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 행사의 의의와 방법
이미 살핀 바와 같이, 권리는 일정한 생활이익을 누릴 수 있게 하는「법적 힘」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일정한 이익을 누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법에 의하여 인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주체가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잠재적인 가능성으로서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므로, 그가 목적으로 하는 이익을 실제로 누리기 위해서는 그의 잠재적인 힘을 현실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권리의 내용을 현실화하는 과정이 권리의 행사이다. 예컨대,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소유권의 객체, 즉 소유물을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법에 의하여 인정되어 있다는 것이고, 소유권 자체는 잠재적인 힘에 지나지않는다. 따라서 소유권자가 실제로 소유물로부터 이익을 누리기 위해서는 소유권을행사해서, 소유물을 현실적으로 사용 또는 수익하거나 처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권리 자체는 관념적인 것이나, 권리의 행사는 그러한 관념적인 권리를 현실화하는 것이므로, 사람의 오관에 의하여 느껴 알 수 있는 사실로서 나타난다.
「권리의 행사」는 권리의 주장과는 다르다. 보통 권리의 주장이라고 하면, 그것은 권리의 존재에 관하여 다툼이 있거나 또는 권리의 행사가 방해되고 있을 때 또는방해당할 염려가 있는 경우에, 특정인으로 하여금 그 권리의 존재를 인정하게 하려는행위를 일컫는다.
이와 같이 권리의 주장은 권리의 내용을 곧 현실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권리 자체의 존재를 타인으로 하여금 승인하게 하려는 것이므로, 권리의 행사와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그러나 청구권의 행사와 같이 특정인에 대하여 권리를 행사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권리의 주장이 따르므로, 권리의 행사와 그 주장을 구별하는 것이 곤란한 경우도 있다.
동일한 물건 위에 여러 개의 물권이 성립하고 있을 때에는 원칙적으로 그들 물권 사이에는「순위」가 있게 된다. 즉, 소유권과 제한물권 사이에는 제한물권의 성질상 그것이 언제나 소유권에 우선한다. 그러나 제한물권 상호간에서는 그것이서로 종류를 달리하는 물권일 때에는 일정한 원칙이 없고, 법률의 규정에 의하여 순위가 정해진다. 그러나 같은 종류의 권리 상호간에는 「먼저 성립한 권리가 나중에 성립한 권리에 우선한다(First in time, first in right)는 원칙이 지배한다.
그리고 채권에서는 원칙적으로 선행주의가 지배한다. 원래 채권법에서는 「채권자 평등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어서, 같은 채무자에 대한 여러 개의 채권은 그의 발생원인 · 발생시기의 신후 채권액의 다소를 묻지 않고 평등하게 다루어지며, 특정 채권자만이 우선적으로 변제받을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그리하여 궁극에 가서는 모든 채권은 채무자의 총재산으로부터 채권액에 비례하여 평등하게 만족을 얻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이 원칙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은 파산의 경우이며(그러나 이때에도 예외는 있으며, 이른바 별제권을 가지는 자는 우선변제를 받는다). 파산절차 밖에서는 채권 사이에 순위가 없기 때문에, 각 채권자는 임의로 그의 채권을 실행할 수 있다. 따라서 먼저 채권을 행사한 자가 이익을 얻는다는 결과가 된다. 이것이 선행주의이다.
권리 행사 자유의 원칙
개인주의 · 자유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또한권리 본위로 구성되어 있는 근대사법에서는 권리의 행사는 권리자의 자유에 맡기는 것이 원칙이다. 권리를 행사할 의무가 권리 속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친권(913조 참조)과 같이 타인의 이익을 위하여 인정되고, 따라서 그것을 행사할 의무가 따르게 되는 권리도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것이다. 원래 법질서가 어떤 권리를 준다는 것은 권리자의 이익을 위하여, 그것과 대립하는 반대이익이 침해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따라서 권리의 행사로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더라도 원칙적으로 손해를 배상할 필요는 없다.
권리 행사의 자유는 어느 사회에서나 아무런 제한이 없는 절대 자유일 수는 없다. 권리의 자유는 다른 권리의 자유와 맞닿을 때에는 어떤 한계를 가져야만 한다. 이 한계는 권리의 절대적 자유에 대한 수정이라는 형식으로 의식되고, 또한 현실화되었다.
권리 자유의 원칙에 대한 수정원칙으로서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쉬카아네」(Chicane, Schikane)의 금지이다. 타인을 해칠 목적만으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쉬카아네이다. 이를 금지하는 데에 주관적 요건(타인을 해할 목적)이 강조된다. 그러므로 권리의 객관적인 범위는 본래 무제한이라는 근본원칙에는 변함이 없다. 독일민법이 「쉬카아네」 금지의 규정을 두고 있다(동법 226조).
그 후 19세기 말부터 20세기초에 걸쳐서 권리 자유의 원칙에 대한 수정은 확대되었는데, 그것은 권리의 근거는 사회적 승인이다. 따라서 권리는 본래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범위에서만 존재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이론을 기초로 한다. 여기서 권리 자유는 원리적으로 부정되고, 권리 그 자체에 객관적인 한계가 있는 것으로 인 식되었다. 1919년의 바이마르헌법 제153조 제 3항의 "소유권은 의무를 진다. 소유권의 행사는 동시에 공공의 복리에 대한 봉사이어야 한다."라는 유명한 규정은 이러한 법사상에 입각한 것이다. 우리 헌법 제23조 제2항에서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한다."라고 정한 것도 같은 취지이다.
권리 행사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부정하는 사상이 나오게 된 역사적인 이유는자본주의의 발달이 가져온 폐해, 특히 심한 부의 불평등에 있었다. 자본주의의여러 폐단이 발생하자 개인주의적 법원리에 대하여 반성하고,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공의 복리에 따라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는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여기서 권리는 개인적 이익의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주어지는 것은 사회의 평화 또는 행복을 위한 것이므로, 권리의 개념 자체 속에 이를 공공의 복리를 위하여 행사해야 할 의무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게 되고, 절대성을 자랑하던 권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그 내용과행사는 공공의 복리와 조화되어야 하며, 그 범위에서 효력이 인정된다고 하게 되었다. 오늘날 권리는 절대 자유 또는 신성불가침이 아니라, 사회성 · 공공성을 가지는것으로 되었다.
신의성실의 원칙
권리의 행사는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2조1항). 신의성실 (Treu und Glauben)은 상대방의 신뢰를 헛되이 하지 않도록 성의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다. 원래 신의나 성실은 사람의 행위나 태도에 대한 윤리적·도덕적 평가를 나타내는 말이다. 법원칙으로서 신의성실의 원칙은 그러한 윤리적 도덕적 평가를 법적 가치판단의 한 내용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신의성실의 원칙은 그 기원을 로마법에 두고 있으나, 근대사법에서 이 원칙을 처음으로 규정한 것은 프랑스 민법이다. 동법 제1134조 제 3항은 "계약은 신의에 따라서 이행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독일 민법은 한편으로는 "계약은 거래관행을 고려하여 신의성실이 요구하는 대로 해석하여야 한다."(동법 157조)라고 규정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채무의 이행에 관하여 "채무자는 거래관행을 고려하여 신의성실이 요구하는 대로 급부를 할 의무를 진다." 동법242조)라고 규정하고 있다. 말하자면 신의칙은 이때까지는 법률행위의 해석과 채무의 이행에 관한 원칙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학설 · 판례는 이것을 기초로 하여 신의칙을 채권법 전체에 통하는 최고원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스위스민법은 신의칙은 단지 채권관계에서만 타당한 것이 아니라, 널리 권리·의무 일반에 타당한 것이라는데서, 이 원칙을 처음으로 민법 전체에 걸치는 최고원리로 삼았다. 즉, 동법 제2조제 1항은 "모든 사람은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에 있어서 신의성실에 따라 행동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민법은 스위스민법을 모범으로 하여 제 2 조제 1항을 둔 것이다.
신의성실의 원칙은 특히 엄격한 법적용의 가혹함을 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법규칙을 그대로 적용하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가혹한 결과가 발생하는 경우 법적용자인 법관의 법감정이나 윤리감각에 기하여 법규칙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을 제한하거나 배제하게 하는 하나의 법적 장치로서 기능한다(대판2010. 5. 27, 2009다44327).
신의성실의 원칙은 민법 전체를 통한 일반원칙이므로, 채권관계뿐만 아니라, 널리 물권관계나 가족관계에도 두루 인정되어야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채권법의 분야에서 그 실효성이 가장 크다. 그리고 민법 제2조 제 1항이 규정하는 것과 같이 이 원칙이 적용되는 것은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이다. 그러나 권리·의무는 결 국은 사법관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제2조 제 1항을 비단 권리 행사와 의무 이행에 관해서만 규정하는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법률과 계약의 해석으로 당사자 사이에 어떤 내용의권리·의무가 생기는지를 결정하는 데도 이 원칙을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 법률행위의 해석원리로서의 이 원칙의 작용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루기로 한다.
권리 행사나 의무 이행이 신의성실에 반하는 경우에는 어떤 효과가 생기는가? 권리 행사가 신의성실에 반하는 경우에는 다음에서 설명하는 권리남용이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 2 조 제 1항과 제 2항은 서로 안팎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의무 이행이 신의성실에 반하는 경우에는 의무를 이행한 것이 되지 않고 의무 불이행의 책임을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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