준과 목표로서 성인의기질은 어떤 것이고 무엇에 근거해서 변화시켜야 할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이이에 의하면, 일반인은 심리적 기질의 가변성과 편향성으로 인해 리와 기의 본연 상태를 대부분 상실한 상태이고, 이황이 말한 리발과 같은내적인 도덕성의 발동도 부정하기 때문에, 결국 기질을 변화시키기 위한 기준이나 모범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모범이 되는 성인의 기질은 구체적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단지일반론의 차원에서 본연의 기를 온전히 보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다만, 성인은 책을 써서 중요한 가르침을 밝혀놓았으며, 여러가지 예법들을 제정해서 사회질서를 유지하도록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반인은 독서를 통해 예법을 궁리하는 지적 공부가 필요하며, 또한 극기복례와 같이 예가 아니면 보거나 말하지도 행하지도 않는 실천적 공부도 필요하다.
실천적 공부는 특정한 상황에서 자신의 심리적 기질이 내보이는 특정한 반응양태나 경향성을 살펴서 그 치우치고 편벽된 것을 예법에 비추어 교정하는 교기질과 바람직한 기를 보양하는 양기공부로 구분할 수 있다. 예법에 대한 지적인 공부와 실천적 공부 가운데어느 것에 더 중점을 두고 행할지는 자신의 타고난 기질에 따라 결정해야한다.
기가 맑고 질이 순수한 사람은 지혜와 행을 힘쓰지 않고도 능하게 되어 더할 것이 없습니다. 기는 맑으나 질이 순수하지 못한 사람은 알 수는 있어도 행할 수는 없는데 만일 궁행에 힘써서 반드시 성실해지고 독실해지면, 행실이 바로 서서 유약한 사람도 강해질 수 있습니다. 질은 순수하기가 탁한 사람은 행동할 수는 있으나 잘 알 수는 없는데, 만일 묻고 배우는 데 힘써서 반드시 성실하고 정밀하게 하면 지식에도 통하여 우매한 자라도 명석해질 수 있습니다.
기가 맑은 사람은 지각 능력이 뛰어나고, 질이 순수한 사람은 행동이 올바르니, 기질이 맑고 순수하면 궁리의 지적 공부나 거경 · 여행의 실천 공부에 힘쓰지 않아도 자연히 수양의 효과가 잘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기는 맑지만 질이 순수하지 못한 사람은 알 수는 있지만 행할 수는 없으니, 궁행에 힘쓰면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
반대로 질은 순수하지만 기가 탁한사람은 행동은 잘 할 수 있지만 지각 능력은 떨어지니, 궁리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사람은 자기 기질의 단점이 되는 것을 예를 기준삼아궁리와 여행 공부를 지속적으로 해나가면 기질을 점차 변화시켜서 성인과 같은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좀 더 중요한 것은 역시 교기질의 실천적 궁행이다.
아, 그런데 절묘한 세상에 기예를 가진 백공은 있으나 학문을 하는 사람 중에 그 기질을 변화시킨 자를 보지는 못하였으니, 이는 다만 그 지식을 넓히고 언론에만 힘을 쏟는 데서 온 결과입니다.
그리하여 너무 굳센 자는 끝내 부드러운 선을 갖지 못하고 부드러운 자는 끝내 강한 선을 갖지 못하여, 탐욕한 자가 청렴해지고 참는 자가 자애로워지고 경박한 자가 신중해지는 것을 아직 볼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실제 노력하는 일이 백공의 기예에만 있을 뿐이오, 학문에는 없다는 것이 되니, 얼마나 탄식할 노릇입니까.
세상에 기예를 고도로 발전시킨 사람들은 흔히 있지만, 지금 학문하는자들 중에서는 실질적으로 기질을 변화시켜서 성인의 수준에 이른 자는없다는 것이 이이의 한탄이다. 학자들은 단지 지식을 넓히고 언론에만 힘을 쏟을 뿐, 자기의 기질적 단점과 편향된 부분들을 교정하고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교기질의 궁행 공부가 좀 더중요하다는 것이다. 교기질 공부를 지속적으로 실천해서 조금씩 치우친 기질을 고쳐나가는 노력이 축적될 때, 비로소 기질은 중용의 덕을 습득하게 되어 원만해질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이는 심리-육체적 기질 개념에서 출발해서 도덕 심리학적인 맥락에서 자신의 독특한 수양론을 구축하였으니, 그것은 곧 지적이고 실천적인 기질 변화의 공부로 귀착되는 것이다.
특히, 율곡은 외적인 예법이나 규범을 기준으로 자신의 편향된 기질을 교정하는 교기질과 양기의 실천공부가 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요청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제 율곡철학에 있어 지각론과 인심도심론과는 다른 맥락에 있다고 여겨지는 본체론적 현상학에 대해 살펴보자.
리통기국과 리기지묘
이이의 "리는 통하지만 기는 국한된다"는 명제는 일반적으로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전제 가운데 하나인 "리는 하나이지만 나뉜 것은 다르다는 것의 율곡철학적 버전으로 간주되어 왔다.
예를 들어, 배종호는 다음처럼 리통기국을 설명한다 "생각건대 이일분수설은 리를 중심으로 리일과 리분수를 체용일체, 따라서 현상본체의 입장에서 설파한 것이요, 리통기국설은 리일과 기분수를 종합적으로 본 것이다."
여기서 ‘현상즉본체 본체즉현상‘이라는말은 ‘이일분수‘ 보다는 오히려 ‘리통기국‘에 더 적절한 것처럼 보이는데, ‘리통기국‘이 본체로서의 ‘일‘과 현상으로서의 ‘기분수‘를 종합하고 있다는 점은 잘 말해주고 있다. 다만, ‘리통기국‘은 리의 보편성보다는 기의 특수성에 더 많은 강조점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리와 기의 존재론적 특성에 관한 이이의 다음 언급을 살펴보자.
리와 기는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아 한 물건인 것 같으나 다르다고 하는 까닭은, 리는 무형이고 기는 유형이며, 리는 무위이고 기는 유위이기 때문입니다.
무형과 무위이면서 유형과 유위의 주재가 되는 것은 리이고, 유형과 유위이면서 무형과 무위의 그릇이 되는 것은 기입니다. 리는 무형이고 기는 유형이므로 리는 통하고 기는 국한되는 것이며, 리는 무위이고 기는 유위이므로 기가 발하여 리가 타는 것입니다.
이이에 의하면,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천지만물은 리와 기의 두 측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 리는 형이상의 본체적 측면을 나타낸다면, 기는 형이하의 현상적 측면을 가리킨다.
천지만물은 실제로는 리와 기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합쳐져 일체로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인간은 천지만물을 설명하기 위해서 리와 기로 구분한다는 것이다.
기는 물질-에너지로서유형의 운동성이 있는 물리적인 실체인 반면, 리는 작용성이 없고 무형인것으로서 물리적 실체를 주재하는 원리나 이유에 해당된다. 리는 무형과 무위라는 속성에 의해 만물에 관통하는 초시공적 보편성을 지니는 반면, 기는 유형과 유위의 속성에 의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국한되는 특수성과 개별성을 띤다. 이 점에서 "리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리와 기의 이와 같은 존재론적 속성에 의해 천지만물은 예외 없이 "기가 변화하고 리가 그것에 타는"방식으로 작용하고 현상화한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어서, 마음과 지각은 "기가 발하고 리가 올라타는 하나의 방식과 경로로만 작동한다.
이 점에서 ‘리통기국‘은 ‘기발이승일도설‘이라는 주기론적 지각론의 존재론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리통기국‘은 표면적으로는 리의 보편성을 말함으로써 우주론적 원리나 물리법칙 같은것을 강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 상 그것이 지시하는 바는 만물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소이연‘ 즉 현상적 그러함의 근본적인 까닭이나 존재의 이유에 가까운 것이다. 그것은 현상들 속에서 발견되어야 할 이념으로서 본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더구나 리의 본체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유형 유위한 기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다음의 인용문은 이 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리의 통합‘은 무엇을 말하는가? 리란 것은 근본과 말단이 없고 앞과 뒤도 없습니다. (중략) 그러므로 기를 타고 유행하여 천태만상으로 고르지 아니하나 그 본연의 신묘함은 없는 데가 없습니다. 기가 치우치면 리도 역시 치우치나, 그 치우친 것은 리가 아니라 기입니다. 기가 온전하면 리 또한 온전하나, 온전한 것은 리가 아니라 기입니다.
맑고 탁한 것ㆍ순수하고 잡박한 것ㆍ찌꺼기 · 재 · 거름 • 오물 가운데도 리가 있지 않은 곳이 없어 각각 그 본성이 되지만, 그 본연의 신묘함은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임을 ‘리의 통합‘이라 합니다.
‘기의 국한됨‘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기는 이미 형제와 흔적에 관련되므로 근본과 말단, 앞과 뒤가 있습니다. 기의 근본은 담일청허할 뿐이니, 어찌 일찍이 찌꺼기 · 재 · 거름 • 오물 등의 기가 있겠습니까.
오직 그것이 오르내리고 날아올라 조금도 쉬지 않으므로, 천태만상으로 고르지 않아 수만가지 변화가 생깁니다. 여기서 기가 유행함에 그 본연을 잃지 않는 것도 있고 그 본연을 잃는 것도 있으니, 이미 그 본연을 잃으면 기의 본연은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 치우친 것은 치우친 기요 온전한 기가 아니며, 맑은 것은 맑은기요 탁한 기가 아니며, 찌꺼기 · 재 · 거름 • 오물은 찌꺼기 · 재 · 거름 • 오물의 기요 담일청허한 기가 아니니, 이것은 리가 만물 가운데서 그 본연의 신묘함이 어디서나 그대로 존재하지 않음이 없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이를 일러 기의 국한됨이라 합니다.
위의 설명에서 눈에 띄는 점은 주도권이 리에 있지 않고 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이에 의하면, 리는 항상 기에 의 존하므로 "기가 치우치면 리도 역시 치우치며 기가 온전하면 리 또한 온전"하여 기에 따라 수많은 현상적 사물들의 본성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사물을 격물궁리한다면, 그 본성적 원리나 법칙 따위를 지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리의 통합‘ 즉 리의 ‘본연의 신묘함‘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리가 기에 의존한다면 항상 기의 유행에 따라 변형된 상태로 정해져서 존재해야 할 것인데, 리의 ‘본연의 신묘함‘은 기의 유행에 관계없이 어느 사물이든 그 안에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의 본성이나 특수한 원리와는 다른 것으로서 만물에 대해 보편적이고 무차별적인 것이다. 기의 근본인 ‘담일하고 맑고 텅 빈‘것은 변형된 기에 전혀 남아있지 않는 것과 달리, 리의 본연은 잡다한 어떤 기에도 존재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능한 하나의 해석은, 리의 ‘본연의 신묘함‘이란 곧 기의 유행과 변형 상태에 제한을 받지 않는 것으로서, 기의 본래적 상태에 대해 일깨워주는 존재의 이유나 의미 같은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리의 본체는 잡다한 수많은 현상들 안에서 그 현상들의 본연 상태는 어떤 것이라고 인간에게 말해주는 나침반이나 이정표의 역할을 한다는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기의 본연 상태란 실재하는 것은 아니며, 과거에 실제했었는지도 매우 불분명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되었든 리의 본연은 특정한 현상들의 이상적인 모델이나 이상향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본체가 없다면 현상계의 잡다하고 변화무쌍함 속에서 인간은 나아갈 방향을 잃게 될 것이다. 다만 사물들은 이러한 이념적 본체를 자각할수 없으며, 오로지 인간만이 그와 같은 본체가 있음을 확신하고 자신의 기질을 본래 상태로 만들려는 변화기질의 수양공부를 할 수 있다.
다음의 인용문은 본체 속에 현상이 있고 현상 속에 본체가 있다는 ‘현상즉본체,본체즉현상‘의 사상을 말해준다.
‘리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는 것은 본체 상에서 말해야 할 것이요 또한본체를 떠나서 따로 유행을 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성이 사물의 성이 아니니, 이것은 기의 국한된 것이요, 사람의 리가 곧 물의 리이니 이것은 리의 통한 것입니다. 모나고 둥근 그릇은 같지 않으나 그릇 속의 물은 한가지요. 크고작은 병은 같지 않으나 병 속의 공기는 한가지입니다. 기의 근본이 하나인 것은 리가 통하기 때문이요 리가 만 가지로 나누어진 것은 기가 국한되기 때문입니다. 본체 가운데 유행이 갖추어 있고 유행 가운데 본체가 존재하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리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는 설이 과연 한쪽으로 떨어졌습니까?
위의 인용문을 보면, 이이가 ‘리통기국설‘을 본체의 차원에서 거론한 것이며 현상적 사물들의 이치에 대한 인식은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물들의 본성은 기의 유행과 국한성에 따른 결과로서 인간의 본성과는 다르다. 그러나 사물들의 리의 본연은 본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동일한데, 이것은 리의 본체의 관통성과 보편성 때문이다.
예를 들어, 둥근 그릇과 네모난 그릇은 다르지만 그 안에 담긴 물은같으며, 큰 병과 작은 병은 다르지만 그 안의 공 기는 동일하다. 여기서 그릇과 병의 다름은 기가 국한된 것으로 인한 결과요 그 안의 물과 공기의 동일함은 리의 본체가 관통해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리통기국설‘은 본체에 기의 유행현상의 가능성이 함축되어 있고, 유행현상에는 본체가 내재한다는 것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동기‘의 이러한 함의가 가능하기위해서는 인간의 의식현상이 특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리와 기는 실제로는 존재의 차원에서는 일체로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본체 가운데 유행이갖추어 있고, 반대로 유행 가운데 본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의 현상적 의식 속에 기의 본연에 대해 상기시켜 주는 어떤 것이단지 이념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본체와 현상을 강조한다는점에서 이이의 존재론적 논의들은, 정이나 주희가 비판했던 노불의 본체론적 존재론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이는 인간의 지각과 의식현상을 중시하기 때문에, 노블의 본체론과 차별화시켜서 ‘본체론적 현상학benti phenomenology‘ 이라고 칭할 수 있다고 본다.
‘리기지묘‘도 이러한 본체 현상학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리와 기의 신묘함(결합)은 알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무릇 리의근원은 하나일 뿐이요, 기의 근원도 하나일 뿐입니다. 기가 유행하여 고르지못하면, 리 역시 유행하여 고르지 못하니 기는 리를 떠날 수 없고 리도 기를 떠날 수 없습니다. 이와 같다면 리기는 하나이니, 어디에서 다름이 있음을 보겠습니까? 이른바 ‘리는 리이고 기는 기이다‘라는 말은 어디에서 그 ‘리는 리이고 기는 기이다‘라는 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
위의 인용문은 리와 기가 존재론적으로 일체이고 하나임을 말해준다.즉, 리의 근원도 하나이고 기의 근원도 하나인데, 우주에는 두 개의 근원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리와 기는 일체이고, 기의 유행에 따라 리역시 유행하여 수많은 원리와 본성들로 지각될 뿐이다. 결국 "리는 스스로 리이고 기는 스스로 기이다"라는 말은 단지 이론상에서만 가능할 뿐, 실제 세계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실재하는 세계는 리와 기가 일체화된본체와 그 유행현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의식 현상 속에는 기의 본연 상태를 일깨워주는 표지처럼 리의 본연이 존재하므로, 인간은 현상적 마음속에서 그와 같은 리의 본연을 인식할 수 있도록 자신의 기질을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의식 현상 속에서 본체를 인식해야 한다는이이의 현상학적 견해는 노불의 본체론을 지각론과 결합시킨 독특한 사유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본체 현상학적 특성은 율곡철학 속에서 주기론적 지각론이나 인심도심론에 비해 그 비중이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각론과는 다른 사유의 결을 지닌 것으로서 율곡철학의 독창적 일면을 이루는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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