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성 이론
정신적인 속성과 물질적인 속성, 마음과 몸이 근본적으로 동일한 속성이라고 말할 수 없는가?
바로 이것이 1950년대 호주의 철학자인 플레이스(Ullin Thomas Place)와 스마트(J. J. C. Smart)가 발전시킨 동일성 이론이다. 정신적인 속성과 물질적인 속성은 동일하다. 정신적인 속성에 대한 표현들은 마음 내적인 경과도 어떤 행동 성향도아닌, 뇌의 한 속성을 말해 준다. 이와 함께, 정신적인 것에 대한 표현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표현으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요구는 폐기된다. 그러면 정신적인 속성들이 어떻게 두뇌의 속성들과 동일한 것이 가능할수 있는가?
프레게(1848-1925)의 생각이 여기서 도움을 줄 수 있다.
"새벽별은 새벽별이다"와 "새벽별은 저녁별이다"라는 두 개의 진술을 생각해 보자.
첫 번째는 a=a라는 형식의 문장이다. 이는 동어 반복(tautology)이고, 아무런 새로운 앎도 주지 않는다.
반대로, 두 번째 문장은 a=b라는 형식이다 이런 문장은 새로운 지식을 제시해 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새벽별이 저녁별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두 번째 진술에 따라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 두 표현 즉 ‘새벽별‘과 ‘저녁별‘은 동일한 대상, 금성(venus)을가리킨다. 지칭 대상은 같지만, 표현은 다르다. 새벽별은 아침에 뜨는 가장 밝은 별이며, 저녁별은 저녁에 뜨는 가장 밝은 벌이다.
하나의 대상을 다양한 표현으로 지칭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동일한 두뇌 상태에 대해서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두뇌 상태에 대해서 "지금 해가 빛나고 있다고 철수는 생각한다"라는 문장으로도, "철수의 두뇌의 특정 부위가 지금 이러저러하게 활성화되고 있다"라는 문장으로도 지칭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두뇌의 상태가 어떠한 정신적 상태와 같은가? 철학은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 이는 뇌 과학 (신경 과학)이 맡아야 할 과제이다. 뇌 과학은 어떤 종류의 정신적 상태가 어떤 종류의 두뇌 상태와일치하는지 연구하고 규정해야 한다.
그러나 동일성 이론은 수긍되기 어렵고, 경험적으로도 반박된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특정한 정신적 상태가 상이한 신경적 상태들과 일치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게다가 같은 사람일지라도 일생 동안 정신적 상태와 두뇌 상태들의 일치가 변화될 수 있다. 또한 뇌손상을 입은 경우, 손상된 두뇌 부위가 맡았던 역할을 다른 부위가 떠맡을 수 있다는 것도 입증되었다.
기능주의
정신은 육체의 ‘기능‘으로 환원된다. 퍼트넘(Hilary Putnam)과 포더(Jerry Fodor)는 기능주의이론을 발전시켰다. 기능주의의 핵심은, 정신적인 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육체적(기능)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정신적인 것의 복수 실현 가능성‘이다. 기능주의는 정신적 상태를 기능적 상태로 규정한다. 이 기능을통해서 정신의 상태를 식별한다.
정신의 기능적 상태는 인과적 역할을 한다. 정신 상태의 기능은 우선 입력(Input)에 의한 정신 상태를 일으킴을 통해, 두 번째로 정신 상태를 통한 출력(Output)을 일으킴을 통해, 세 번째로는 다른 정신적 상태들에 대한 인과적 관계들을 통해 규정된다.
예를 들자면, 통증은 무엇인가? 통증은 신체의 손상을 통해 야기되고, 통증은 비명과 신음 그리고 손상된 부위로 주의력을 돌리게 만든다.
이것이 통증을 느낄 수 있는 존재에게서 통증이 떠맡게 되는 기능 혹은인과적 역할이다. 어떤 존재가 이런 인과적 역할이 관찰 되는 상태에 있다면, 그는 통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동일성 이론이 정신 현상을 두뇌 현상으로 바꾼 반면, 기능주의는 정신 현상을 육체적 기능으로 치환한다.
반론 1
두뇌 과정에 비해서 우리는 우리의 정신적 상태에 대해서는상대적으로 정확하게 안다. 정신적 상태들은 두뇌 활동이 갖지 않는 속성을 가지므로, 그 둘은 동일하지 않다.
대답
이는 동일성 이론을 오해하고 있다. 동일성 이론에 따르면,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에 대한 표현이 동일하다는 것이아니라, 그 둘이 같은 대상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반론2
생각과 감정은 주관적이고, 특정한 방식으로 느껴진다. 해변에서의 휴가에 대한 생각 혹은 화상을 입었을 때의 통증은 특정한 느낌과 연결된다. 반면 그에 해당되는 두뇌 상태에 대해서는 느낄 수가 없다.
대답
생각과 감정 역시 언어적인 표현으로서 느껴지지가 않는다.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떤 상태이며, 이 상태는 곧 두뇌의 상태이다.
반론 3
기능주의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한다. 빨간색을 보면 초록색으로, 초록색을 보면 빨간색으로 느끼는 색맹인 사람이있 다. 이 사람은 신호등이 초록색이면 운전을 계속하거나, 초록색 토마토는 장바구니에 담지 않는 등 정상적인 사람들처럼 초록색 대상에 대해똑같은 반응을 보여 준다.
빨간색 물체나 초록색 물체를 볼 때, 그의 정신적 상태의 기능적 반응은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다. 그러나 이 사람이 동일한 색채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초록색을 지각할 때, 이 사람은 빨간색을지각하기 때문이다. 기능주의는 이 차이를 실명할 수 없다.
대답
만일 그가 다른 것을 느낀다면, 그의 상태가 정말로 같은 기능을 할 수 있는지가 분명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그가 다른 색채 감각을 가진다는 것을 남이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확인할 수 없다. 확인할 수 없는 것에 근거한 이 반론은 내용 없이 형이상학적 테세에 근거하는 것이다.
반론 4
남이 어떤 것을 느낄 때,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느낄 수 없다. 따라서 그 느낌을 알 수 없다. 네이글이 말하듯, 박쥐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내적인 관점에서 지각할 때에만 우리는 이 주관적인 느낌에 대해 알 수 있다. 정신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려고 하는 다른 모든 물질주의처럼 기능주의는 정신적인 상태들의 주관적 특성을 설명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다.
만일 기능주의가 옳다면, 모든 정신적 상태들을 기능적으로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이론이 있어야만 한다. 이 이론이 우리에게 들어맞으면서, 또한 다른 존재에게도 들어맞는다면, 그 존재도 정신 상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동일한 하나의 이론이 정신적 상태를 가진 모든 존재에게 적용되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틀렸다.
왜냐하면, 인간들 사이에서도 이미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특정한 생각을 가진 전문가들은 비전문가와 다르게 처리하며, 장님은 정상적인 사람과 다르게 지각할 수도 있다. 이런 사실을 고려해 볼 때, 하나의 통합 이론은 가능하지 않으며, 철학적 입장으로 기능주의는 옳지 않다.
무법칙적 일원론
몸과 마음은 ‘일원적‘이다. 그 사이에 ‘법칙‘은 없다. 데이비드슨(Donald Davidson, 1917-2003)은 정신적 속성을 육체(물질)적 속성으로 환원시키는 문제를 피해 가는 방식으로 대답하고자 한다.
그의 테제에 따르면, 그러한 환원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데이비드슨은 자신의 입장을 무법칙적 일원론이라고 부른다. 그의 입장은 오직 물질만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일원적이며, 정신적인 속성들과 물질적인속성들을 연결해 주는 법칙이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무법칙적이다.
데이비드슨은 어떻게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이 결론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신과 육체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세 명제를 연결해서 이해할 수있다.
(1) 어떤 정신적인 사건들은 육체(물질)적인 사건들을 일으키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2) 인과 관계가 있는 곳에는 엄밀한 법칙이 있다.
(3) 정신적인 사건들을 예측할 수 있는 엄밀한 법칙은 없다
각각 참인 것으로 보이지만, 함께 연결할 경우 세 명제들은 서로 모순 관계에 있다. 만일 정신적인 사건이 육체적인 사건을 일으킨다면, 그에 상응하는 엄밀한 법칙들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세 번째 명제는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을 연결해 주는 그러한 법칙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첫 번째 명제는 사람이 주위의 환경에 의지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로서의 자기 이해와 일상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확정된다.
두 번째 명제에 따라서, 만일 엄밀한 법칙이 있다면, 하나의 정신적인 사건은 하나의 육체(물리)적 사건과 인과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 엄밀한 법칙에 의해 기술되는 사건들은 육체적 사건들이다. 따라서 정신적사건 역시 육체적 사건이어야만 한다.
세 번째 명제는 마음의 영역과 물질의 영역이 어떻게 인과적으로 상호 작용하는지를 설명해주는 엄밀한 법칙은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만일 어떤 상태를 정신적인 상태로 기술한다면, 이는 엄밀한 물리적 법칙에 의해 파악되지 않고서도 기술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앞의 두명제와 모순 관계에 빠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의 상태로 기술하는것도 어디까지나 육체(물리)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즉 기술하고 설명하는 층위와 물질적 존재론적 층위를 구분해야 한다. 동일한 사건은존재론적 층위와 기술적 층위에서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저넉별‘과 ‘새벽별‘이라는 표현들은 동일한 행성을 가리키지만, 그 두 표현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를 보여 준다.
데이비드슨의 해결책은 모든 개별적인 정신적인 사건은 동시에 육체(물리)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정신적인 사건과 육체적인 사건들 사이에 법칙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단지 구체적인 사건들 사이에서 존재론적 층위에서 단 하나의 동일성만이 허용된다. 기술적 층위에서는 정신적인 사건들과 육체적인 사건들 사이의 동일성이 아니라, 오직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에대한 언어만이 존재한다. 이를 통해서 데이비드슨은 많이 약화된 동일성 이론을 주장하게 된다. 따라서 무법칙적 일원론은 위의 입장들에 제기된 반론에 그대로 직면하게 된다.
반론 1
데이비드슨의 무법칙적 일원론은 어떻게 정신이 신체와 연관을 맺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 않는다. 정신적인 것의 무법칙성 테제는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사이에 엄밀한 법칙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로써, 정신적인 것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겨진다.
반론 2
데이비드슨이 어떤 정신적인 사건들은 육체적인 사건들을 일으킨다고 주장하려고 한다면, 그는 어떠한 속성들에 입각해서 정신적 인 사건들이 인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만 한다.
만일 그 속성 들이 정신적인 속성들이라면, 육체(물리)적인 영역은 닫혀있지 않아야 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만일 그 속성들이 물리적 속성들이라면, 정신적인 인과에 정신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남겨질 수 있는지, 또 그것은 무엇인지가 이해되지 않게 된다.
요약
정신적인 속성들의 담지자는 무엇인가? 정신적인 실체인가? 아니면, 물질적인 실체인가?
실체 이원론에서 정신적 속성들의 담지자는 신체와 독립된 정신적 실체이다. 그러나 실체 이원론은 정신과 신체가 어떻게 서로 인과적 상호 작용을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다음의 세 가지 물질주의는 이런 문제에 부닥치지 않지만, 정신적인 속성이 육체적인 속성으로 환원될 수 있음을 설명해야만 한다.
논리적 행동주의는 정신적인 속성이 행동에 대한 성향으로 환원될수 있으며, 정신적인 속성과 행동 사이의 관계는 논리적이고 개념적인 관계라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경우에는 그런 환원이 불가능하며, 정신적인 속성과 행동 사이에 인과적인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심리 철학에서 동일성 이론은 정신적인 속성들과 물리적인 속성들이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일성 이론의 이러한 주장은 경험적으로 틀렸음이 드러났다.
기능주의는 정신 상태를 기능적 상태로 간주함으로써, 동일성 이론을 더 정교하게 만든다. 기능주의는 정신적 상태의 주관적인 특성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기능주의가 옳다면, 정신에 대해서 유일한 하나의 이론만 있게 될 것이다.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데이비드슨이 주장한 무법칙적 일원론은 모든 개별적인 정신적 상태는 육체적 상태라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데이비드슨은 동일 이론성과 기능주의가 직면한 문제들을 피해 간다. 그러나 무법칙적 일원론은정신이 무엇이며, 정 신과 신체는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는 난점에 직면한다.
이 세 이론은 정신을 몸의 행위, 두뇌어 상태, 혹은 기능으로 환원시킨다. 행위는 겉으로 드러난 것이고, 두뇌 상태와 기능은 좀 더 과학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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